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야 나도 모르지! 그런데 그 여자 사생활 얼마나 난잡한지 다들 알잖아. 저번 달 우리 파탈펍 갔을 때도 만났었어.”
정교한 화장을 한 여자가 입을 놀렸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멀지 않은 사장님 사무실에서 막 나오는 허아영에게 고정되었다. 손에 들린 건 누구나 탐냈던 바로 그 프로젝트 진행서였다.
“일도 어떻게 이토록 순탄대로야? 정말 어떤 수단으로 땄는지 몰라.”
허아영이 자신의 테이블로 걸어가는데 옆에 서 있던 동기와 그녀가 부딪쳤다.
“어머, 괜찮아 아영아? 어디 다치지는 않았고?”
허아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장윤이었다.
“내 정신 좀 봐, 너 오는 것도 보지 못했지 뭐야. 아 참 너 임신했다며?”
장윤이 한껏 비꼬며 말했다.
“뭐야, 언제 결혼한 거야? 우리한테 말해주지도 않고. 네 테이블 위 진단서만 아니었으면 임신한 것도 모를뻔했잖아. 아까 부딪힌 데는 괜찮아? 행여나 나 때문에 뱃속에 아기가 잘못되면 어떡해. 아니면 지금이라도 내가 병원으로 데려가 줄까?”
허아영의 손에 들려있던 서류가 장윤이랑 부딪히며 땅에 떨어졌다. 그리고 분명히 서랍에 고이 넣어뒀던 진단서조차 땅에 떨어져 있었다.
진단서는 깃털처럼 하늘하늘 날아 땅에 떨어졌었는데 그 위로 그녀의 인적사항이 아주 큼지막하게 보였다.
‘이름: 허아영
진단결과: 임신 2개월’
이 두 가지 사실만으로도 사무실 사람들은 들끓었다!
허아영이 입을 꾹 다물고 허리를 숙여 자신의 물건을 주웠다. 머릿속에는 2개월 전 파탈펍에 동생을 데리러 갔을 때 만난 그 남자뿐이었다!
제기랄!
어떻게 임신이 된 거지? 그 여리여리한 남자가 나를 임신을 시켰다고? 입 밖에 내기도 우스워!
그리고 그건 두 사람에게 있어 모두 첫 경험이었다. 유감스럽게 그녀는 “당첨”이 되었다.
“아영아, 남편은 누구야? 언제 한번 데리고 와봐.”
장윤은 계속 옆에서 알짱거렸다.
“아니, 너와 나 벌써 몇 년째 동기냐. 너한테 남자친구 있다는 것도 한 번도 못 들었어. 그런데 지금 임신이라니. 나는 네 남편 본적도 없잖아. 뭐하시는 분이셔? 나이는? T시에 집은 있어? 차는? 가족배경은 어때? 아니, 내가 하는 말 너무 기분 나쁘게 듣지 말고, 넌 절대로 너 같은 사람 만나면 안 돼. 네 팔자가 너무 꼬였잖아. 여자는 그래도 자신에게 잘해주는 사람 만나야 하는 거야. 네 조건에 혼전임신이 아니라면 어디 변변찮은 남자도 찾을 수 없었을걸? 그래서 먼저 임신부터 한 거구나.”
사무실 내 나지막한 비웃음 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왔다.
허아영은 물건을 줍고 몸을 일으키려는데 순간적으로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똑바로 섰다. 작은 얼굴에 오목조목한 이목구비를 가진 그녀는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프로젝트 진행서와 진단서 모두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나는 몰랐지, 언니가 나한테 이렇게 관심이 많은 줄은. 관심이 너무 많아서 교양은 다 밥 말아드시고 남 서랍도 허락 없이 뒤졌겠지.”
장윤이 입을 꾹 다물고 눈을 치켜떴다.
허아영은 허- 하고 비웃음을 치며 흘러나온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나도 오늘에야 언니가 찾는 남편 조건을 알았네. 어쩐지….”
장윤은 무의식적으로 말꼬리를 잡았다.
“어쩐지 뭐?”
“어쩐지 나이 서른다섯이 되도록 시집도 못 갔지.”
이 말 한마디에 장윤은 뛰쳐나가 그녀의 목을 조르고 싶어졌다. 하지만 허아영의 말은 채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의자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아이고, 언니 말대로 내 팔자 정말 말도 안 되는 것 같아. 나도 뭐 노린 건 아닌데, 아기 아빠 말이야. 뭐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아니고, 마침 언니가 바랐던 모든 걸 갖췄네. T 시에 집도 있고, 차도 있고 ‘로열 캐슬’에도 자주 들락날락할 수 있거든.”
허아영은 아주 화사하게 웃었다. 고개를 돌려 장윤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그 누구도 그녀의 말에 토 달 수 없을 정도로.
특별히 그 ‘로열 캐슬’이라는 말에는 더더욱.
‘로열 캐슬’. 그건 돈만 많다고 모두 갈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허아영은 도대체 누굴 만나는 거야?
배도형이 배 씨 가문 구역에 발도 들이기 전부터 문 어구에서는 어느 여인의 도도하고 허세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열 캐슬’?
도대체 어떤 사람이면 눈이 이토록 낮아 저런 여자를 맘에 품은 거지?
배진화는 방금 사무실에서 나와 밖에 어떤 소란이 있었는지 아예 몰랐다. 다만 그는 몇 분 전부터 문 어구라던 아들이 아직도 도착하지 않아 나와봤던 것이었다.
배진화가 나오자, 허아영이 그를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또 큰 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사장님, 나 임신했어요. 제가 결혼하고 나면 사장님 모시고 ‘로열 캐슬’ 한번 갈게요.”
목소리는 간드러졌고 얼굴은 정교하게 예뻤다.
장윤은 꽃처럼 빛나는 그녀의 옆에서 질투심으로 가득 찼다!
“허아영, 네 남자 꼭 네 말대로 그런 사람이어야 할 거야. 아니면 쪽팔리는 건 네 쪽이 될 테니까.”
“언니, 이건 또 무슨 섭섭한 말이야? 그 말뜻은 내가 속이기라도 했단 말이야? 아니면 내가 그런 남자한테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야?”
문을 등진 그녀는 방금 문을 열고 들어서는 사람이 배도형인지 꿈에도 몰랐다.
“나 허아영이 어떤 사람에게 시집가든, 어떤 사람이랑 아이를 낳든, 그건 모두 내 일이야. 더구나 언니는 모르나 본데 내 고향에서는 임신하고 3개월 안에는 밝히지 않는다는 말이 있어. 더 심각하게 말한다면 언니가 내 임신 사실을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녔는데 그 3개월안에 나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언니 어떻게 책임질래?”
이 말을 끝으로 장윤의 얼굴은 더 구겨졌다.
“허아영! 너 모든 책임 나한테 돌리지 마. 네 사생활이 난잡해서 혼전 임신한 주제에! 우리가 모를 거란 생각은 하지 마! 저번 달 파탈펍에서 술이 떡이 된 남자와 호텔 간 거 나 다 봤어!”
‘우르르 쾅쾅’. 번개가 사무실 정중앙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사무실은 물 뿌린 듯 조용해졌다.
배진화의 얼굴빛도 어두워졌다. 다만 배도형만이 호기심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저번 달?
‘파탈펍’?
그…도 갔었다.
“너희 그만 하는 게 좋을 거다. 일거리가 부족해?”
배진화가 큰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는 눈에 띄게 허아영을 감쌌다. 그는 그녀의 됨됨이를 잘 알고 있었다.
장윤은 입을 오므렸다. 그녀는 허아영한테는 시비를 걸어도 상관 없었지만, 자신의 사장한테 태클을 걸 용기는 전혀 없었기에 몸을 돌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허아영은 이를 보고 차갑게 웃었다. 그리고 배진화가 사무실로 들어가는 것을 쭉 지켜본 그녀는 몸을 돌려 장윤을 찾아가려 했다. 그런데 그 누가 알았겠는가? 그녀가 뒤를 돌자마자 보이는 건 배진화 사무실 문 앞에 떡하니 서있는 배도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