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15화 여우

  • 배국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허아영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입을 모아 허아영을 대신해 구걸하려고 준비할 때 배국봉이 갑자기 큰소리로 웃어대기 시작했다.
  • “하하하, 맹랑한 계집애 같으니.”
  • 배국봉은 웃고 난 뒤 실눈을 뜨고 허아영을 바라보았다.
  • “너 참 겁이 없구나, 정녕 내가 배도형더러 결혼하지 말라고 말릴 것이 두렵지 않은게야?”
  • “할아버지, 그럼 할아버지께서도 손주를 안으실 기회가 없으세요.”
  • 허아영은 간이 대뜸 커졌다. 혹여나 배국봉의 말에 악의가 없었음을 알아서였는지 말에 장난기가 어려있었다.
  • “이야, 감히 날 협박해?”
  • 배국봉이 깜짝 놀라 두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 “할아버지, 이건 협박이 아니에요. 다만 이 아이가 제 배 속에 있잖아요. 설마 제 뱃속의 아이를 배도형 뱃속에 옮겨 넣으실 건 아니시죠?”
  • 허아영이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어르신의 말속에 숨은 뜻을 깨달으니 별로 무섭지도 않았다.
  • “옮긴다 해도 할아버지께서 그이가 낳을 수 있을 거라 보장하세요?”
  • “하하, 하하.”
  • 이렇게 되니 배국봉이 더 즐겁게 웃었다. 그와 반면에 배도형의 안색은 더 철저히 검게 변했다.
  • “재밌네, 재밌어. 우리 손자며느리 통과야.”
  • 배진화와 성설이 이 한마디를 듣고 바로 웃음을 터뜨렸다. 장난하나, 배 씨 가문은 이렇게 쉽게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배국봉의 인정을 받아야 배 씨 가문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입을 막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허아영이 배도형을 따라 본가에 함께 왔다는 말이 있을 수 있겠는가?
  • “진화야, 날도 늦었는데 오늘은 여기서 하룻밤 묵고 가렴.”
  • 배국봉은 배도형과 허아영을 여태껏 지켜보며 자연스럽게 그들의 입을 막았다.
  • “임산부가 더더욱 사처를 헤매서는 안되지.”
  • 배진화와 성설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배도형과 허아영은 달랐다. 특히는 어르신이 방 한 칸을 준비하라는 어르신의 말이 생생하게 들렸다. 그들 둘은 아직 그렇고 그럴 사이가 되질 못했는데 말이다.
  • “할아버지, 제가 허아영을 바래다줄 수 있어요, 걱정 마세요.”
  • 배도형이 곧장 나서서 거절했다.
  • “철없는 놈아!”
  • 배국봉은 지팡이를 들어 그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다른 사람들은 깜짝 놀란 나머지 누구도 입을 뻥긋하지 못했다.
  • “네 마누라 배가 저 모양인데 사처를 뛰어다니게 해? 가슴도 안 아파? 네가 아들이 필요 없다고 쳐, 난 손주를 안을 거야!”
  • “할아버지….”
  • 허아영이 웃으며 입을 열어 말하려고 하는데 배국봉의 매서운 시선에 멈칫했다.
  • “너도 그래, 애 엄마가 될 애가 그렇게 정도를 모르고 살아서야. 네 남편 따르면 밥은 얻어먹을 수 있어 좋을진 몰라도 아들이 없으면 아무것도 쓸모없어!”
  • 이렇게 된 이상 오늘 두 사람이 배 씨 가문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하는 일은 결정난 것과도 다름이 없다. 조금도 상의할 여지가 없었다.
  • 깊은 밤, 허아영이 배도형을 따라 방에 들어갔다. 두 사람 사이에는 뭔지 모를 어색함이 감돌고 있었다.
  • “야, 너 나한테 접근하지 마.”
  • 몸 위를 감싼 치마를 꼬옥 끌어잡았다. 허아영은 뭔가 걱정스러웠다. 그녀는 그와 함께 했던 그날 밤의 일을 하나하나 세밀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 “내가 짐승인 줄 아나! 너 아직 임신이야!”
  • 배도형이 기가 찼는지 빽 소리를 질렀다. 그녀가 학대를 받은 듯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 화가 났다. 그녀의 맘속에 자신이 그렇게도 볼품없단 말인가?
  • “네 짐승 본능은 이미 전에 깊이 느껴보았지.”
  • 허아영이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자신이 힘에 부쳐 침대에 쓰러져 누운 것을 감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 “소파랑 바닥은 네가 좋을 대로 골라, 침대는 내 거야.”
  • 허아영의 패기에 배도형이 눈썹을 들썩였다.
  • “나 딱 침대에서 잘 거야. 그럼 네가 날 뭐 어쩔 건데?”
  • 말속에 조롱이 섞여져 있었다.
  • “안 어쩔 건데요.”
  • 허아영은 순간 졸음이 몰려왔다.
  •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미성년자가 뭘 무서워해?”
  • “허아영!”
  • 배도형이 속으로 크게 노했다. 그러고는 힘 있게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고 재차 말을 꺼냈다.
  • “나 다 컸어. 내 민증도 봤잖아. 나 진작에 성인이 되었다고!”
  • “응응, 알겠어. 시끄럽게 굴지 마.”
  • 허아영은 베개와 거의 붙어있다시피 했다. 내내 낮은 소리로 구시렁거리며 말했다. 만약 배도형이 가까이 있었던 게 아니라면 절대 알아들을 수 없는 정도였다.
  • “나쁜 놈, 이거 놔….”
  • 허아영이 아무리 손을 뿌리쳐도 떨쳐낼 수 없었다. 무의식 간에 배도형을 힐긋 쳐다보고는 또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 배도형은 그자리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허아영이 그 무의식속에서 쳐다본 눈빛이 단번에 그의 가슴을 뚫고 들어와 그를 떨리게 했다. 그는 두 눈을 끔뻑이더니 신속히 결론을 내렸다.
  • 이 여자, 아주 여우야! 여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