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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이 철부지야

  • 배도형은 미간을 찌푸렸다.
  • 허아영이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나이 어린 남자한테 이렇게 큰 편견이 있는지 말이다.
  • 허아영은 침착하려 했다.
  • “이 일은 우선 참견하지 마. 조금 이따 나가서도 아무말 하지말고,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난 너랑 절대로 결혼 안 해, 이 아이도 낳지 않을 생각이니깐 우리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알겠어?”
  • 허아영은 말을 끝내고 밖에 있는 배진화에게 설명하러 나가려고 했다.
  • 배도형은 그런 허아영의 손목을 낚아채며 막아섰다.
  • “아이를 낳지 않을 거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 허아영은 단단히 화가 나 거칠게 배도형의 손을 뿌리쳤다.
  •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배도형! 득 본건 너 아니야? 지금 내가 뒷수습할 테니깐 넌 빠지라고. 넌 정말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네가 날 책임지고 그럴 거도 없어, 내 아이를 네가 책임질 필요는 더더욱 없고.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다는 건 당연히 아이를 없애겠다는 뜻이야, 이제 됐니?”
  • 허아영은 말하면서 여러 겹 접힌 병원 진단서를 가방에서 꺼내 배도형의 가슴팍에 던져버렸다.
  • “똑바로 봐. 그게 내 뜻이야. 득 볼 거 다 봤으면 이젠 좀 꺼져, 방해할 생각하지말고. 요즘 충분히 이 일 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있었는데. 이제 오후가 되면 너나 나나 다 해방이야.”
  • 배도형은 진단서를 받아 들고는 씁쓸하게 웃었다.
  • 인공유산?
  • 그래… 좋아… 아주 좋아.
  • 허아영은 지금 배도형의 동의를 거치지 않고 유산을 하려는 것이다.
  • 배도형이 그렇게 하자고 할까?
  • 허아영은 엄청 짜증스럽게 눈앞의 배도형을 바라봤다.
  • 솔직히, 허아영은 요 며칠 진짜 짜증 났었다.
  • 임신 2개월이라 허아영의 몸은 벌써 크고 작은 변화들이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 허아영은 어제 임신 사실을 알게 되고는 바로 오늘 오후 낙태수술을 예약했다.
  • 그런데 하필 지금 아이의 아빠를 만나다니!
  • 허아영은 분노가 치밀었다.
  • “나 더 이상 너랑 실랑이 버리기 싫어. 넌 이거 하나만 알고 있으면 돼. 네가 책임질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거. 그거면 돼.”
  • 하아영은 다시 자리를 뜨려고 했다. 하지만 배도형은 또다시 허아영을 붙잡았다.
  • 허아영은 화가 난 나머지 고개를 돌려 언성을 높였다.
  • “야, 이 철부지야! 괜히 트집 잡지 마!”
  • 배도형은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 “나 철부지 아니야!”
  • 허아영도 눈살을 찌푸리며 배도형과 눈을 마주쳤다.
  • 겨우겨우 감정을 다스린 허아영은 천천히 숨을 크게 내쉬었다.
  • “그래. 좋아. 아저씨, 그럼 저 좀 나가봐도 될까요?”
  • 배도형은 단칼에 거절했다.
  • “안돼! 뱃속의 아이도 내 아이야!”
  • 순간 허아영은 더 이상 자신의 화를 가라앉힐 수 없었다.
  • “왜? 네가 책임이라도 지려고? 그래! 어디 한번 책임져봐! 내가 허락할게!”
  • 배도형은 눈앞의 허아영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 배도형이 대답할 틈도 없이 허아영은 웃으며 비아냥거렸다.
  • 자기 자신을 비웃는 거 같기도 했고 배도형을 비웃는 거 같기도 했다.
  • “왜? 너한테 진짜 책임지라고 하니깐 겁나?”
  • 허아영의 말투는 누가 봐도 좋지 않았다. 최대한의 인내심으로 말하고 있는듯했다.
  • 이때 허아영은 피임약을 복용해야 한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 “내 인내심도 이제 한계야! 그날 밤 네 거칠었던 행동도, 내 뱃속에 네 핏줄 섬긴 것도 나 따지지 않으려고 해. 근데 만약….”
  • “거칠다니?”
  • 배도형은 허아영의 말을 끊어버렸다.
  • “그때 그건 용감함이야, 용감함!”
  • 허아영은 피식 웃었다. 자신도 모르게 배도형에 의해 대화 주제가 경로를 이탈해 버렸다.
  • “하하하. 용감함? 겨우 그 정도 가지고, 용감함?”
  • 배도형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 “아니라고? 그때 너도 내 몸 밑에서 충분히 즐겼잖아!”
  • 말이 끝나기 무섭게 조그마한 허아영의 얼굴은 후끈 달아올랐다.
  • 허아영은 배도형과 농담 삼아 엉큼한 얘기는 할 수 있다.
  • 하지만 이건 자신과 연관된 거라 허아영은 부끄러울 수밖에 없다.
  • 배도형은 그 모습을 보고 잠시 우쭐거렸다. 그러고는 눈썹을 추켜세우고는 계속하여 말했다.
  • “안 그래? 너 그때 분명 좋아했어. 네가 아무리 내가 어리다고 비웃어도 그 어린 애가 널 임신까지 시켰잖아. 아냐?”
  • 허아영의 얼굴은 점점 더 달아올랐다.
  • 하지만 배도형이 보기에는 요염해 보였다.
  • 허아영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 “그럼 네 뜻은, 꼭 책임지고야 말겠다는 거지?”
  • 배도형은 침착하게 말했다.
  • “내 아이인데, 당연히 책임져야지!”
  • 허아영은 눈을 똑바로 뜨고는 배도형에게 물었다.
  • “너 ‘책임’ 진다는 게 뭘 뜻하는지는 알고 이러는 거야? 이건 애한테 집만 만들어주면 끝인게 아니야. 넌 얘한테 부성애, 모성애 다 주면서 완전한 가정을 만들어 줘야 한다고. 그게 ‘책임’ 진다는 거야. 만약 낳기만 했다고 책임진 거라면 차라리 안 낳는 게 맞아. 이 아이가 필요한건 아빠야. 네가 해야 할 것이 아주 많다고. 남자로서 책임지면서 한 집안을 먹여 살려야 하는 거라고! 네가 할 수 있을 거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