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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천자 1번룸

  • 유건희는 더욱 크게 웃었다.
  • “도강우 씨, 설마 몇 십억 되는 빚 때문에 정신이 나간 거 아니죠? 여기 2억이 들어 있다고요? 폐지가 수 백장 들어있는 게 아니고요?”
  • 유나연의 마음속에 무력감이 차올랐다. 이 지경이 돼서도 모른 척하고 계속 체면만 차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 내가 아는 도강우가 맞는 걸까?
  • 유나연은 도강우를 힐끗 보고 진호 등 일행에게 말했다.
  • “시간 됐으니 들어가자.”
  • 진호는 바닥에 놓인 주머니를 툭 찼다.
  • “건희야, 저 주머니 챙겨. 안에 뭐가 들었든 도강우가 빚을 갚은 걸로 쳐야지.”
  • 유나연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진호를 쳐다보았다.
  • 그녀의 행동은 진호를 흥분하게 했다.
  • “먼저 들어가요, 난 도강우 씨랑 얘기 좀 하고 갈게요.”
  • 홍이현이 말했다.
  • 도강우는 유나연이 떠나는 걸 보면서도 눈빛이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 “할 얘기 있으면 빨리 해.”
  • 홍이현 얼굴에 경멸의 빛이 더해졌다.
  • “도강우 씨, 나연 언니 포기하고 내일 차라리 이혼까지 해요.”
  • 도강우가 무표정하게 물었다.
  • “왜?”
  • “당신은 나연 언니에게 어울리지 않으니까요.”
  • 홍이현은 하찮다는 듯 입을 삐죽거렸다.
  • “지금도 봐요, 오늘 류현경이 여기서 콘서트를 한다는데 당신은 들어갈 자격도 없잖아요. 그런데 진호 씨는 들어갈 자격 뿐만 아니라 티켓도 네 장이나 구했어요. 나연 언니가 진호 씨와 결혼하면 언니가 원하는 생활을 누릴 수 있지만 당신과 함께 있으면 얻을 수 있는 게 뭐가 있어요? 수십억이 되는 빚?”
  • 도강우는 차갑게 웃었다.
  • “제일 중요한 건 너도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는 거겠지?”
  • 홍이현은 머리를 쓸어올렸다.
  •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진호 씨는 나연 언니한테도 잘 하고 건희한테도 잘해주고 나한테도 잘해줘요. 집이나 차 모든 게 다 있어요. 형부로서 당신은 너무 쓸모 없어요. 오늘은 여기까지 할 테니 알아서 해요.”
  • 말을 마친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유나연 일행을 쫓아갔다.
  • 막 입구로 달려간 그녀는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져서 걸음을 멈췄다.
  • 커스텀 에디션 롤스로이스 한 대가 오페라 하우스 입구에 멈춰 서더니 정장 차림의 노인 한 분이 지팡이를 짚고 차에서 내렸기 때문이다. 나이가 70세 정도 되어 보이는 노인은 소리 없는 카리스마가 느껴졌고 얼굴에는 오랫동안 높은 지위에 있었을 것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 몸값이 20조 이상인 가평 최고 갑부 이춘추였다!
  • 그 뒤를 따른 90억을 호가하는 빨간색 애스턴마틴에서 빨간 드레스를 입은 임다현이 내렸다.
  • 홍이현은 매스컴에서만 보던 두 사람을 오늘 직접 보게 될 줄 몰랐다!
  • 그는 흥분하며 부러움 가득한 눈길로 임다현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가평의 상업 여왕이자 홍이현의 우상이었다!
  • “이 대표님, 잠시만요.”
  • 임다현이 갑자기 이춘추를 불러세웠다.
  • 이춘추가 고개를 돌렸다.
  • “임 대표였네. 무슨 일이야?”
  • “전에 얘기했던 남산 디지털단지 프로젝트 생각해 봤어요?”
  • 임다현이 물었다.
  • “남산 디지털단지는 부지 면적이 1600억 평에 시가가 5조 이상이어서 우리 도련님께서 직접 임 대표와 얘기를 나눠야 해.”
  • 이춘추가 말하자 임다현은 잠시 멈칫하다가 말했다.
  • “알았어요, 그러면 연락처 주세요.”
  • 옆에서 그 말을 들은 홍이현은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
  • 세상에, 가평 최고 갑부 이춘추 위에 또 다른 도련님이 있다니 그 사람은 얼마나 돈이 많은 걸까? 게다가 가평 오페라 하우스가 바로 이춘추 것이었으니 이 또한 그의 도련님 것이었다.
  • “우리 도련님은 올해 겨우 스물일곱이니 임 대표가 얘기 많이 나눠.”
  • 이춘추는 얄궂은 눈빛으로 임다현을 바라보며 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어 임다현에게 건넸다.
  • 임다현은 명함을 받고 소중하게 가방에 넣었다.
  • “돈도 많은데 이렇게 어리다니, 내가 그에게 시집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 속으로 중얼거리던 홍이현은 비록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시력이 좋았던 탓에 명함에 적힌 번호를 똑똑히 보았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단단히 외운 뒤 오페라 하우스로 들어갔다.
  • 임다현과 이춘추 모두 먼 곳에 서 있는 도강우를 발견하지 못했다.
  • 도강우가 여전히 들어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한참을 생각하던 그는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 막 오페라 하우스 입구로 걸어간 그를 누군가 막아섰다.
  • 두 명의 여자 의전도우미가 있었는데 한 명은 도강우도 아는 사람이었다. 바로 그의 고등학교 동창인 조이서였다.
  • “야, 도강우.”
  •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도강우를 바라보았다. 도강우는 전에 그녀와 스캔들이 난 적도 있었다.
  • “티켓 제시해.”
  • 조이서는 이내 평온하고 담담하게 말하며 도강우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 늘씬한 그녀의 허벅지까지 찢어진 검은색 드레스는 그녀의 몸매를 가감없이 드러냈다. 가평 예술대학교를 졸업한 뒤 그녀는 점차 연기자의 길로 들어설 준비를 했다.
  • 오늘 류현경이 온다는 소식에 재벌 2세 남자친구에게 오랫동안 부탁해서야 겨우 의전도우미를 맡게 된 그녀는 눈길을 끌어 데뷔할 수 있을지 보려는 것이었다. 오늘 밤 이곳에 오는 사람은 부와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었고 게다가 적지 않은 영화회사 거물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 눈치 빠른 그녀는 단 번에 도강우가 입은 옷 가격을 짐작했다.
  • 로고가 없고 디자인이 심플한 걸 보니 절대 5만 원을 넘지 않았다.
  • 보아하니 아직도 잘 나가지 못하는 것 같네.
  • “없어.”
  • 도강우가 덤덤하게 말했다.
  • 조이서는 경멸에 찬 눈빛을 전혀 숨기지 않고 말했다.
  • “그럼 미안해, 들어갈 수 없어.”
  • 도강우는 지금 기분이 아주 좋지 않았다.
  • “꺼져.”
  • 조이서의 표정이 순간 차가워졌다.
  • “도강우, 태도 주의해. 오늘 여기 온 분들은 다 부와 권력을 가진 분들인데 네가 무슨 자격으로 들어갈 수 있어? 누가 너에게 이런 용기를 준 거야?”
  • 그녀를 차갑게 바라보는 도강우의 눈빛에 조롱이 가득 찼다.
  • 몇 년을 잠자코 있었더니 개나 소나 다 머리 위로 기어오르려고 하네?
  • “저기 손님, 여기서 소란 피우지 마요. 이서의 남자친구는 아주 능력있는 사람이에요. 지금이 당신 인생에서 조이서와 가장 가깝게 있는 순간일 거예요. 앞으로 그녀를 보려면 스크린에서 봐야 한다고요.”
  • 다른 여자 의전도우미가 웃으며 말했다.
  • 도강우가 말을 하기도 전에 짧은 머리의 젊은 여자가 빠르게 걸어왔다.
  • 그녀가 나타나자 두 의전도우미는 더 이상 함부로 얘기하지 못했다.
  • 류현경의 매니저인 그녀는 업계의 탑 매니저로서 능력이 아주 뛰어났다.
  • 조이서와 옆에 있는 여자를 차갑게 훑어보는 매니저의 눈길에 두 사람은 온몸이 사시나무 떨 듯 떨렸다.
  • 무슨 상황이지?
  • 설마 도강우가 실력이 엄청난 사람인가?
  •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래 보이지는 않는데.
  • “왔어요?”
  • 이어 매니저가 웃으며 도강우에게 인사를 했다.
  • “공연이 곧 시작되니 얼른 가서 질서 유지해야죠.”
  • 조이서는 바로 안도의 숨을 내쉬고 멀어지는 도강우의 뒷모습을 보며 비아냥거렸다.
  • “뭐야, 겨우 질서 유지하는 경비원이네…”
  • 내부로 들어간 뒤 매니저가 정식으로 인사를 하려는데 도강우가 말렸다.
  • “됐고 내 룸은 어디야?”
  • “천자 룸입니다!”
  • 매니저는 도강우를 데리고 전용 통로를 지나 바로 천자 룸으로 들어갔다.
  • 가평 오페라 하우스에는 모두 30여 개의 룸이 있었는데 룸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다들 전체 가평시에서 명예와 위신이 있고 함부로 떵떵거릴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 하지만 천자 1번룸은 인테리어를 마친 뒤로 단 한 번도 사용된 적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