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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능력 있으면 고자질하든가

  • 바둑알을 꺼내 들던 부시안의 손이 일순 멈칫했다. 그러고는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바둑알을 놓았다.
  • “네, 할아버지, 처음에는 할아버지 말씀대로 그런 마음이었지만 지금은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습니다.”
  • 그 말에 부형철이 흐뭇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 “그래, 둘이 서로 마음이 맞으면 더 바랄 것이 없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알콩달콩 사는 걸 보니 이제 더 이상 여한이 없구나. 이제 한시라도 빨리 증손자를 봐야지.”
  • 부형철은 이미 80세가 넘었다. 이 정도 연령이면 장기들에 하나둘 이상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 부시안의 눈에 이채가 서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 같은 시각, 복도로 나온 강서연은 이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전화기 너머로 심윤주가 어제와 똑같은 말을 늘어놓았다. 강서연은 대충 몇 마디 대꾸하고서 도로 병실로 돌아갔다.
  • 식사 시간이 되자 부형철이 기어코 나가자고 고집을 부리는 통에 부시안과 강서연은 부형철을 데리고 병원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 부시안은 부형철이 평소 즐겨 드시는 요리 몇 가지를 주문하고서 강서연에게 메뉴판을 건네며 나지막하지만 애정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 “먹고 싶은 걸 골라.”
  • 부시안에게서 메뉴판을 건네받은 강서연은 대충 보이는 대로 주문했다.
  • 곧 웨이터가 준비된 요리들을 차례로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 식사 내내 부시안은 아주 천연덕스럽게 강서연에게 반찬을 집어주며 사랑꾼 연기를 톡톡히 해냈다.
  • 강서연도 배운 대로 가지볶음 요리를 집어 부시안의 그릇에 담아 주었다.
  • “시안 씨가 가장 좋아하는 요리잖아요. 많이 드세요!”
  • 그러자 강서연을 향한 부시안의 눈동자에 경고의 빛이 스쳤다.
  • 맞은편에 앉아있던 부형철도 흠칫 놀라며 의아함을 내비쳤다.
  • “응? 시안이 어릴 적부터 가장 싫어하는 음식이 가지였는데.”
  • 강서연이 싱긋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 “할아버지, 사실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가지거든요. 시안 씨도 제 덕분에 가지를 좋아하게 되었어요!”
  • 그 말에 부형철의 입가에 머물렀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 “둘이 오래 있으면 습관도 바뀐다던데, 그 말이 사실이더구나. 나도 디저트라면 질색이었는데 네 할머니 덕분에 자연스럽게 좋아하게 되었어.”
  • 일이 이 지경이 된 이상, 안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부시안은 애써 화를 참으며 강서연이 집어준 가지 요리를 전부 먹어치웠다.
  • 어쩐지 슬금슬금 뒷일이 걱정되기 시작했지만 부시안이 화를 참는 모습을 보자 강서연은 십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것 같았다.
  •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와 병원으로 돌아오자마자 부형철이 입을 열었다.
  • “다들 일 바쁠 텐데 어서 가 봐. 서연이는 나중에 시간 나면 다시 할아버지 보러 오렴.”
  • 그 말에 강서연이 부시안을 힐끗 바라보았다.
  • “네, 할아버지, 그럼 저희 먼저 갈게요. 나중에 서연이를 데리고 다시 보러 올게요."
  • 강서연도 덩달아 웃으며 부형철한테 작별을 고했다.
  • 부시안은 강서연의 손을, 정확히 말하자면 아주 꽉 움켜쥔 채 나란히 병원을 나섰다. 강서연은 얼굴을 고통스럽게 일그러뜨리며 신음을 흘렸다.
  • “아야, 아야, 아야, 대표님… 할아버지가 아직 보고 계세요!”
  • “능력 있으면 고자질하든가.”
  • 부시안이 차갑게 대꾸했다.
  • 확실히 그럴 용기가 부족했다.
  • 정차된 차량 앞에 도착한 강서연은 곧장 조수석에 올라탔다. 부형철이 아직 지켜보고 있을 것임이 분명했기에 부시안은 자발적으로 강서연에게 안전벨트를 매 주었다. 순간 온몸을 뒤덮는 부시안의 음산한 기운에 강서연은 화들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 “대표님, 제가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정말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대표님이 제일 싫어하는 거랑 제일 좋아하는 거랑 헷갈렸어요!”
  •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 부시안이 뚫어져라 그녀를 응시하며 되물었다.
  • “진짜 맹세코 아니에요.”
  • 강서연이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사실 부시안의 짐작이 맞았다. 아까 레스토랑에서는 일부러 부시안을 골탕 먹이기 위해 가지를 집어주었던 것이었다. 어제 밖에서 두 시간이나 기다리게 한 벌이었다.
  • 하지만 부시안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진작 꿰뚫고 있었다. 차에 시동을 걸며 부시안이 서슬 퍼런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 “네가 별생각 없이 한 행동 하나에 할아버지가 우리 사이를 의심할 것이라는 생각은 안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