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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책장 넘기듯 돌변한 태도

  • 오전 내내 전쟁 같은 업무에 시달렸던 강서연은 나른하게 기지개를 켰다. 어느덧 점심 식사 시간, 하나둘 식당으로 향했다.
  • “서연 씨, 우리도 가자.”
  • 진여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강서연을 불렀다.
  • “응.”
  • 강서연도 얼른 모니터를 끄고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 하지만 모퉁이에 다다른 두 사람의 앞에 예기치 못한 불청객이 나타났다. 강서연의 입가에 머물렀던 엷은 미소가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었다.
  • “강서연.”
  • 심윤주의 목소리는 무덤덤했고 감정을 읽어낼 수 없었지만 강서연은 심윤주가 좋은 의도로 회사까지 찾아올 리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 진여울에게 사정을 얘기하고서 강서연은 심윤주를 데리고 인적이 드문 야외 테라스로 향했다.
  • “회사엔 어쩐 일이세요?”
  • 심윤주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 “시치미 떼지 말고 지난번에 얘기했던 네 동생 결혼 자금이나 내놔.”
  •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저 돈 없으니까 아무리 다그쳐도 소용없어요.”
  • “강서연, 험한 꼴 당하기 전에 순순히 내놔.”
  • 심윤주이 음산한 목소리로 위협했다.
  • “이 회사 계속 다니고 싶다면 순순히 내 말 따르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나도 내가 무슨 일할지 장담하지 못해.”
  • 강서연은 안색을 딱딱하게 굳힌 채 주먹을 움켜쥐었다.
  • 심윤주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 “이미 결혼했다면 적어도 예물 정도는 내놔야지. 난 많은 걸 요구하는 거 아니야. 2천만이면 돼. 네가 순순히 2천만을 내놓기만 한다면 유인석 쪽도 내가 알아서 거절할게. 아니면… 어차피 난 돈만 받으면 장땡이야. 유인석에게서 돈을 받는 쪽이 나한테는 더욱 쉬운 일이야. 그러니까 알아서 해.”
  • “그만하세요.”
  • 강서연이 서슬 퍼런 목소리로 호통쳤다.
  • “당신이 무슨 짓을 하든 제가 할 수 있는 답은 한가지예요. 전 돈이 없어요.”
  • 그러고서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은 심윤주를 남겨둔 채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
  • 멀어지는 강서연의 뒷모습을 하릴없이 응시하던 심윤주는 가쁜 숨을 씨근덕거렸다. 강서연이 이렇게 강경하게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 이 방법까지 쓸 생각이 없었는데 이건 모두 강서연이 고분고분하게 그녀의 말을 듣지 않은 탓이었다.
  • “후회하지 마, 강서연.”
  •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음산하게 중얼거리는 심윤주의 눈동자가 형형한 빛을 내며 번뜩였다.
  • 강서연과 심윤주가 자리를 떠나자마자 구석진 곳에서 누군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놀라움이 가득 찬 여인의 눈가에 웃음기가 스쳤다.
  • 강서연이 결혼했을 줄이야.
  • 심윤주가 회사에 찾아온 뒤로 입맛이 뚝 떨어진 강서연은 먹는 둥 마는 둥 하고서 사무실로 돌아갔다.
  • 하지만 사무실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귓속말로 무어라 속삭여댔다.
  • “대박. 그렇게 안 봤는데.”
  • “이미 결혼했다는데 그게 가짜일 리 있어? 결혼은 뭐 한 두 날 만나고 후딱 하나? 그 말인즉 예전부터 만나는 사람 있었는데 남자친구 없는 척 내숭을 떨고 있었던 거야.”
  • “쯧쯧, 사람은 겉만 보고 모른다더니.”
  • “…”
  • 강서연은 문득 의구심이 스쳤지만 별다른 생각 없이 의자를 당겨 앉았다.
  • “서연 씨, 결혼했다는 게 사실이에요?”
  • 그 말에 강서연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오전에 부시안이 한 말을 떠올린 강서연은 순간 머리가 지끈거렸다.
  • 반사적으로 부인하려고 입술을 달싹이던 찰나, 멀지 않은 곳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무리를 발견했다. 모두 예전 강서연의 추종자들로 평소 강서연에게 적극적으로 대시하던 사내들이었다.
  • 강서연은 문득 이 자리에서 결혼을 발표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그 상대가 부시안이라는 사실만 발표하지 않으면 될 일 아닌가. 이참에 꼬이는 날파리들도 싹 제거하고.
  • “네, 맞아요.”
  • 장내는 일순 술렁거렸다.
  • 벽에 바짝 붙은 채 엿듣고 있던 몇 쌍의 귀들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 “서연 씨, 대체 언제 결혼한 거예요? 왜 여태 한 번도 듣지 못했지?”
  • 동료들이 순식간에 강서연을 에워싸며 질문들을 퍼부어댔다.
  • “그러니까. 의리도 없이. 이렇게 감쪽같이 속이고. 우리 국수는 안 먹여줄 거예요?”
  • 강서연은 부끄러워 얼굴에 진땀이 났다.
  • 초고속 결혼에 강서연도 여태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
  • 그 돈이 아까워서 그런 건 아니지만 혹시라도 나중에 부시안에게 알려지면 곤란해질 것 같았기에 여지를 둔 것이었다.
  • “남편분 어떤 사람이에요? 서연 씨 같은 미인이 기꺼이 어장 전체를 포기하게 하다니.”
  • “이렇게 빨리 결혼한 걸 보면 만난 지 오래되었다는 뜻인데 그동안 얼굴 한 번 본 적 없네요.”
  • “…”
  • 득달같이 달려드는 동료들의 모습에 강서연은 황급히 핑계를 찾아 대충 얼버무렸다.
  • 모두가 떠나고 고요해진 자리에 앉아 강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그러고서 이내 업무에 집중하고 있는데 돌연 고막이 아플 정도로 휴대전화 알림음이 울렸다.
  • 확인해 보니 전부 예전에 그녀를 쫓아다녔던 추종자들이 선물을 돌려달라는 메시지들이었다.
  • “대박. 이 사람들은 너무 현실적인 거 아냐.”
  • 진여울이 참지 못하고 투덜거렸다.
  • “쫓아다닐 때는 간이며 쓸개며 다 내주더니 어떻게 태도 돌변하는 속도가 책장 넘기는 것보다 더 빠르냐.”
  • 강서연은 오히려 이게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 “애초에 받으면 안 되는 것이었는데 이 기회에 전부 돌려주고 나도 죄책감 덜고 좋지 뭐.”
  • 강서연은 이내 그녀에게 선물을 보냈던 사내들을 전부 같은 채팅방에 넣었다.
  • “물건은 집으로 보낼게요. 착불이라 택배비는 알아서 지불하시고요!”
  • 그녀가 공짜로 돈을 내게 하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