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아영은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녀와 아이가 왔기 때문에 정신이 좀 좋아진 것처럼 보이는 눈앞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비록 마음은 씁쓸해도 입가에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띠었다.
“아이는 아무 문제 없이 건강하대요.”
“그래, 그래. 그럼 됐어.”
성설은 만족한 듯 허아영의 손을 툭툭 치고 배도형을 보며 말했다.
“도형아, 너도 곧 장가갈 사람이야. 이제부터는 네 마누라한테 잘해줘야 돼. 애가 임신도 하고 있는데 관심을 좀 줘. 하루 종일 일에만 매달리지 말고.”
배도형은 대답하지 않았다.
성설은 직접 결정했다.
“그럼 너희들이 상의해서 배가 아직 나오지 않은 틈을 타 결혼식을 빨리 올려. 그렇지 않으면 그때 가서 아영이가 부끄러워하면 어떡해? 우리는 괜찮아도 여자애는 챙겨줘야지.”
성설의 말에 허아영의 마음이 가볍게 떨렸고 눈빛도 부드러워졌다.
병약한 성설은 문득 희망을 본 듯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당부했다.
“빨리 아영이가 하던 일들 다른 사람한테 맡기던지 해봐. 임신하는 건 아주 힘든 일인데다 결혼 준비까지 해야 하니 더 쉬어야 돼.”
“알겠으니까 걱정 마. 당신 몸이나 챙기고 손주 보기를 기다려.”
배진화가 웃으며 대답했다.
허아영은 여전히 이 아이를 가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성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으니 도저히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성설은 또 웃으며 허아영을 바라보았다.
“내가 몸이 좋지 않아서 네가 아니면 도형이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날까지 기다릴 수 있는지 모르겠다. 지금 네가 이 좋은 소식을 들고 이 자리에 나타난 게 내 생애 가장 따뜻하고 밝은 햇살 같은 일이야.”
말하면서 성설은 진심으로 기쁘게 웃었다. 한 노인이 마지막 소원을 이룬 것처럼 만족해했다.
다만 이 만족은 허아영의 말도 억눌러버렸다.
그녀가 지금 말한다면 한 사람의 희망을 깨뜨리는 거고 어쩌면 그녀의 가슴 아픈 일을 또 건드릴지도 모른다. 그녀는 자신이 비록 선량한 사람은 아니지만 잔인한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이제 와서 아이를 갖지 않겠다고 말한다면 성설과 배진화한테 너무 잔인하다.
….
허아영은 병실을 나와 복도 의자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 해?”
“철부지랑은 상관없어.”
목소리에 부드러움이 든 무의식적인 한마디였다. 그녀는 단지 조용히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려고 할 뿐이다.
하지만 배도형은 불만이 많았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지!”
이 여자가 정말, 좀 정상적이게 날 보면 안 되나?
허아영은 화를 내지 않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훤칠한 키에 잘난 얼굴, 그리고 꽤 좋아 보이는 몸매. 다 좋은 데 왜 하필이면 네 살이나 어릴까.
“우리….”
배도형이 그녀의 눈빛을 반박하기 전에 허아영이 먼저 진지하게 물었다.
“우리 진짜 결혼하는 거야?”
“방금 거절하지 않았잖아. 그럼 동의했다는 거 아니야?”
배도형은 보기엔 말랐지만 옷을 벗으면 육감적인 그녀의 몸을 보며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아무리 봐도 나만 손해 보는 것 같은데.”
“그래, 그럼 하자.”
그녀는 옆에 남자를 보며 은근한 분통을 터뜨렸다.
“근데 대단하다? 그 작은 거로 날 임신시키다니.”
배도형은 순간 울화가 치밀었다.
이 여자는 정말 하찮은 원한이라도 반드시 갚는구나!
그냥 좀 대꾸했다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남자로서의 자부심을 의심하다니!
하지만….
그녀의 새빨간 입술을 보고 있던 배도형은 당장이라도 다가가서 단단히 막아놓고 싶었다. 마치 그날 밤 그가 그녀의 미칠 듯 매혹적인 신음소리를 막은 것처럼. 그건 오직 그가 들을 수 있는 소리다. 하지만 지금은 심호흡을 하며 진정할 수밖에 없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두 손을 꼭 잡고 주머니에 넣으며 사악한 생각을 억누르려고 안간힘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