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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특히 마음이 시려

  • 차를 운전하여 집으로 향하고 있을 때 진소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고 어떻게 됐는지 물었다. 송민아는 사실대로 사건 경과를 진소미에게 말해줬으며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생략해버렸다. 진소미는 아주 기뻐하며 남신에 관해 몇 가지를 더 묻고 나서야 전화를 끊었다.
  • 디자인 원고가 인정을 받아서인지 송민아는 기분이 괜찮았고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이 시간에 양정아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차가 최씨 대문에 들어서자 안에 주차해 있는 검은색 람보르기니에서 애교 섞인 소리가 들려왔으며 송민아는 그 소리에 아주 익숙했다. 방설의 목소리였다.
  • 방금 전의 좋은 기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엄동설한에 누군가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차가워졌다. 송민아는 차에 앉아서 사지가 경직되는 것을 느꼈으며 특히 마음이 시려왔다. 그녀는 차 안의 불을 껐고 맞은편의 그 차량의 불도 꺼져 있는 상황이었다. 다만 그 차량이 화원의 불빛 아래에 세워져 있어 사랑을 하는 장면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 송민아는 방설이 다급히 치마와 외투를 입는 모습을 보았고 그녀가 사랑에 가득 찬 눈빛으로 최수호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보았으며 그녀가 또 최수호와 키스를 하는 장면을 보았다. 그녀는 마음에 구멍이 생긴 것처럼 차가운 바람이 그리로 스쳐 지나가고 있다고 느꼈다.
  • 얼마나 흘렀을까, 그녀의 마음이 더 이상 감각을 못 느낄 즈음 최수호는 차에 시동을 걸고 방설을 데리고 떠나갔다. 송민아는 산송장처럼 집에 들어섰고 화장실로 달려가 물을 틀고 세수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물을 틀자마자 그녀는 미끄러져 바닥에 주저앉았고 그녀는 그렇게 얼굴을 무릎에 묻었다.
  • 그녀와 최수호는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비록 많은 시간 동안 그녀가 그에게 매달리긴 했지만 그는 그녀에게 아주 부드러웠고 종래로 엄숙하게 그녀에게 뭐라 한 적이 없었으며 그녀를 슬프게 하지도 않았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그가 변하기 시작했고 그는 더 이상 그녀가 그를 위해 하는 일들을 보지 못했으며 밑도 끝도 없이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 몸으로 느껴지는 차가움에 송민아는 추워서 덜덜 떨고 있다가 그제서야 물을 틀어놓은 것이 생각났고 화장실의 바닥에는 이미 물이 흥건히 고여 있었고 그녀의 옷을 적시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수도꼭지를 틀고 거울로 귀신처럼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며 웃었다. 하지만 그 웃는 얼굴은 울 때보다 더 보기 싫었다.
  • 화장실에서 나오자 누군가 별장의 대문을 열었고 익숙한 발걸음 소리에 송민아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미워하는데 자신도 더 이상 매달릴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눈길 한번 돌리지 않고 위층에 올라갔으나 뒤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걸 발견했고 그녀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누군가가 오른손을 덥석 잡았다.
  • “오늘 밤 어디 갔었어?”
  • 최수호의 목소리는 차가웠고 그녀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가했다. 송민아는 손목이 탈구라도 되는 것 같았으며 몸을 돌려 목소리를 낮추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 “밖에서 밥을 먹었어요.”
  • “누구랑?”
  • 최수호는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송민아의 두 눈은 아주 아름다웠다. 비록 환하게 아름다운 건 아니지만 부드럽고 조용한 그런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녀의 정교한 이목구비는 아무런 공격성도 있는 것 같지 않았으며 그녀를 볼 때마다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 최수호는 한순간 멍해졌다. 그는 만약 앞에 있는 여자가 마음이 독한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는 그녀와 억지로라도 잘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그저 한순간뿐, 그는 이내 이런 생각을 뿌리쳤다. 최수호는 순간 표정이 어두워졌다.
  • “설마, 또 남자들과 밥을 먹은 건 아니겠지? 밥을 먹었다고 하면서, 송민아, 당신 나 모르게 무슨 짓을 꾸미고 다니는 건 아니지? 고객과 어떻게 사업 구상을 했는데? 응?”
  • 그는 말을 하면서 말투가 점점 날카롭고 기분 나쁘게 변했고 송민아는 조용히 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상상하지 않아도 그가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 순간 그녀는 한없이 어이없고 모욕감이 들었다. 그녀는 있는 힘껏 그가 잡고 있는 손목을 뺐고 뒤로 두 걸음 휘청거리더니 담담하게 말을 했다.
  • “왜요? 제가 남자 고객과 사업 구상을 했다고 해서 당신이 화난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