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강우 씨, 설마 몇 십억 되는 빚 때문에 정신이 나간 거 아니죠? 여기 2억이 들어 있다고요? 폐지가 수 백장 들어있는 게 아니고요?”
유나연의 마음속에 무력감이 차올랐다. 이 지경이 돼서도 모른 척하고 계속 체면만 차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가 아는 도강우가 맞는 걸까?
유나연은 도강우를 힐끗 보고 진호 등 일행에게 말했다.
“시간 됐으니 들어가자.”
진호는 바닥에 놓인 주머니를 툭 찼다.
“건희야, 저 주머니 챙겨. 안에 뭐가 들었든 도강우가 빚을 갚은 걸로 쳐야지.”
유나연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진호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행동은 진호를 흥분하게 했다.
“먼저 들어가요, 난 도강우 씨랑 얘기 좀 하고 갈게요.”
홍이현이 말했다.
도강우는 유나연이 떠나는 걸 보면서도 눈빛이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할 얘기 있으면 빨리 해.”
홍이현 얼굴에 경멸의 빛이 더해졌다.
“도강우 씨, 나연 언니 포기하고 내일 차라리 이혼까지 해요.”
도강우가 무표정하게 물었다.
“왜?”
“당신은 나연 언니에게 어울리지 않으니까요.”
홍이현은 하찮다는 듯 입을 삐죽거렸다.
“지금도 봐요, 오늘 류현경이 여기서 콘서트를 한다는데 당신은 들어갈 자격도 없잖아요. 그런데 진호 씨는 들어갈 자격 뿐만 아니라 티켓도 네 장이나 구했어요. 나연 언니가 진호 씨와 결혼하면 언니가 원하는 생활을 누릴 수 있지만 당신과 함께 있으면 얻을 수 있는 게 뭐가 있어요? 수십억이 되는 빚?”
도강우는 차갑게 웃었다.
“제일 중요한 건 너도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는 거겠지?”
홍이현은 머리를 쓸어올렸다.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진호 씨는 나연 언니한테도 잘 하고 건희한테도 잘해주고 나한테도 잘해줘요. 집이나 차 모든 게 다 있어요. 형부로서 당신은 너무 쓸모 없어요. 오늘은 여기까지 할 테니 알아서 해요.”
말을 마친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유나연 일행을 쫓아갔다.
막 입구로 달려간 그녀는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져서 걸음을 멈췄다.
커스텀 에디션 롤스로이스 한 대가 오페라 하우스 입구에 멈춰 서더니 정장 차림의 노인 한 분이 지팡이를 짚고 차에서 내렸기 때문이다. 나이가 70세 정도 되어 보이는 노인은 소리 없는 카리스마가 느껴졌고 얼굴에는 오랫동안 높은 지위에 있었을 것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몸값이 20조 이상인 가평 최고 갑부 이춘추였다!
그 뒤를 따른 90억을 호가하는 빨간색 애스턴마틴에서 빨간 드레스를 입은 임다현이 내렸다.
홍이현은 매스컴에서만 보던 두 사람을 오늘 직접 보게 될 줄 몰랐다!
그는 흥분하며 부러움 가득한 눈길로 임다현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가평의 상업 여왕이자 홍이현의 우상이었다!
“이 대표님, 잠시만요.”
임다현이 갑자기 이춘추를 불러세웠다.
이춘추가 고개를 돌렸다.
“임 대표였네. 무슨 일이야?”
“전에 얘기했던 남산 디지털단지 프로젝트 생각해 봤어요?”
임다현이 물었다.
“남산 디지털단지는 부지 면적이 1600억 평에 시가가 5조 이상이어서 우리 도련님께서 직접 임 대표와 얘기를 나눠야 해.”
이춘추가 말하자 임다현은 잠시 멈칫하다가 말했다.
“알았어요, 그러면 연락처 주세요.”
옆에서 그 말을 들은 홍이현은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
세상에, 가평 최고 갑부 이춘추 위에 또 다른 도련님이 있다니 그 사람은 얼마나 돈이 많은 걸까? 게다가 가평 오페라 하우스가 바로 이춘추 것이었으니 이 또한 그의 도련님 것이었다.
“우리 도련님은 올해 겨우 스물일곱이니 임 대표가 얘기 많이 나눠.”
이춘추는 얄궂은 눈빛으로 임다현을 바라보며 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어 임다현에게 건넸다.
임다현은 명함을 받고 소중하게 가방에 넣었다.
“돈도 많은데 이렇게 어리다니, 내가 그에게 시집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속으로 중얼거리던 홍이현은 비록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시력이 좋았던 탓에 명함에 적힌 번호를 똑똑히 보았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단단히 외운 뒤 오페라 하우스로 들어갔다.
임다현과 이춘추 모두 먼 곳에 서 있는 도강우를 발견하지 못했다.
도강우가 여전히 들어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생각하던 그는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막 오페라 하우스 입구로 걸어간 그를 누군가 막아섰다.
두 명의 여자 의전도우미가 있었는데 한 명은 도강우도 아는 사람이었다. 바로 그의 고등학교 동창인 조이서였다.
“야, 도강우.”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도강우를 바라보았다. 도강우는 전에 그녀와 스캔들이 난 적도 있었다.
“티켓 제시해.”
조이서는 이내 평온하고 담담하게 말하며 도강우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늘씬한 그녀의 허벅지까지 찢어진 검은색 드레스는 그녀의 몸매를 가감없이 드러냈다. 가평 예술대학교를 졸업한 뒤 그녀는 점차 연기자의 길로 들어설 준비를 했다.
오늘 류현경이 온다는 소식에 재벌 2세 남자친구에게 오랫동안 부탁해서야 겨우 의전도우미를 맡게 된 그녀는 눈길을 끌어 데뷔할 수 있을지 보려는 것이었다. 오늘 밤 이곳에 오는 사람은 부와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었고 게다가 적지 않은 영화회사 거물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눈치 빠른 그녀는 단 번에 도강우가 입은 옷 가격을 짐작했다.
로고가 없고 디자인이 심플한 걸 보니 절대 5만 원을 넘지 않았다.
보아하니 아직도 잘 나가지 못하는 것 같네.
“없어.”
도강우가 덤덤하게 말했다.
조이서는 경멸에 찬 눈빛을 전혀 숨기지 않고 말했다.
“그럼 미안해, 들어갈 수 없어.”
도강우는 지금 기분이 아주 좋지 않았다.
“꺼져.”
조이서의 표정이 순간 차가워졌다.
“도강우, 태도 주의해. 오늘 여기 온 분들은 다 부와 권력을 가진 분들인데 네가 무슨 자격으로 들어갈 수 있어? 누가 너에게 이런 용기를 준 거야?”
그녀를 차갑게 바라보는 도강우의 눈빛에 조롱이 가득 찼다.
몇 년을 잠자코 있었더니 개나 소나 다 머리 위로 기어오르려고 하네?
“저기 손님, 여기서 소란 피우지 마요. 이서의 남자친구는 아주 능력있는 사람이에요. 지금이 당신 인생에서 조이서와 가장 가깝게 있는 순간일 거예요. 앞으로 그녀를 보려면 스크린에서 봐야 한다고요.”
다른 여자 의전도우미가 웃으며 말했다.
도강우가 말을 하기도 전에 짧은 머리의 젊은 여자가 빠르게 걸어왔다.
그녀가 나타나자 두 의전도우미는 더 이상 함부로 얘기하지 못했다.
류현경의 매니저인 그녀는 업계의 탑 매니저로서 능력이 아주 뛰어났다.
조이서와 옆에 있는 여자를 차갑게 훑어보는 매니저의 눈길에 두 사람은 온몸이 사시나무 떨 듯 떨렸다.
무슨 상황이지?
설마 도강우가 실력이 엄청난 사람인가?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래 보이지는 않는데.
“왔어요?”
이어 매니저가 웃으며 도강우에게 인사를 했다.
“공연이 곧 시작되니 얼른 가서 질서 유지해야죠.”
조이서는 바로 안도의 숨을 내쉬고 멀어지는 도강우의 뒷모습을 보며 비아냥거렸다.
“뭐야, 겨우 질서 유지하는 경비원이네…”
내부로 들어간 뒤 매니저가 정식으로 인사를 하려는데 도강우가 말렸다.
“됐고 내 룸은 어디야?”
“천자 룸입니다!”
매니저는 도강우를 데리고 전용 통로를 지나 바로 천자 룸으로 들어갔다.
가평 오페라 하우스에는 모두 30여 개의 룸이 있었는데 룸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다들 전체 가평시에서 명예와 위신이 있고 함부로 떵떵거릴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