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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나랑 결혼해

  • 강서연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 아무래도 방금 다른 사람의 맞선 현장을 구경한 사람은 그녀뿐이 아닌 것 같았다.
  • 한참을 머뭇거리던 강서연은 결국 뻣뻣하게 경직된 고개를 끄덕였다. 상사의 맞선 현장을 멋대로 구경했던 자신의 무례한 행동에 대해 깊은 자아성찰을 하고 있는 사이, 얼음장같이 차가운 목소리가 귓전을 파고들었다.
  • “강서연, 나랑 결혼하는 건 어떻게 생각해?”
  • 그 말에 강서연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 “대표님, 방금 뭐, 뭐라고 하셨어요?”
  • 강서연은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 “나랑 결혼해.”
  • 성가시다는 듯 부시안의 미간에 금이 생겼다.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로 잘생긴 얼굴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절대 농담하는 것 같지 않았다.
  • 강서연은 간신히 멀어져 가는 의식의 끈을 잡아당기고서 입술을 달싹였다.
  • “왜 하필 저예요?”
  • 방금 전 맞선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부시안의 조건으로는 손가락만 까닥거려도 들러붙을 여자들이 줄을 설 텐데, 왜 하필 그녀에게 이렇게 허황된 제안을 하는 것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 설마 부시안이 그녀를 오랫동안 짝사랑한 건 아니겠지? 어쩌면 이 선 자리도 그녀를 우연히 만나기 위한 핑계였을지도 몰랐다.
  • 역시 가장 위험한 포식사는 사냥감 인척 위장한다더니.
  • 하지만 현실은 강서연의 과대망상에 지나지 않았다.
  • 은근한 기대감을 담은 강서연의 질문에 부시안은 창밖으로 눈길을 돌리더니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 “할아버지가 많이 편찮으신데 남은 시간이 많아봤자 6개월밖에 안 된다고 하셨어. 할아버지 평생소원이 내가 가정을 꾸리는 모습을 보는 거야. 그래서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여자가 있고 결혼 준비 중이라고 속였어.”
  • 부시안의 얘기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강서연은 그래도 풀리지 않은 의혹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서 왜 하필 그녀인 건데?
  • 혼란스러워하는 강서연의 모습을 심드렁하게 응시하던 부시안은 탁자 위에 놓인 찻잔을 집어 들고서 한 모금 들이켰다.
  • “넌 BC 그룹 직원이니 할아버지 눈을 속이기도 쉬울 거야.”
  • 강서연은 그제야 부시안의 뜻을 이해했다.
  • 부시안은 할아버지의 소원을 이뤄주기 위해 그녀와 가짜로 연애하고 가짜로 결혼하려는 것이었다.
  • 부시안은 분명 모든 면에서 나무랄 데 없는 사내였지만 그녀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괜히 불필요한 구설수에 오르는 것을 원치 않았다. 강서연이 그녀의 일자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선에서 완곡하게 거절할 만한 핑계를 찾아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찰나, 부시안의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나와 결혼하면 네 아버지의 병원비를 전액 부담해 줄게.”
  • 솔깃한 제안에 강서연은 손바닥을 꽉 움켜쥐었다.
  • 3년 전, 강서연의 부친은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상태였고 지난 몇 년 동안의 병원비는 모두 강서연이 아껴 쓰고 모은 돈으로 충당했다.
  • 그런데 부시안이 대체 어떻게 이 일을 알고 있는 것이지? 하지만 강서연은 그런 것들에 고민할 겨를이 없었다. 맞은편에 앉은 사내가 제시한 조건이 너무 유혹적이었다.
  • “아버지에게 최고의 의료진을 붙여줄 수도 있어.”
  • 강서연은 속절없이 마음이 흔들렸다.
  • 아까까지만 해도 망설이던 기색이 역력하던 표정이 결연해졌다. 생각해 보면 고작 재벌 가문에 시집가는 것 정도는 큰일도 아니지 않는가.
  • “좋아요, 그 제안 받아들일게요.”
  • 강서연의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몸을 일으킨 부시안은 지체 없이 재킷을 집어 들었다.
  • “돌아가서 가족관계증명서를 가져와. 지금 바로 혼인신고하러 갈 거야.”
  • “지금요?”
  • 화들짝 놀란 강서연은 서늘하게 날아와 꽂히는 부시안의 시선에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 “좋아요.”
  • 부시안의 차를 타고서 도시 외곽에 위치해 있는 오래된 집에 도착한 강서연은 집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 몰래 가족관계증명서를 챙기고서 재빨리 집을 나섰다.
  • 모든 과정이 눈 깜짝할 사이에 급박하게 돌아갔다.
  • 강서연은 멍한 얼굴로 손에 든 혼인 신고서를 바라보며 구청을 나왔다. 혼인 신고서를 향했던 시선이 이내 옆에 선 훤칠한 사내에게 닿았다.
  • 정말 결혼했다. 그것도 상사와!
  •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에 미처 정신을 차리지 못한 강서연은 오랫동안 구청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머릿속에는 온통 혼인신고할 때 지불한 1600원을 보내달라는 말을 해야 할지 말지에 대한 고민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