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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그렇게 겁 없는 여자는 아니에요

  • “증손주?”
  • 노부인은 순간 기대에 찬 눈빛을 빛내며 여전히 담담한 표정을 한 손주를 바라보았다.
  • “녀석, 빨리 말해. 내 증손주 지금 어디 있어?”
  • 증손주란 말이 나오자 노부인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부태준을 재촉했다.
  • 부태준은 고개를 들고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 “저 여자를 쫓아내신다면서요? 그럼 어떻게 증손주를 봐요?”
  • 그의 모호한 태도에 조급해진 노부인이 원망 섞인 말투로 말했다.
  • “녀석, 장난이었어? 저 여자랑 우리 증손주랑 무슨 상관이야….”
  • 그녀는 이런 파렴치한 짓을 저지른 여자를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할머니의 경멸 어린 말투에 부태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 그는 천천히 찻잔을 들어 차가워진 표정을 숨기고 말했다.
  • “어젯밤 저도 북황호텔에 있었다고요!”
  • 손자의 언짢은 말투에 노인은 잠시 멈칫하다가 예리한 눈빛을 빛내며 손자의 기색을 살폈다.
  • 그리고 잠시 후, 노부인은 놀란 비명을 질렀다.
  • “그럼 어젯밤 하초희랑 잔 외간 남자가 너였다는 얘기야?”
  • 부태준의 잘생긴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손자의 무시무시한 표정을 본 노인은 서둘러 말을 바꾸었다.
  • “쿨럭! 태준아, 네 말은 어젯밤 그 스위트룸에 있었던 남자가 너였다는 얘기야?”
  • 이번에 노인은 ‘외간 남자’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노부인은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손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 “네!”
  • 여전히 똥 씹은 표정을 한 부태준이 차갑게 대답했다. 하지만 노부인은 하초희가 바람이 난 게 아니라 손자와 뜨거운 밤을 보냈다는 사실에 그저 기뻐서 활짝 웃었다.
  • “이 할미가 큰 오해를 했네. 그 아이도 참, 진작 얘기하지…. 저렇게 무릎을 꿇고 있다가 우리 증손주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면 어떡해?”
  • 부태준은 안면에 경련이 일어날 것 같았다.
  • “아, 참! 의사는 뭐래? 영향은 없대?”
  • 노부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만약 임신이라면 영양보충을 많이 시켜야겠다고 노인은 생각했다.
  • ‘애가 얼마나 허약했으면 막 쓰러지겠어….’
  • “과로에 영양실조래요!”
  • 부태준은 360도로 바뀐 할머니의 태도에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 ‘얼마나 증손주가 갖고 싶으셨으면….’
  • “영양실조? 어떻게 지금 세월에 영양실조가 걸려? 안 되겠다. 이런 몸으로 어떻게 애를 낳겠어. 우리 증손주 굶지 않게 영양보충을 많이 시켜야겠어.”
  • 노부인은 마치 하초희가 당장 임신이라도 한 것처럼 지팡이를 짚고 일어나며 다급히 말했다.
  • “지금 내려가서 아줌마한테 영양죽이라도 끓이라고 시켜야겠어.”
  • “할머니!”
  • 부태준은 얼른 그녀를 부축하며 가라앉은 소리로 담담히 말했다.
  • “이제 그 여자를 용서하신 거예요?”
  • 그 말에 노부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 “너도 그 아이가 마음에 들어?”
  • 20년이 넘도록 여자라면 질색하던 손자가 갑자기 한 여자를 이렇게까지 관심하는 모습을 보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 노인의 말에 부태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마음에 든다고 하기엔 아직 이른 것 같고 그냥 재미있는 여자라고 생각될 뿐이었다.
  • 노부인은 한참 고민에 잠긴 얼굴을 한 손자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다가 정색하며 말했다.
  • “네가 그 아이가 마음에 들었다면 더 반대 안 할게. 어차피 우리 부씨 가문에 발을 들인 아이였으니까. 앞으로 너한테만 잘하면 이 할미도 찬성이야. 하지만 밤중에 나가서 술을 마신 건 그 아이 잘못이고, 이미 혼도 냈으니 이제 됐어. 하지만 앞으로 또 나가서 허튼짓하고 남자 옷을 입고 돌아다니면 이 할미도 용서 못 해! 그러니까 네가 잘 타일러!”
  • 노부인은 하초희가 급히 돌아오느라 그랬을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시름이 놓이지 않아 엄숙한 말투로 당부했다.
  • “할머니,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잘 타이를게요!”
  • 가라앉은 소리로 대답한 부태준은 또 무언가 생각난 듯, 담담히 입을 열었다.
  • “할머니, 호텔에서 있은 일은 잠시 비밀로 해주세요. 하초희한테도요!”
  •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어딘가 위압감을 풍기는 모습이었다.
  • “왜? 어젯밤 둘이 함께 보냈다며? 그런데 어떻게 비밀로 하라는 거야?”
  • 노부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 ‘어젯밤 둘이 같이 있었으면 분명 얼굴을 봤을 텐데….’
  • “빨리 증손주를 보시고 싶으면 그렇게 해요. 절대 들켜서는 안 돼요. 너무 잘해 주실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너무 뭐라고 하지도 마세요.”
  • 부태준은 자세한 설명 대신 요구사항만 간략하게 말했다. 하초희가 그의 신분을 모른다면, 그는 조금 같이 놀아 주는 것도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 손자의 사악한 눈빛을 본 노부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 그도 그럴 것이 첫날 밤 상대가 자신이라고 얘기하면서, 또 그건 비밀로 해달라니 그 의도를 도무지 파악할 수 없었다.
  • “그래, 마음대로 해!”
  • 노부인은 조금 갑갑했다. 그녀는 하초희가 다른 남자와 밤을 보냈을 가능성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다시 차가운 말투로 물었다.
  • “혹시 하초희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 네가 일부러 감싸 주는 건 아니지?”
  • “할머니! 제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요? 저 여자도 그렇게 간 큰 여자는 아니에요. 그건 제가 장담해요!”
  • 부태준이 여전히 사악한 눈빛으로 단호하게 대답했다.
  • “흥!”
  • 그가 하초희의 첫 남자가 자신이었다고 여러 번 증언해서야 노부인은 안심하고 한 집사와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 다시 서재로 돌아온 부태준은 다시 평소의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 “잠깐 서재로 와!”
  • 그는 분노가 섞인 목소리로 차갑게 명령했다.
  • 잠시 후, 금테 안경을 쓴 남자가 급히 서재에 들어섰다. 다름 아닌 부태준의 수행 비서 정찬이었다.
  • “대표님, 찾으셨나요?”
  • 공손히 두 손을 모은 정찬이 물었다. 창가에서 생각에 잠겼던 남자는 고개를 돌려 담담히 비서를 바라보며 명령했다.
  • “어젯밤에 어떻게 된 일인지 좀 알아봐. 하나도 놓치지 말고 자세히 조사해!”
  • 그의 눈빛은 어느새 살기로 번뜩이고 있었다.
  • “네?”
  • 정찬은 의아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 ‘어젯밤 일은 이미 해결된 거 아니었나?’
  • 주제도 모르고 부태준의 방에 억지로 여자를 밀어 넣은 남자는 이미 처리했고, 아마 남자는 지금쯤 구석진 곳에서 후회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 “하초희 말이야!”
  • 남자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 “네!”
  • 정찬은 이내 큰 소리로 대답하고 남자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뒤, 재빨리 서재를 나갔다.
  • 남자의 눈빛이 위험하게 번뜩였다.
  • ‘감히 내 여자를 모함해?’
  • 그는 도대체 어떤 간 큰 놈이 부씨 가문을 상대로 태클을 걸었는지 직접 보고 싶었다.
  • 잠시 생각에 잠겼던 남자는 이내 발길을 돌려 서재를 나가 침실로 들어갔다. 하초희를 돌보던 고용인이 그를 보자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 “먼저 나가 봐!”
  • “네, 도련님!”
  • 침대에 다가간 남자는 아직도 잠든 여자의 얼굴을 복잡한 시선으로 뚫어지게 응시했다.
  • 마치, 그녀에 관한 것이라면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