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아영이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나이 어린 남자한테 이렇게 큰 편견이 있는지 말이다.
허아영은 침착하려 했다.
“이 일은 우선 참견하지 마. 조금 이따 나가서도 아무말 하지말고,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난 너랑 절대로 결혼 안 해, 이 아이도 낳지 않을 생각이니깐 우리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알겠어?”
허아영은 말을 끝내고 밖에 있는 배진화에게 설명하러 나가려고 했다.
배도형은 그런 허아영의 손목을 낚아채며 막아섰다.
“아이를 낳지 않을 거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허아영은 단단히 화가 나 거칠게 배도형의 손을 뿌리쳤다.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배도형! 득 본건 너 아니야? 지금 내가 뒷수습할 테니깐 넌 빠지라고. 넌 정말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네가 날 책임지고 그럴 거도 없어, 내 아이를 네가 책임질 필요는 더더욱 없고.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다는 건 당연히 아이를 없애겠다는 뜻이야, 이제 됐니?”
허아영은 말하면서 여러 겹 접힌 병원 진단서를 가방에서 꺼내 배도형의 가슴팍에 던져버렸다.
“똑바로 봐. 그게 내 뜻이야. 득 볼 거 다 봤으면 이젠 좀 꺼져, 방해할 생각하지말고. 요즘 충분히 이 일 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있었는데. 이제 오후가 되면 너나 나나 다 해방이야.”
배도형은 진단서를 받아 들고는 씁쓸하게 웃었다.
인공유산?
그래… 좋아… 아주 좋아.
허아영은 지금 배도형의 동의를 거치지 않고 유산을 하려는 것이다.
배도형이 그렇게 하자고 할까?
허아영은 엄청 짜증스럽게 눈앞의 배도형을 바라봤다.
솔직히, 허아영은 요 며칠 진짜 짜증 났었다.
임신 2개월이라 허아영의 몸은 벌써 크고 작은 변화들이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허아영은 어제 임신 사실을 알게 되고는 바로 오늘 오후 낙태수술을 예약했다.
그런데 하필 지금 아이의 아빠를 만나다니!
허아영은 분노가 치밀었다.
“나 더 이상 너랑 실랑이 버리기 싫어. 넌 이거 하나만 알고 있으면 돼. 네가 책임질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거. 그거면 돼.”
하아영은 다시 자리를 뜨려고 했다. 하지만 배도형은 또다시 허아영을 붙잡았다.
허아영은 화가 난 나머지 고개를 돌려 언성을 높였다.
“야, 이 철부지야! 괜히 트집 잡지 마!”
배도형은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나 철부지 아니야!”
허아영도 눈살을 찌푸리며 배도형과 눈을 마주쳤다.
겨우겨우 감정을 다스린 허아영은 천천히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래. 좋아. 아저씨, 그럼 저 좀 나가봐도 될까요?”
배도형은 단칼에 거절했다.
“안돼! 뱃속의 아이도 내 아이야!”
순간 허아영은 더 이상 자신의 화를 가라앉힐 수 없었다.
“왜? 네가 책임이라도 지려고? 그래! 어디 한번 책임져봐! 내가 허락할게!”
배도형은 눈앞의 허아영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배도형이 대답할 틈도 없이 허아영은 웃으며 비아냥거렸다.
자기 자신을 비웃는 거 같기도 했고 배도형을 비웃는 거 같기도 했다.
“왜? 너한테 진짜 책임지라고 하니깐 겁나?”
허아영의 말투는 누가 봐도 좋지 않았다. 최대한의 인내심으로 말하고 있는듯했다.
이때 허아영은 피임약을 복용해야 한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내 인내심도 이제 한계야! 그날 밤 네 거칠었던 행동도, 내 뱃속에 네 핏줄 섬긴 것도 나 따지지 않으려고 해. 근데 만약….”
“거칠다니?”
배도형은 허아영의 말을 끊어버렸다.
“그때 그건 용감함이야, 용감함!”
허아영은 피식 웃었다. 자신도 모르게 배도형에 의해 대화 주제가 경로를 이탈해 버렸다.
“하하하. 용감함? 겨우 그 정도 가지고, 용감함?”
배도형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니라고? 그때 너도 내 몸 밑에서 충분히 즐겼잖아!”
말이 끝나기 무섭게 조그마한 허아영의 얼굴은 후끈 달아올랐다.
허아영은 배도형과 농담 삼아 엉큼한 얘기는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자신과 연관된 거라 허아영은 부끄러울 수밖에 없다.
배도형은 그 모습을 보고 잠시 우쭐거렸다. 그러고는 눈썹을 추켜세우고는 계속하여 말했다.
“안 그래? 너 그때 분명 좋아했어. 네가 아무리 내가 어리다고 비웃어도 그 어린 애가 널 임신까지 시켰잖아. 아냐?”
허아영의 얼굴은 점점 더 달아올랐다.
하지만 배도형이 보기에는 요염해 보였다.
허아영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럼 네 뜻은, 꼭 책임지고야 말겠다는 거지?”
배도형은 침착하게 말했다.
“내 아이인데, 당연히 책임져야지!”
허아영은 눈을 똑바로 뜨고는 배도형에게 물었다.
“너 ‘책임’ 진다는 게 뭘 뜻하는지는 알고 이러는 거야? 이건 애한테 집만 만들어주면 끝인게 아니야. 넌 얘한테 부성애, 모성애 다 주면서 완전한 가정을 만들어 줘야 한다고. 그게 ‘책임’ 진다는 거야. 만약 낳기만 했다고 책임진 거라면 차라리 안 낳는 게 맞아. 이 아이가 필요한건 아빠야. 네가 해야 할 것이 아주 많다고. 남자로서 책임지면서 한 집안을 먹여 살려야 하는 거라고! 네가 할 수 있을 거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