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이런 파렴치한 짓을 저지른 여자를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할머니의 경멸 어린 말투에 부태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천천히 찻잔을 들어 차가워진 표정을 숨기고 말했다.
“어젯밤 저도 북황호텔에 있었다고요!”
손자의 언짢은 말투에 노인은 잠시 멈칫하다가 예리한 눈빛을 빛내며 손자의 기색을 살폈다.
그리고 잠시 후, 노부인은 놀란 비명을 질렀다.
“그럼 어젯밤 하초희랑 잔 외간 남자가 너였다는 얘기야?”
부태준의 잘생긴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손자의 무시무시한 표정을 본 노인은 서둘러 말을 바꾸었다.
“쿨럭! 태준아, 네 말은 어젯밤 그 스위트룸에 있었던 남자가 너였다는 얘기야?”
이번에 노인은 ‘외간 남자’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노부인은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손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네!”
여전히 똥 씹은 표정을 한 부태준이 차갑게 대답했다. 하지만 노부인은 하초희가 바람이 난 게 아니라 손자와 뜨거운 밤을 보냈다는 사실에 그저 기뻐서 활짝 웃었다.
“이 할미가 큰 오해를 했네. 그 아이도 참, 진작 얘기하지…. 저렇게 무릎을 꿇고 있다가 우리 증손주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면 어떡해?”
부태준은 안면에 경련이 일어날 것 같았다.
“아, 참! 의사는 뭐래? 영향은 없대?”
노부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만약 임신이라면 영양보충을 많이 시켜야겠다고 노인은 생각했다.
‘애가 얼마나 허약했으면 막 쓰러지겠어….’
“과로에 영양실조래요!”
부태준은 360도로 바뀐 할머니의 태도에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얼마나 증손주가 갖고 싶으셨으면….’
“영양실조? 어떻게 지금 세월에 영양실조가 걸려? 안 되겠다. 이런 몸으로 어떻게 애를 낳겠어. 우리 증손주 굶지 않게 영양보충을 많이 시켜야겠어.”
노부인은 마치 하초희가 당장 임신이라도 한 것처럼 지팡이를 짚고 일어나며 다급히 말했다.
“지금 내려가서 아줌마한테 영양죽이라도 끓이라고 시켜야겠어.”
“할머니!”
부태준은 얼른 그녀를 부축하며 가라앉은 소리로 담담히 말했다.
“이제 그 여자를 용서하신 거예요?”
그 말에 노부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너도 그 아이가 마음에 들어?”
20년이 넘도록 여자라면 질색하던 손자가 갑자기 한 여자를 이렇게까지 관심하는 모습을 보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노인의 말에 부태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마음에 든다고 하기엔 아직 이른 것 같고 그냥 재미있는 여자라고 생각될 뿐이었다.
노부인은 한참 고민에 잠긴 얼굴을 한 손자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다가 정색하며 말했다.
“네가 그 아이가 마음에 들었다면 더 반대 안 할게. 어차피 우리 부씨 가문에 발을 들인 아이였으니까. 앞으로 너한테만 잘하면 이 할미도 찬성이야. 하지만 밤중에 나가서 술을 마신 건 그 아이 잘못이고, 이미 혼도 냈으니 이제 됐어. 하지만 앞으로 또 나가서 허튼짓하고 남자 옷을 입고 돌아다니면 이 할미도 용서 못 해! 그러니까 네가 잘 타일러!”
노부인은 하초희가 급히 돌아오느라 그랬을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시름이 놓이지 않아 엄숙한 말투로 당부했다.
“할머니,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잘 타이를게요!”
가라앉은 소리로 대답한 부태준은 또 무언가 생각난 듯, 담담히 입을 열었다.
“할머니, 호텔에서 있은 일은 잠시 비밀로 해주세요. 하초희한테도요!”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어딘가 위압감을 풍기는 모습이었다.
“왜? 어젯밤 둘이 함께 보냈다며? 그런데 어떻게 비밀로 하라는 거야?”
노부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젯밤 둘이 같이 있었으면 분명 얼굴을 봤을 텐데….’
“빨리 증손주를 보시고 싶으면 그렇게 해요. 절대 들켜서는 안 돼요. 너무 잘해 주실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너무 뭐라고 하지도 마세요.”
부태준은 자세한 설명 대신 요구사항만 간략하게 말했다. 하초희가 그의 신분을 모른다면, 그는 조금 같이 놀아 주는 것도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손자의 사악한 눈빛을 본 노부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그도 그럴 것이 첫날 밤 상대가 자신이라고 얘기하면서, 또 그건 비밀로 해달라니 그 의도를 도무지 파악할 수 없었다.
“그래, 마음대로 해!”
노부인은 조금 갑갑했다. 그녀는 하초희가 다른 남자와 밤을 보냈을 가능성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다시 차가운 말투로 물었다.
“혹시 하초희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 네가 일부러 감싸 주는 건 아니지?”
“할머니! 제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요? 저 여자도 그렇게 간 큰 여자는 아니에요. 그건 제가 장담해요!”
부태준이 여전히 사악한 눈빛으로 단호하게 대답했다.
“흥!”
그가 하초희의 첫 남자가 자신이었다고 여러 번 증언해서야 노부인은 안심하고 한 집사와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다시 서재로 돌아온 부태준은 다시 평소의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잠깐 서재로 와!”
그는 분노가 섞인 목소리로 차갑게 명령했다.
잠시 후, 금테 안경을 쓴 남자가 급히 서재에 들어섰다. 다름 아닌 부태준의 수행 비서 정찬이었다.
“대표님, 찾으셨나요?”
공손히 두 손을 모은 정찬이 물었다. 창가에서 생각에 잠겼던 남자는 고개를 돌려 담담히 비서를 바라보며 명령했다.
“어젯밤에 어떻게 된 일인지 좀 알아봐. 하나도 놓치지 말고 자세히 조사해!”
그의 눈빛은 어느새 살기로 번뜩이고 있었다.
“네?”
정찬은 의아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어젯밤 일은 이미 해결된 거 아니었나?’
주제도 모르고 부태준의 방에 억지로 여자를 밀어 넣은 남자는 이미 처리했고, 아마 남자는 지금쯤 구석진 곳에서 후회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하초희 말이야!”
남자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네!”
정찬은 이내 큰 소리로 대답하고 남자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뒤, 재빨리 서재를 나갔다.
남자의 눈빛이 위험하게 번뜩였다.
‘감히 내 여자를 모함해?’
그는 도대체 어떤 간 큰 놈이 부씨 가문을 상대로 태클을 걸었는지 직접 보고 싶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남자는 이내 발길을 돌려 서재를 나가 침실로 들어갔다. 하초희를 돌보던 고용인이 그를 보자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