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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참다

  •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순식간에 4년이 지났다.
  • “아저씨! 저 지각하겠어요! 먼저 갈게요!”
  • 안한미가 생리를 시작하고 나서부터 서지형은 그녀가 자신과 함께 자지 못하게 했다.
  • 하지만 지난 밤 비가 내렸고, 비가 올 때면 안한미는 서지형과 함께 잤다. 그리고 서지형과 함께 잘 때마다 너무 깊게 자서 매번 늦잠을 잤다.
  • 그래서 오늘도 또 늦게 일어난 것이다.
  • 안한미가 허둥대며 비서의 손에서 교복을 받아들고 현관을 나설 때였다.
  • “거기 서, 밥부터 먹어.”
  • 서지형은 그녀를 불러세웠다.
  • “아저씨... 저 진짜 늦는다고요...”
  • 안한미는 정말 급했고, 억울하기도 했다. 수업 중에 교실에 들어가는 게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른다.
  • 서지형은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 “고마워요, 아저씨!”
  • 안한미는 웃으면서 두 팔을 들어올려 머리 위해 하트를 만들었다.
  • “사랑해요!”
  • 멍해진 서지형의 잘생긴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요즘 자꾸 말썽을 피우는 이 꼬마 아가씨를 정말 어떡하면 좋을지 몰랐다.
  • 그는 유 비서를 쳐다보았다. 유 비서는 평소처럼 안한미가 차에서 먹을 수 있도록 아침 도시락을 쌌다.
  • 그저 그는 도련님이 안한미에게 말할 수 없는 감정이 생긴 건 아닌지 점점 걱정되었다. 그렇게 된다면 그들이 심혈을 기울인 계획이 무너질 것이고,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갈 것이었다.
  • ...
  • 학교.
  • 안한미는 항상 수업 종이 울리기 직전에 교실에 들어갔다. 교실에 들어가니, 소석이 그녀의 가방을 받아들며 말했다.
  • “왜 또 이렇게 급하게 와, 엄청 늦었네.”
  • “늦잠 잤지롱.”
  • 안한미는 소석을 향해 혀를 내밀었다.
  • 소석은 학교에서 꽤 유명했다. 집안도 좋고 외모도 괜찮고, 주변에 여자친구들이 끊이지 않았다. 파마를 하고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는, 그런 여자아이들이었다.
  • 원래 안한미는 소석 같은 친구들과 가까이 지내지 않는다. 그런데 한 수업에서 선생님이 소석에게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를 물었고, 짝꿍이었던 안한미가 보다 못해 조심스럽게 소석에게 답을 알려주고 난 뒤부터 둘 사이엔 설명하기 어려운 우정이 싹텄다.
  • 소석은 그때부터 일부러 안한미와 말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그는 안한미의 몇 없는 반 친구 중 한 명이 되었다.
  • 안한미는 자리에 앉았고 아직 선생님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때, 안한미는 뒤에서 여자애들 몇 명이 소곤거리며 그녀를 비웃는 소리를 들었다.
  • “또 늦었네, 어젯밤에 누구랑 뭐했길래. 우리 아빠가 그러는데 요즘 돈 많은 사람들은 다 어린 여자애들 좋아한대.”
  • 그 말을 들은 주변 아이들은 모두 크게 웃었다. 그 말을 한 사람은 정선으로, 정씨 집안의 딸이었고, 콧대가 높아서 남들이 자신보다 괜찮은 꼴을 못 보는 성격이었다.
  • 안한미는 정선에게 가장 거슬리는 눈엣가시였다.
  • 이 학교에선 그 누구도 안한미의 신분을 알지 못했다. 평소 등교할 땐 일반 승용차를 탔고, 아주 가끔 고급스러운 승합차를 타고 등교할 뿐이었다. 게다가 정선은 몰래 아빠에게 안한미에 대해서 알아봐달라고 했지만,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 “정선, 쟤 어젯밤에 같이 있었던 사람 너네 아빠는 아니겠지?”
  • 그 말을 듣자마자 정선은 안색이 변하며 뺨을 때렸다.
  • “닥쳐! 쟨 우리 아빠 눈에 안 차!”
  • 그 여자아이는 깜짝 놀랐다. 자신의 집안은 정선보다 훨씬 못했고, 앞으로도 정선과 같이 다녀야 하기 때문에 바로 고개를 숙이고 사과했다. 그리고는 씩씩거리며 뒤로 숨었다.
  • 안한미는 뒤에서 나는 소리가 다 그녀 이야기란 걸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항상 일을 크게 만들지 않았고, 학교에서는 투명인간처럼 지냈다. 아저씨를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 서지형을 처음 봤던 날, 서지형은 그녀의 상황을 무조건 비밀로 해야 한다며 그 누구도 그녀의 신분을 알게 해선 안 되고 아저씨가 누군지 알게 해서도 안 된다고 말했었다.
  • “야! 맨날 말을 그렇게 막하는데 아무도 반응도 안 해주고, 혼자 북치고 장구치면 재밌어?”
  • 안한미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 소석은 정선의 조롱을 참을 수 없어 결국 말을 뱉었다. 그러자 모든 남자아이들 사이에서 마치 정선을 비웃는 듯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 “그러니까, 너 말 좀 아껴. 그렇게 남 욕할 성깔은 어디서 오는 거야?”
  • 안한미는 성격도 좋고 공부도 잘하고, 모두가 인정하는 학교 여신이었으니, 안 좋아할 남학생이 없었다.
  • 안한미는 소석의 목소리를 듣고 부끄러워져 볼이 살짝 빨개졌다.
  • 그녀는 정선과 싸우지 말라는 의미로 그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 “내가 오늘 진짜 성깔 한 번 보여준다!”
  • 정선은 창피함에 화를 냈다. 그녀가 소석을 좋아하는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소석은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애 편에서 말하고 있었다.
  • “안한미! 옛날부터 너 진짜 마음에 안 들었어!”
  • 안한미는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았지만 정선은 그렇지 않았다. 정선은 안한미의 책상 앞으로 달려와 안한미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안한미의 책상을 엎어버리고 안한미의 머리카락을 잡았다.
  • 안한미는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머리 끝에서 전해오는 고통 때문에 정신이 바짝 드는 느낌이었다.
  • 너무 아파-!
  • “손 놔!”
  • 이를 본 소석이 자신의 책상을 발로 차고 일어났다.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로 잔뜩 화가 난 얼굴이었다.
  • 정선은 제멋대로지만, 소석이 무서웠기 때문에 굴욕스러운 눈물을 참으며 안한미의 머리를 내팽겨치듯 놓아주었다.
  • “안한미, 너 나중에 봐!”
  • 정선은 이를 악물었다. 안한미를 싫어하는 마음이 훨씬 더 커졌다.
  • 안한미는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해본 게 처음이었다. 정말 되받아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 눈물이 핑 돌았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쪼그리고 앉아 널브러진 교과서를 주웠다.
  • “도와줄게.”
  • 소석이 다가와 안한미의 책상을 세웠다. 안한미는 고마워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친했지만 처음으로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는 순간이었다. 그때서야 안한미는 소석이 매우 잘생겼다고 느꼈다.
  • “아이고, 노는 애가 모범생 여자애를 좋아한다? 이거 완전 청춘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장면 아니야!”
  • 소석과 가까운 친구들이 떠들어댔다.
  • “가서 네 할 일이나 해!”
  • 소석은 손에 잡히는대로 칠판 지우개를 잡아들어 던졌다.
  • 그리고는 몰래 흘긋 안한미를 보았다. 안한미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검고 긴 머리카락을 넘어 부끄러워 빨개진 그녀의 얼굴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