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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본보기

  • 강서연이 부서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장근철은 웬일로 이른 아침부터 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에 나타나지 않는 강서연의 이름을 부르며 욕설을 퍼붓는 소리가 벽 두 개를 사이에 두고도 선명히 귓가를 파고들었다.
  • “우리 부서 직원들 정말 점점 더 게을러지고 있어. 특히 강서연! 시간이 언젠데 아직도 나타나지 않는 거야!”
  • 강서연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아예 자신의 위치로 돌아갔다. 어차피 개근 수당도 날아간 마당에 지금 회의실에 들어간다고 해도 장근철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한참을 물고 늘어질 텐데,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닐 바에야 차라리 마음 편한 쪽을 선택하는 게 나았다.
  •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 앉은 강서연은 컴퓨터 전원을 켜고서 채 완성하지 못한 설계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 “서연 씨, 오늘 회의에 지각했죠? 본부장님이 단단히 벼르고 있던데 각오하셔야 할 거예요!”
  • 동료 한 명이 애석하다는 듯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르렸다. 그제야 컴퓨터 화면에서 시선을 뗀 강서연은 회의가 끝났음을 깨닫고서 싱긋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 “늦잠 잤어요. 참, 회의에서 무슨 얘기 나왔어요? 설마 아직도 포장 디자인에 관한 얘기는 아니죠?”
  • 3 일 전 장근철이 직원들에게 협력 업체인 식품 회사의 포장 디자인 작업을 맡겼지만 아직까지 만족스러운 도면이 나오지 않아 회의에서 여러 번 잔소리를 했던 적이 있었다.
  • “그 설마가 사람 잡는 법이죠. 포장 디자인 건으로 오늘도 여럿 털렸어요. 물론 회의에 늦은 서연 씨도 포함이고요. 당분간 몸 사리는 게 좋겠어요.”
  • 그렇게 말하며 복잡 미묘한 눈으로 강서연을 바라보던 동료는 이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업무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 강서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 재빨리 완성된 설계 도면을 챙기고서 본부장실로 향했다.
  • 똑똑!
  • “들어와!”
  • 문을 밀고서 안으로 들어간 강서연은 테이블 앞으로 다가가 설계 도면을 장근철에게 내밀었다.
  • “본부장님, 설계도 완성되었습니다. 한 번 봐주세요.”
  • 장근철은 그녀의 설계도에 일말의 시선도 주지 않고서 바로 옆으로 치워두더니 노골적으로 강서연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웬일로 화를 내지 않고 평온한 그 모습이 오히려 더욱 소름 끼쳤다.
  • 잠시 머뭇거리던 강서연은 이내 입을 열었다.
  • “본부장님, 제가 오늘 늦잠을 자는 바람에 회의에 늦었어요. 화내지 마세요.”
  • 기개가 있는 사람은 굽혀야 할 때 굽힐 줄 알아야 하는 법이었다.
  • 장근철과는 사이가 나빠져도 상관없지만 돈과는 절대 사이가 나빠져서는 안 된다. 더군다나 이미 대담한 행동을 한 번 벌인 뒤였지 않은가.
  • 장근철이 흥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 “네 잘못을 알고 있다면 지금 당장 식품 회사와 협력한 포장 디자인을 완성해가지고 와.”
  • “…”
  • 역시 이대로 끝은 아니구나.
  •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강서연은 애써 미소 지으며 말했다.
  • “네, 감독님,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 “흥, 가!”
  • 예상외로 장근철은 순순히 그녀를 보내주었다. 하지만 강서연은 사무실을 떠나는 순간까지 그녀의 몸에 진득하게 달라붙던 적나라한 시선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 산 채로 삼켜먹으려는 듯 흉흉한 시선에 강서연은 석연치 않은 기분을 느꼈다.
  • 무심코 고개를 돌리자 장근철은 고개를 숙인 채 서류를 훑어보고 있었다. 강서연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어쩌면 그녀가 너무 예민한 탓일 수도 있었다.
  • “쯧쯧, 누구는 참 뻔뻔해. 나 같으면 진작 회사 그만뒀어. 여우 같은 계집애.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있는 걸 봐!”
  • “그러게 말이야. 유부녀이면서 감히 부 대표님도 꼬시고. 예쁘면 다 되는 줄 알아?”
  • 자리로 돌아온 강서연의 귓가에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젠 아주 대놓고 험담을 했다.
  • 강서연은 서늘한 눈으로 그녀의 험담을 늘어놓는 동료들을 일별했다. 그러자 참다못한 진여울이 불쑥 입을 열었다.
  • “왜? 그래서 배 아파? 그럼 너희들도 예뻐지던가. 여기서 백 날 천 날 얘기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어.”
  • 그러자 여직원이 콧방귀를 뀌었다.
  • “얼굴만 믿고 너무 나대는 거 아니야?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 진여울이 무어라 반박하려 하자 강서연이 얼른 진여울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 “됐어. 개가 문다고 너도 같이 물 거야?”
  • “뭐가 어쩌고 어째?”
  • 모여 섰던 여자 동료들 중 한 명이 버럭 화를 내더니 강서연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 “하루 종일 남자를 꼬시고도 당당하다니. 이 여우 같은 년!”
  • 짝!
  • 맑고 우렁찬 따귀 소리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 모두 어안이 벙벙해졌다.
  • 그들뿐만 아니라 맞은 여자 동료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가린 채 소리를 질렀다.
  • “네가 뭔데 나를 때려!”
  • 그러자 강서연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 “맞아도 싸니까 때리는 거지. 입 조심해. 다음번엔 뺨으로 끝나지 않을 거니까.”
  • 그렇게 말하며 강서연은 주변에 둘러선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 방금 전 그 여인의 뺨을 때린 것은 등 뒤에서 그녀의 험담을 하는 사람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