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번 사건 이후 디자인 부서에서 강서연의 인기는 예전 같지 않았다. 그녀가 지나갈 때마다 손가락질 당하기 일쑤였고 심할 때에는 일부러 어깨를 밀치며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강서연은 부아가 치밀었지만 애써 분노를 눌렀다.
“괜찮아. 괜찮아.”
일과 월급에 비하면 어린애 장난에 불과하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
그날 밤, 갑자기 생긴 회의를 마치고 밤늦게야 집에 돌아온 부시안은 아무렇지 않게 재킷을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고서 위층으로 올라가려던 찰나, 소파에 웅크리고 있는 가녀린 실루엣을 발견하고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강서연은 잠에 깊게 들지 못한 것인지 이마를 잔뜩 찡그린 채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문득 치미는 호기심에 부시안은 홀린 듯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똥차들, 다 비켜. 썩 거져 버려… 돈 버는 데 방해되게…”
부시안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미간을 문질렀다.
대체 얼마나 가난해야 꿈속에서도 돈 생각하지?
그때, 강서연의 앞에 놓인 노트북 화면이 깜빡였다. 부시안은 그제야 모니터 속에 실내 디자인 설계도가 그려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아직 대략적인 초안일 뿐이지만 디자인 컨셉의 참신함을 확인하기에 충분했다. 모든 획마다 강서연의 디자인 재능과 실력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모처럼 강서연이 다르게 보였지만 동시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재능이 있는데 어떻게 여태 알려지지 않은 것이지?
“음…”
강서연이 돌연 몸을 뒤척이더니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눈가에 맺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려 소파 커버를 적셨다.
부시안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눈으로 강서연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뒤에야 숨죽여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
부시안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눈동자에서 일렁이던 냉랭한 기운을 결국 차가운 코웃음으로 내뱉어졌다.
“다녀오셨습니까, 대표님…?”
그 순간, 귓가에 울려 퍼지는 고용인의 목소리에 부시안이 황급히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눈치 빠른 고용인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났다.
“담요를 덮어주세요.”
말을 마친 부시안은 곧장 몸을 돌려 위층으로 올라갔다.
다음날.
잠에서 깨어난 강서연은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담요를 발견하고는 눈가에 의혹이 스쳤다.
“서연 씨, 일어나셨어요?”
귓가에서 들려오는 고용인의 목소리에 강서연은 얼른 굳어진 어깨를 움직였다.
“담요 고마워요.”
고용인이 무어라 얘기하려 했지만 강서연은 이미 씻으러 위층으로 올라간 뒤였기에 입가에 맴도는 말을 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다.
황급히 회사로 뛰어간 강서연은 마지막 순간에 성공적으로 출석을 완료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직원 엘리베이터에 오르려던 찰나, 돌연 누군가 등 뒤로 그녀를 힘껏 밀쳤다.
순간 중신을 제대로 잡지 못한 강서연은 비틀거리며 앞으로 쓰러졌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가장 가까운 장애물을 붙잡지 못했다면 BC 그룹의 가장 큰 조롱거리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신히 중심을 잡고서 허리를 곧추세우고 고개를 들어 올리자 그곳에 한때 그녀의 추종자 중 한 사람이었던 사내가 서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닫히는 순간, 사내의 경멸과 혐오의 시선이 그녀의 가슴에 깊이 각인되었다.
강서연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호랑이도 평지에서는 개들에게 물린다더니, 그 말이 아주 정확했다!
“올라와.”
그때, 귓가에서 울려 퍼지는 나지막하고 깊은 목소리에 강서연은 일순 멈칫했다.
고개를 돌린 강서연은 깊고 그윽한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제야 사내의 전용 엘리베이터 문이 여태 닫히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마도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지만 강서연은 태연하게 그 엘리베이터에 올라탈 용기가 없었다.
강서연은 멋쩍은 듯 가볍게 기침을 했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전 다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겠습니다. 어쨌든… 아!”
돌연 크고 단단한 손이 강서연의 팔을 힘껏 움켜쥐고 그대로 끌어당겼다.
비틀거리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강서연은 무게 중심이 앞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반사적으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팔을 들었지만 예상했던 통증은 찾아오지 않았고 대신 서늘하고 단단한 품에 안겼다.
고개를 번쩍 들어 올린 강서연의 눈앞에 부시안의 잘생긴 얼굴이 확대되어 나타났다. 강서연은 순간 숨이 턱하고 막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은 부시안의 가슴에 떡하니 얹혀 있었다.
부시안은 미간을 찌푸린 채 서슬 퍼런 음성을 내뱉었다.
“꺼져.”
“네… 대표님.”
황급히 손을 내린 강서연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재빨리 아래층 버튼을 눌렀다. 그러고는 자발적으로 모퉁이에 몸을 웅크리고 선 채 엘리베이터가 어서 빨리 도착하기를 기도했다.
가뜩이나 사면이 꽉 막힌 엘리베이터에 단둘이 있으려니 아주 죽을 맛이었다.
강서연은 깊이 숨을 들이켜며 숨소리를 최대한 낮추려 노력하며 유명무실한 신혼부부가 회사에서 만났는데 남편이 상사인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에 대한 대답을 속으로 고민했다.
당연히 공기처럼 무시해야지!
위로 올라가는 층수에 시선을 고정한 채 강서연은 부시안을 쳐다보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하지만 그녀의 바로 앞에 있는 엘리베이터 벽으로 사람의 그림자가 반사되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부시안은 그녀의 등 뒤에서 엘리베이터 벽을 통해 그녀의 미세한 표정 번화까지 전부 눈에 담았다.
“서연 씨, 회사에 출근하면 업무에 대한 생각만 해. 열심히 일해야 월급도 더 빨리 오를 거 아냐.”
“네?”
강서연이 의아한 얼굴로 되묻자 부시안이 그녀에게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꿈에서까지 돈을 벌 생각만 하는 걸 보면 서연 씨 돈이 정말 많이 궁한가 봐.”
일순 당황한 강서연이 무어라 반박하려던 참이었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곧 지각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강서연은 빠르게 단념하고 서둘러 엘리베이터를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