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8화 ‘외간 남자’의 신분

  • 부태준은 깊은 눈빛으로 잠든 여자의 얼굴을 응시했다. 이때, 그녀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 순간 주삿바늘을 든 의사는 등 뒤에서 오싹한 기운을 느꼈다. 의사는 조심스럽게 하초희의 손에 주사를 꽂았다.
  • “도련님, 주사를 다 맞으면 하초희 씨도 깨어나실 겁니다.”
  • “먼저 나가 봐!”
  • 부태준이 가라앉은 소리로 명령했다. 이 세상에 그의 말을 거역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 “네!”
  • 의사는 황급히 물건들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침대에 다가간 부태준은 아직도 깊은 잠에 빠진 여자를 깊이 응시했다.
  • 조막만 한 얼굴, 정교한 이목구비,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얼굴…. 그녀는 마치 잠든 도자기 인형 같았다.
  • 조금만 힘을 주면 부서질 것 같은 인형!
  • 눈길이 그녀 목덜미에 뒤덮인 키스 마크에 닿자 부태준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겁 없이 나가서 바람을 피워 놓고 사당에서는 놀란 쥐처럼 찍소리 못하고 쓰러졌다. 사실은 좀 더 겁을 줄 작정이었는데 이렇게 기겁하며 쓰러질 줄은 그도 예상치 못했다.
  • ‘재미있네!’
  • 그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휘었다.
  • “태준아!”
  • 문가에서 노부인의 목소리가 들리자, 부태준은 얼른 표정을 수습하고 고개를 돌렸다.
  • “할머니!”
  • 노부인은 고용인의 부축을 받으며 어두운 표정으로 방 안에 들어섰다. 손자의 침대에 누운 하초희를 본 노인은 기뻐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 만약 하초희가 사고만 치지 않았으면 대놓고 기뻐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 “태준아, 왜 이 여자를 여기 재워?”
  • 노부인은 경멸에 찬 눈빛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그녀의 눈에 하초희는 부도덕하고 수치심을 모르는 더러운 여자였다. 그런 그녀가 다른 남자와 잔 것도 모자라, 손자의 침대에 떡하니 누워 있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 노인은 당장이라도 이 여자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의 손자는 최고만 소유해야 한다. 이런 걸레짝 같은 여자는 눈만 더럽힐 뿐이다.
  • 부태준이 그녀를 품에 안고 돌아와서 침실로 데려다가 자기의 침대에 눕힌 것을 생각하면 노부인은 후회막급이었다.
  • ‘그때 이 여자 말대로 밖에 내다 버렸어야 했는데!’
  • 어차피 그녀에게 이백억이라는 돈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나중에 하씨 가문에 돈을 요구하면 될 일이었다.
  • 고용인에게 하초희를 잘 보살피라고 명한 부태준은 노부인을 부축해 침실을 나섰다. 그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 “할머니, 이 여자를 집에 들이고 싶으셨던 게 아니었어요?”
  • “처음엔 나도 그랬지.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 하초희 저 여자는 이미 더럽혀진 몸이야. 우리 부씨 가문에 저런 여자는 필요 없어. 저런 여자가 낳은 아이를 받아들일 생각도 없고!”
  • ‘저 여자 이름이 하초희였군! 그럭저럭 예쁜 이름이네.’
  • 부태준은 그녀의 이름을 속으로 되뇌며 노부인을 부축해 서재로 들어갔다. 뒤따라오던 한 집사와 기타 고용인들은 문밖에서 대기했다.
  • “할머니, 화 푸세요. 뭔가 오해가 있었을 수도 있잖아요! 기자들이 허위 기사를 쓰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인가요? 그리고 이런 걸 믿고 화를 내시면 누군가의 의도 대로 되는 게 아니겠어요?”
  • 부태준은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담담히 말했다. 순간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노부인은 예리한 눈으로 손자를 쳐다보았다.
  • 노인은 손자의 조각 같은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날카로우면서도 차가운 얼굴에서 어릴 땐 본 적 없는 성숙한 남자의 분위기가 풍겼다. 순간 노인은 아끼던 손자가 더는 부모의 손길을 필요로 하던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생각이 확 들었다.
  • “태준아, 네 말은 누가 사건을 조작했다는 거야?”
  • 부태준은 할머니를 부축해 의자에 앉힌 뒤, 맞은편에 앉아 담담한 표정으로 차를 따랐다.
  • “할머니! 차 마셔요!”
  • 남자는 한 손으로 찻잔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찻잔을 받쳐 공손히 노부인에게 건넸다. 그 모습을 본 노부인은 찻잔을 받아들고 한 모금 마신 뒤, 다시 입을 열었다.
  • “너 뭔가 알고 있지? 빨리 얘기해 봐. 조급해 죽겠어.”
  • 오랜 세월 부씨 가문의 안주인으로 살아 온 그녀는 명석한 두뇌를 가진 노인이었다. 남편을 일찍 잃고 아들 내외마저 먼저 떠나보낸 그녀는 홀로 이 큰 가문을 이끌며 수많은 풍파를 겪었다. 나약하고 멍청한 여자였으면 가문은 진작 풍비박산 났을 것이다.
  • “이렇게 이른 시간에 할머니께선 최신 잡지와 신문을 받아 보셨어요. 좀 이상하지 않아요?”
  • 부태준은 차가운 눈빛으로 담담히 노부인을 마주 보았다. 그 말을 들은 노부인도 문득 수상한 느낌이 들었다.
  • 그랬다! 노부인은 이른 아침 누군가로부터 잡지를 받았고, 잡지 표면을 장식한 하초희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래서 한 집사를 시켜 확인차 그녀에게 전화했는데 전화기가 꺼져 있자 불같이 화를 냈다.
  • 하초희가 집에 돌아오자 노인은 분노를 표출하기 급급해서 전혀 수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분노에 이성을 잃었던 것이다.
  • 손자의 말을 듣고 보니 노부인도 누군가의 꿍꿍이일 것 같다는 생각이 확 들었다. 그 사람의 의도는 아마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하초희를 모함해서 부씨 가문에서 쫓겨나게 만들고 싶었거나, 고의로 부씨 가문 명예를 추락시키려는 수작이 분명했다.
  • 하지만 이 모든 게 오해였다고 해도 하초희가 나가서 술을 마시고 외간 남자랑 잠을 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여자의 신분으로 밤중에 나가서 술을 먹는다는 자체를 보수적인 노부인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 그리고 가장 참을 수 없었던 건, 마구 흐트러진 차림새로 호텔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것도 보란 듯이 외간 남자의 셔츠를 입고서!
  • 노부인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만 더 치밀어서 차갑게 코웃음 쳤다.
  • “흥! 아무리 누군가에게 모함을 당했다고 해도 그건 지가 멍청해서야! 부씨 가문에 들어온 지 이틀 만에 겁도 없이 이런 사고를 저질러? 주제를 몰라도 분수가 있지. 어디 여자가 밤중에 나가서 술을 먹고 돌아다녀! 그리고는 염치도 없이 외간 남자랑 잠이나 자고. 난 절대 이런 여자를 우리 가문에 계속 둘 수 없어. 우리 가문 명성만 떨어뜨릴 뿐이야….”
  • 부태준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존귀하고 자존심 강한 부씨 가문 대표로서 유부녀와 바람난 외간 남자로 오해 받았는데, 기분이 좋으면 이상했다.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 남자의 얼굴에 잠깐 분노가 스쳤다. 그는 고개를 숙여 찻잔을 손에 들고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었다.
  • “그럼 할머니는 그 여자를 내쫓고 싶으신 거죠?”
  • 담담하면서도 위엄 있는 목소리에 마구 욕설을 퍼붓던 노부인도 순간 멈칫했다.
  • “물론이지!”
  • 하지만 이내 두 눈을 부릅뜨며 대답했다.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그 여자의 잘못도 있었으니까.
  • 남자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유리로 된 찻잔이 탁자와 부딪치며 ‘쨍강’하는 소리가 났다.
  • “증손주가 밖에서 자랄까 봐 걱정되지도 않아요?”
  • 마침 갈증이 나서 차를 들이켜던 노부인은 그 말을 듣고 하마터면 찻물을 뿜을 뻔했다.
  • “쿨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