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내내 전쟁 같은 업무에 시달렸던 강서연은 나른하게 기지개를 켰다. 어느덧 점심 식사 시간, 하나둘 식당으로 향했다.
“서연 씨, 우리도 가자.”
진여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강서연을 불렀다.
“응.”
강서연도 얼른 모니터를 끄고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모퉁이에 다다른 두 사람의 앞에 예기치 못한 불청객이 나타났다. 강서연의 입가에 머물렀던 엷은 미소가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었다.
“강서연.”
심윤주의 목소리는 무덤덤했고 감정을 읽어낼 수 없었지만 강서연은 심윤주가 좋은 의도로 회사까지 찾아올 리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진여울에게 사정을 얘기하고서 강서연은 심윤주를 데리고 인적이 드문 야외 테라스로 향했다.
“회사엔 어쩐 일이세요?”
심윤주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시치미 떼지 말고 지난번에 얘기했던 네 동생 결혼 자금이나 내놔.”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저 돈 없으니까 아무리 다그쳐도 소용없어요.”
“강서연, 험한 꼴 당하기 전에 순순히 내놔.”
심윤주이 음산한 목소리로 위협했다.
“이 회사 계속 다니고 싶다면 순순히 내 말 따르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나도 내가 무슨 일할지 장담하지 못해.”
강서연은 안색을 딱딱하게 굳힌 채 주먹을 움켜쥐었다.
심윤주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미 결혼했다면 적어도 예물 정도는 내놔야지. 난 많은 걸 요구하는 거 아니야. 2천만이면 돼. 네가 순순히 2천만을 내놓기만 한다면 유인석 쪽도 내가 알아서 거절할게. 아니면… 어차피 난 돈만 받으면 장땡이야. 유인석에게서 돈을 받는 쪽이 나한테는 더욱 쉬운 일이야. 그러니까 알아서 해.”
“그만하세요.”
강서연이 서슬 퍼런 목소리로 호통쳤다.
“당신이 무슨 짓을 하든 제가 할 수 있는 답은 한가지예요. 전 돈이 없어요.”
그러고서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은 심윤주를 남겨둔 채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
멀어지는 강서연의 뒷모습을 하릴없이 응시하던 심윤주는 가쁜 숨을 씨근덕거렸다. 강서연이 이렇게 강경하게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이 방법까지 쓸 생각이 없었는데 이건 모두 강서연이 고분고분하게 그녀의 말을 듣지 않은 탓이었다.
“후회하지 마, 강서연.”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음산하게 중얼거리는 심윤주의 눈동자가 형형한 빛을 내며 번뜩였다.
강서연과 심윤주가 자리를 떠나자마자 구석진 곳에서 누군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놀라움이 가득 찬 여인의 눈가에 웃음기가 스쳤다.
강서연이 결혼했을 줄이야.
심윤주가 회사에 찾아온 뒤로 입맛이 뚝 떨어진 강서연은 먹는 둥 마는 둥 하고서 사무실로 돌아갔다.
하지만 사무실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귓속말로 무어라 속삭여댔다.
“대박. 그렇게 안 봤는데.”
“이미 결혼했다는데 그게 가짜일 리 있어? 결혼은 뭐 한 두 날 만나고 후딱 하나? 그 말인즉 예전부터 만나는 사람 있었는데 남자친구 없는 척 내숭을 떨고 있었던 거야.”
“쯧쯧, 사람은 겉만 보고 모른다더니.”
“…”
강서연은 문득 의구심이 스쳤지만 별다른 생각 없이 의자를 당겨 앉았다.
“서연 씨, 결혼했다는 게 사실이에요?”
그 말에 강서연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오전에 부시안이 한 말을 떠올린 강서연은 순간 머리가 지끈거렸다.
반사적으로 부인하려고 입술을 달싹이던 찰나, 멀지 않은 곳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무리를 발견했다. 모두 예전 강서연의 추종자들로 평소 강서연에게 적극적으로 대시하던 사내들이었다.
강서연은 문득 이 자리에서 결혼을 발표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그 상대가 부시안이라는 사실만 발표하지 않으면 될 일 아닌가. 이참에 꼬이는 날파리들도 싹 제거하고.
“네, 맞아요.”
장내는 일순 술렁거렸다.
벽에 바짝 붙은 채 엿듣고 있던 몇 쌍의 귀들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서연 씨, 대체 언제 결혼한 거예요? 왜 여태 한 번도 듣지 못했지?”
동료들이 순식간에 강서연을 에워싸며 질문들을 퍼부어댔다.
“그러니까. 의리도 없이. 이렇게 감쪽같이 속이고. 우리 국수는 안 먹여줄 거예요?”
강서연은 부끄러워 얼굴에 진땀이 났다.
초고속 결혼에 강서연도 여태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
그 돈이 아까워서 그런 건 아니지만 혹시라도 나중에 부시안에게 알려지면 곤란해질 것 같았기에 여지를 둔 것이었다.
“남편분 어떤 사람이에요? 서연 씨 같은 미인이 기꺼이 어장 전체를 포기하게 하다니.”
“이렇게 빨리 결혼한 걸 보면 만난 지 오래되었다는 뜻인데 그동안 얼굴 한 번 본 적 없네요.”
“…”
득달같이 달려드는 동료들의 모습에 강서연은 황급히 핑계를 찾아 대충 얼버무렸다.
모두가 떠나고 고요해진 자리에 앉아 강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서 이내 업무에 집중하고 있는데 돌연 고막이 아플 정도로 휴대전화 알림음이 울렸다.
확인해 보니 전부 예전에 그녀를 쫓아다녔던 추종자들이 선물을 돌려달라는 메시지들이었다.
“대박. 이 사람들은 너무 현실적인 거 아냐.”
진여울이 참지 못하고 투덜거렸다.
“쫓아다닐 때는 간이며 쓸개며 다 내주더니 어떻게 태도 돌변하는 속도가 책장 넘기는 것보다 더 빠르냐.”
강서연은 오히려 이게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받으면 안 되는 것이었는데 이 기회에 전부 돌려주고 나도 죄책감 덜고 좋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