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국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허아영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입을 모아 허아영을 대신해 구걸하려고 준비할 때 배국봉이 갑자기 큰소리로 웃어대기 시작했다.
“하하하, 맹랑한 계집애 같으니.”
배국봉은 웃고 난 뒤 실눈을 뜨고 허아영을 바라보았다.
“너 참 겁이 없구나, 정녕 내가 배도형더러 결혼하지 말라고 말릴 것이 두렵지 않은게야?”
“할아버지, 그럼 할아버지께서도 손주를 안으실 기회가 없으세요.”
허아영은 간이 대뜸 커졌다. 혹여나 배국봉의 말에 악의가 없었음을 알아서였는지 말에 장난기가 어려있었다.
“이야, 감히 날 협박해?”
배국봉이 깜짝 놀라 두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이건 협박이 아니에요. 다만 이 아이가 제 배 속에 있잖아요. 설마 제 뱃속의 아이를 배도형 뱃속에 옮겨 넣으실 건 아니시죠?”
허아영이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어르신의 말속에 숨은 뜻을 깨달으니 별로 무섭지도 않았다.
“옮긴다 해도 할아버지께서 그이가 낳을 수 있을 거라 보장하세요?”
“하하, 하하.”
이렇게 되니 배국봉이 더 즐겁게 웃었다. 그와 반면에 배도형의 안색은 더 철저히 검게 변했다.
“재밌네, 재밌어. 우리 손자며느리 통과야.”
배진화와 성설이 이 한마디를 듣고 바로 웃음을 터뜨렸다. 장난하나, 배 씨 가문은 이렇게 쉽게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배국봉의 인정을 받아야 배 씨 가문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입을 막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허아영이 배도형을 따라 본가에 함께 왔다는 말이 있을 수 있겠는가?
“진화야, 날도 늦었는데 오늘은 여기서 하룻밤 묵고 가렴.”
배국봉은 배도형과 허아영을 여태껏 지켜보며 자연스럽게 그들의 입을 막았다.
“임산부가 더더욱 사처를 헤매서는 안되지.”
배진화와 성설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배도형과 허아영은 달랐다. 특히는 어르신이 방 한 칸을 준비하라는 어르신의 말이 생생하게 들렸다. 그들 둘은 아직 그렇고 그럴 사이가 되질 못했는데 말이다.
“할아버지, 제가 허아영을 바래다줄 수 있어요, 걱정 마세요.”
배도형이 곧장 나서서 거절했다.
“철없는 놈아!”
배국봉은 지팡이를 들어 그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다른 사람들은 깜짝 놀란 나머지 누구도 입을 뻥긋하지 못했다.
“네 마누라 배가 저 모양인데 사처를 뛰어다니게 해? 가슴도 안 아파? 네가 아들이 필요 없다고 쳐, 난 손주를 안을 거야!”
“할아버지….”
허아영이 웃으며 입을 열어 말하려고 하는데 배국봉의 매서운 시선에 멈칫했다.
“너도 그래, 애 엄마가 될 애가 그렇게 정도를 모르고 살아서야. 네 남편 따르면 밥은 얻어먹을 수 있어 좋을진 몰라도 아들이 없으면 아무것도 쓸모없어!”
이렇게 된 이상 오늘 두 사람이 배 씨 가문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하는 일은 결정난 것과도 다름이 없다. 조금도 상의할 여지가 없었다.
깊은 밤, 허아영이 배도형을 따라 방에 들어갔다. 두 사람 사이에는 뭔지 모를 어색함이 감돌고 있었다.
“야, 너 나한테 접근하지 마.”
몸 위를 감싼 치마를 꼬옥 끌어잡았다. 허아영은 뭔가 걱정스러웠다. 그녀는 그와 함께 했던 그날 밤의 일을 하나하나 세밀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짐승인 줄 아나! 너 아직 임신이야!”
배도형이 기가 찼는지 빽 소리를 질렀다. 그녀가 학대를 받은 듯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 화가 났다. 그녀의 맘속에 자신이 그렇게도 볼품없단 말인가?
“네 짐승 본능은 이미 전에 깊이 느껴보았지.”
허아영이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자신이 힘에 부쳐 침대에 쓰러져 누운 것을 감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소파랑 바닥은 네가 좋을 대로 골라, 침대는 내 거야.”
허아영의 패기에 배도형이 눈썹을 들썩였다.
“나 딱 침대에서 잘 거야. 그럼 네가 날 뭐 어쩔 건데?”
말속에 조롱이 섞여져 있었다.
“안 어쩔 건데요.”
허아영은 순간 졸음이 몰려왔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미성년자가 뭘 무서워해?”
“허아영!”
배도형이 속으로 크게 노했다. 그러고는 힘 있게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고 재차 말을 꺼냈다.
“나 다 컸어. 내 민증도 봤잖아. 나 진작에 성인이 되었다고!”
“응응, 알겠어. 시끄럽게 굴지 마.”
허아영은 베개와 거의 붙어있다시피 했다. 내내 낮은 소리로 구시렁거리며 말했다. 만약 배도형이 가까이 있었던 게 아니라면 절대 알아들을 수 없는 정도였다.
“나쁜 놈, 이거 놔….”
허아영이 아무리 손을 뿌리쳐도 떨쳐낼 수 없었다. 무의식 간에 배도형을 힐긋 쳐다보고는 또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배도형은 그자리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허아영이 그 무의식속에서 쳐다본 눈빛이 단번에 그의 가슴을 뚫고 들어와 그를 떨리게 했다. 그는 두 눈을 끔뻑이더니 신속히 결론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