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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나는 너 같은 철부지 안 좋아해

  • 허아영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사실 배도형은 고의로 아버지의 뒤에 섰다. 그리고 마침내 허아영과 눈이 마주친 순간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천해 보이고 허세 가득한 여자가 바로 그날 밤 그 여인이라고? 이 며칠 내내 입에 달고 살게 했던 그 여자가…?
  • “너….”
  • 배도형이 입을 열려는데 허아영이 잽싸게 달려가 그의 손을 잡고 밖으로 끌고 나갔다.
  • 사무실에서는 또 허아영을 야유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허아영 뭐하는 거야? 이젠 결혼도 한다는 사람이 또 배 씨 집안 도련님을 꼬시고 그래?”
  • 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컸다!
  • 모든 이들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지만, 그들이 본 건 허아영이 배도형을 이끌고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모습이었다.
  • 허아영은 배도형이 누군지 몰랐다. 방금 장윤이 말한 말도 한 글자도 알아듣지 못했다.
  • 그녀는 다만 그 남자가 말썽을 피우러 온 건 줄만 알았다. 그리고 그를 이끌고 계단까지 가고 나서야 손을 놓았다.
  • “너 여기까지 무슨 일이야? 다 큰 남자가 책임지라고 찾아온 건 아니겠지?”
  • 배도형은 허아영을 바라보며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허아영이 고개를 들어 그의 다갈색 눈망울을 바라보았다. 심장 언저리가 떨려왔지만, 자신의 엉망인 일상을 떠올리며 꿋꿋이 말을 마쳤다.
  • “내가 딱 잘라 말하는데. 그때 너와 나는 그냥 한차례의 해프닝이었어. 이미 지난 일로 나 찾아오지 마. 나는 너 같은 철부지 안 좋아해. 알겠어?”
  • 말을 마친 허아영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
  • 배도형이 풋 하고 웃었다.
  • ‘철부지? 나 배도형이 언제부터 철부지가 된 거지?’
  • 그는 한 손으로 나가려는 허아영을 붙잡고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 “너 뭐라고 했어? 내가 철부지라고?”
  • 허아영은 그를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다 바로 그 말뜻을 이해했다.
  • “그럼 아니야? 너 몇 살인데? 솔직히 말해서 그날 밤, 네가 나보다 4살이나 어리다는 걸 알았다면 하늘이 무너져도 너와 안 잤을 거야!”
  • 배도형은 이마에 핏대를 세웠다. 이건 또 무슨 뜻이래?
  • 내가 만족스럽지 않았나?
  • 하지만 그의 기억 속의 그날 밤에는, 저 여자가 자신의 품에서 교태를 부리고 무척이나 만족스러워 보였다!
  • “이만 놔줘. 나 일하러 가야 해. 너도 이제 그만 가봐!”
  • 허아영은 온 얼굴로 성가시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녀는 그날 밤에 그의 신분증을 우연히 줍고 자신보다 4살이나 어리다는 것을 알고 나서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 그녀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걸어나갔다. 배도형이 그 뒤를 따라 문 어구까지 왔다. 허아영이 고개를 돌려 그에게 낮은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 “너 지금 뭐하자는 거야?”
  • 배도형이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의 갈색 빛 눈동자에 그녀의 애교 섞인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리고 그는 문을 열고 곧장 자신의 아버지 사무실로 직행했다.
  • 허아영은 정신을 못 차리고 자리에 서 있다가 그의 뒤를 바싹 따랐다. 그녀는 사무실 문앞에 얌전히 서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려 애썼다.
  • 장윤의 큰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 “뭐하는 거야? 방금 들어간 그 사람이 네 남자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 허아영이 인상을 쓰고 그녀를 바라봤다.
  • 하지만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사무실에서 배진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도형아, 너 앞으로 나를 많이 도와야겠어. 아영이 임신을 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휴가를 신청할 거야.”
  • 도형?
  • 배도형.
  • 그녀는 그날 주운 신분증의 이름이 배도형이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 “허아영, 너 배 씨 가문 며느리 하고 싶었던 거야? 배 씨 가문이 비록 검소하게 살아도 아주 탄탄한 가문이라는 거 알지? 배 씨 가문 도련님이 아무리 유명하다고 해도 그렇지….”
  • 잠깐만!
  • 장윤이 뭐라고 중얼대는 것 같았지만, 허아영은 머리가 울려왔다.
  • 배진화?
  • 배도형?
  • 그들은 무슨 사이인 거야!
  • 허아영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펑’하는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혔던 문이 열렸다. 허아영은 그 매혹적인 갈색 눈망울을 바라보았다. 아주 갑작스레 다가온 그는 다른 사람이 보기에 마치 그녀를 안은 것처럼 보였다. 배도형은 그녀를 바라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 “네 자리는 어딨지?”
  • 목소리는 낮았다. 그날 밤의 목소리와는 많이 달랐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그녀의 다리에 힘이 풀리게 했다.
  • 허아영은 자신의 책상을 가리켰다.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이 남자는 바람처럼 사라져 그녀의 자리로 향했다. 그의 갈색빛 눈동자가 그녀의 책상을 수색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 허아영이 정신을 차리고 그의 뒤를 따랐을 때에는 배도형이 이미 그녀의 서랍에서 인애병원 산부인과 진단서를 가진 뒤였다.
  • “보지 마!”
  • 허아영이 다급히 빼앗으려 했다. 하지만 배도형이 한 수 더 빨랐다. 그녀의 손은 허공에서 허우적댔다.
  • 사무실의 모든 이들이 의아한 눈길을 보내왔다.
  • 아니, 분위기가 좀 묘한데?
  • 배진화가 급히 나왔다. 눈에 보이는 건 제 아들이 진단서를 든 손을 높게 쳐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 하지만 그도 사실 진단서 위의 두 줄밖에 읽지 못했다.
  • 1. 이름: 허아영
  • 2. 진단결과: 임신 2개월
  • 허아영이 재차 진단서를 빼앗으려는데 이 눈앞의 철부지가 보기와는 다르게 키는 전혀 작지 않았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키가 그녀보다 한참은 더 커 보였다! 그녀가 퐁퐁 뛰어도 그 손에 들린 진단서를 빼앗기엔 역부족이었다!
  • 허아영은 낮은 소리로 말했다.
  • “돌려줘! 내 물건 함부로 보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