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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기억하게 해줄게

  • 배도형의 다갈색 눈동자가 매섭게 가늘어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허아영이 그의 눈에 이상함이 스쳐 지나가는 걸 보았으나 너무 빨라 그녀가 잡을 수 없었다.
  • “기억하게 해줄게.”
  • 순간 배도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곧 허아영이 어떤 반응을 하기도 전에 그녀의 가는 허리가 그대로 누군가에게 안겼다. 눈앞이 어두워지더니 익숙하면서도 낯선 느낌이 그녀를 덮쳐와 그녀가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 두 입술이 닿고 분위기도 야릇해졌다.
  • 허아영은 정장 속에 감춰진 그의 몸이 팽팽해지는 걸 느꼈고 그녀의 몸도 더 이상 제 것이 아닌 듯 풀려가고 있음을 느꼈다.
  • 그녀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걸 완전히 잊어버린 채 대뇌가 일시 정지됐다. 다행인건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그의 단단한 팔로 인해 그녀가 힘이 풀려 바닥으로 주저앉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의 코끝에서 맑고 시원한 향이 감돌았고 그의 입술의 따뜻한 느낌은 순간 그녀를 빠져들게 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게 했다.
  • 오랫동안 두 사람 모두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허아영은 처음부터 눈을 부릅뜨고 눈앞의 남자를 보고 있었다. 옆 사람들이 보기엔 그들은 그저 몇 초간 입을 맞춘 것 뿐이지만 그들의 마음속엔 한 세기는 지난 것 같았다. 배도형은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감은 손에 힘을 더 줬을 뿐 다른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그녀의 입술에 붙이고 갈색 눈에 그녀를 담았다.
  • 흠! 흠! 흠!
  • 갑자기 들려오는 기침소리에 두 사람이 정신을 차렸다. 허아영도 그제야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고개를 돌리다가 갑자기 나타난 배진화를 본 그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 “아빠.”
  • 배도형도 약간 어색한듯했으나 곧 안정을 되찾으며 말했다.
  • “아버님.”
  • 허아영도 배도형을 따라 부르며 어색한듯 한걸음 뒤로 물러나며 원망 섞인 눈빛으로 배도형을 바라봤다. 그가 아니었다면 자신이 상사 앞에서 망신당할 일이 없었을 텐데.
  • 배도형은 오히려 그녀의 뒤로 물러서는 움직임과 함께 그녀의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그녀를 자신의 뒤에 숨기며 그녀를 감쌌다.
  • “응, 그냥 잠깐 들른 거야.”
  • 배진화가 얼굴색을 바꾸고 예리한 눈으로 두 아이들을 바라보며 한마디 했다.
  • “이따 저녁에 잊지 말고 아영이를 저택으로 데려와, 촬영 끝나고 밥 먹고 바로 와야 해 알았어?”
  • “네, 알겠어요 아빠.”
  • 배도형이 알겠다고 했다.
  • 배진화가 떠난 후 잔뜩 골이 난 허아영은 좀처럼 배도형과의 촬영에 협조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까의 키스로 인해 누군가가 까부는걸 보고 싶지 않았다.
  • “사모님, 도련님과 좀 맞춰주셔야죠, 이러시면 촬영할 수가 없잖아요.”
  • 카메라맨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눈앞의 두 사람은 외적으로 보면 천생연분이 따로 없었으나 두 사람의 호흡은 엉망이었다.
  • 배도형은 허아영에게 화가 나려고 했다. 그는 워낙 아직 젊은 데다가 인내심이 좋은 편도 아니었다. 다만 배 씨 가문에서 자란 그의 교양이 그를 그럴 수 없게 했다. 머뭇거리던 배도형이 허아영을 보며 웃었다. 순간 허아영도 뭔가를 감지한 듯 뒤돌아 그에게 물었다.
  • “왜 웃어?”
  • “내가 방금 했던 말 기억 안 나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