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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변태 영감’

  • 하초희는 한창 악몽을 꾸고 있었다.
  • 꿈에서 친아빠가 거금을 받고 그녀를 무서운 가문에 팔았고, 험악하게 생긴 변태 영감의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했다.
  • 그곳에는 백발이 성성한 늙은 마녀가 있었는데 만나자마자 그녀를 욕하고 때렸다. 결국 그녀는 어둡고 음침한 곳에 갇혔고 수도 없이 많은 음산한 눈동자와 손들이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 그녀는 혼신의 힘을 다해 도망쳤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곳을 벗어날 수 없었다. 결국 뛰다가 지친 그녀는 풀썩 바닥에 쓰러졌다. 쓰러지는 순간 갑자기 한 쌍의 다리가 눈앞에 나타났다. 하지만 아무리 고개를 들려고 애써도 상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 안개에 둘러싸여 차갑고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덜컥 겁이 난 그녀는 온몸을 떨었다.
  • “하초희, 어딜 도망가!”
  • 오싹하리만치 차가운 음성이 귓가에서 울렸다. 가슴이 철렁한 그녀는 새된 비명을 질렀다.
  • “악! 사람 살려….”
  • 하초희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아직도 가슴이 쿵쾅거렸고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한참 주변을 둘러보고 나서야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 ‘악몽을 꾼 건가?’
  • 머리는 아직도 어지러웠지만, 어쩐지 꿈에서 본 장면이 현실과 너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내가 어디에서 쓰러졌었지?’
  • ‘아… 맞아! 사당이었어. 안에는 수많은 위패가 있었고… 또 뭔가 본 것 같은데…. 설마 꿈에서 본 게 다 사실이라고? 무서워!’
  • 하초희는 멍한 표정으로 낯선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 ‘여긴 또 어디야?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 흑백을 메인 컬러로 한 차가운 인테리어는 이곳이 남자의 방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 그녀가 한창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고용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식사 거리를 들고 방에 들어왔다.
  • 잠에서 깬 그녀를 본 고용인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 “아가씨, 깨셨어요?”
  • ‘나를 알아?’
  • “여긴 어디죠?”
  • 하초희가 갈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어머, 잊었어요? 여긴 부씨 가문 본가예요.”
  • 식사 거리를 탁자에 내려놓은 고용인이 공손히 대답했다.
  • ‘부씨 가문? 아… 아빠한테 팔려서 여기로 왔었지…. 정말 꿈이 아니었어…. 아직도 본가에 있었구나.’
  • “그럼 이 방은 또 어디예요?”
  • 그녀는 심플하면서도 화려함을 잃지 않은 낯선 방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그녀의 기억에 이곳에 머물렀던 방은 이곳이 아니었다.
  • “이 방이요?”
  • 하초희가 고개를 끄덕이자 고용인이 말을 이었다.
  • “여긴 대표님 침실이죠!”
  • “네? 여기가 그 망할…”
  • 하초희가 경악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 ‘여기가 그 변태 영감 방이라고? 이 침대가 변태 영감이 잠자는 곳이라고?’
  • 이런 생각이 들자 하초희는 온몸에 소름이 돋아 서둘러 침대에서 내렸다. 고용인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 “아가씨, 왜 그래요?”
  • “아, 아니에요!”
  • 하초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세상에! 여긴 또 언제 온 거야? 설마 그 변태 영감에게 먹힌 거야?’
  • 그녀는 황급히 입고 있는 옷을 확인했다. 이미 잠옷으로 갈아입은 것을 확인한 그녀는 울고만 싶었다. 온몸에 뒤덮인 뜨거운 흔적들을 보면 죽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 ‘이 망할 변태가! 내가 잠든 사이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어쩐지 잠들어 있는데도 누가 계속 쳐다보는 것 같더라니… 그 변태 영감이었어! 뭐야… 엿보는 취미까지 있었어!’
  • 생각이 꼬리를 물자, 하초희는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누구든 자신이 잠자는 동안에 누군가가 자신을 계속 쳐다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나쁠 것이다.
  • ‘응? 잠깐만… 아니야!’
  • 하초희는 고개를 들고 이상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고용인을 향해 급히 물었다.
  • “지금 몇 시예요?”
  • “오후 두 시요!”
  • “날짜는요?”
  • “25일이죠!”
  • 고용인이 성실히 대답했다.
  • ‘25일? 그럼 오늘이 아직 끝나지 않은 거잖아? 어제가 24일, 내가 동창 모임에 참석했고… 그리고 어떤 남자랑 술 취한 상태에서 잠을 잤고… 집에 돌아와서 벌을 받았고….’
  • 생각을 정리한 하초희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온몸의 자국들은 아마 어젯밤 그 남자가 남긴 것이 맞을 것이다.
  • ‘그 변태가… 아직 아무 짓도 하지 않았겠지? 이제 반나절밖에 안 지났는데 시퍼런 대낮에 무슨 일을 저질렀을 리 없어!’
  • “그럼 저는 어떻게 이 방에 온 거죠? 옷은 누가 갈아입힌 건가요?”
  • 하초희는 기대를 품고 재차 고용인을 향해 물었다. 고용인도 그녀의 물음에 성실히 답했다. 고용인은 당황한 그녀의 표정을 보며 의식을 잃어서 기억나지 않는 거라 생각하고 묻지 않은 것까지 친절히 답해 주었다.
  • “사당에서 정신을 잃은 아가씨를 대표님이 안고 이 방에 온 거예요. 그리고 의사가 와서 링거를 놓았고 링거를 다 맞아도 깨어나질 않으시고 식은땀만 흘리길래 제가 옷을 갈아입혀 드렸어요.”
  • 변태 영감에게 안겨 이 방에 왔다는 말을 들은 하초희는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의식을 잃어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변태 영감도 그런 상태에서 자신을 덮치지는 않았을 테니까.
  • 그제야 손등에서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손을 들어보니 과연 주사 자국이 있었다.
  •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잠들어 있었네….’
  • “아가씨, 몸도 허약하신데 얼른 침대에 올라가서 쉬세요. 이건 어르신께서 분부하신 닭죽이에요. 조금만 마셔요!”
  • ‘어르신이 갑자기 왜 이렇게 친절하시지?’
  • 하초희는 의아했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기력이 없었다. 고용인이 뚜껑을 열자 맛있는 냄새가 확 풍기면서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으니 배고픈 게 당연했다.
  • 그녀는 수면 부족으로 저혈당 쇼크가 왔던 것이다. 이제 실컷 잤으니 머리도 한결 맑아졌다. 아직 여기저기 삭신이 아프긴 했지만, 다른 곳은 멀쩡했다. 고용인이 말한 것처럼 허약한 상태도 아니었다.
  • 고용인이 상을 차리자 그녀도 사양하지 않고 서둘러 먹기 시작했다. 빨리 먹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녀는 한시도 변태 영감의 방에 있기 싫었다.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고, 이제 무슨 짓을 벌일지도 몰랐으니까. 지금 배가 고파서 다리가 후들거리지만 않았어도 진작 자신의 방으로 도망쳤을 것이다.
  • “저기, 그럼… 대표님은 어디 나가셨나요?”
  • 한참 배를 채운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 “저택에 안 계신 것으로 보아 나가신 것 같습니다.”
  • 고용인은 중점만 간략하게 대답했다.
  • “그래요…”
  • 그제야 하초희는 안심하고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고용인은 우아는 고사하고, 허겁지겁 음식을 삼키는 그녀를 보고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가, 이내 재미있는 아가씨라고 생각했다.
  • 우아하고 단아하며, 시시각각 이미지에 신경 쓰는 여느 재벌 집 규수들과는 달리, 눈앞에 이 아가씨는 활발하고 생기 넘치는 모습이었다. 성격도 나쁘지 않았고 묻고 싶은 건 대놓고 묻는 털털한 모습에 앞으로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 “아, 참. 이름이 뭐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