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태준은 깊은 눈빛으로 잠든 여자의 얼굴을 응시했다. 이때, 그녀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순간 주삿바늘을 든 의사는 등 뒤에서 오싹한 기운을 느꼈다. 의사는 조심스럽게 하초희의 손에 주사를 꽂았다.
“도련님, 주사를 다 맞으면 하초희 씨도 깨어나실 겁니다.”
“먼저 나가 봐!”
부태준이 가라앉은 소리로 명령했다. 이 세상에 그의 말을 거역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네!”
의사는 황급히 물건들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침대에 다가간 부태준은 아직도 깊은 잠에 빠진 여자를 깊이 응시했다.
조막만 한 얼굴, 정교한 이목구비,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얼굴…. 그녀는 마치 잠든 도자기 인형 같았다.
조금만 힘을 주면 부서질 것 같은 인형!
눈길이 그녀 목덜미에 뒤덮인 키스 마크에 닿자 부태준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겁 없이 나가서 바람을 피워 놓고 사당에서는 놀란 쥐처럼 찍소리 못하고 쓰러졌다. 사실은 좀 더 겁을 줄 작정이었는데 이렇게 기겁하며 쓰러질 줄은 그도 예상치 못했다.
‘재미있네!’
그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휘었다.
“태준아!”
문가에서 노부인의 목소리가 들리자, 부태준은 얼른 표정을 수습하고 고개를 돌렸다.
“할머니!”
노부인은 고용인의 부축을 받으며 어두운 표정으로 방 안에 들어섰다. 손자의 침대에 누운 하초희를 본 노인은 기뻐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만약 하초희가 사고만 치지 않았으면 대놓고 기뻐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태준아, 왜 이 여자를 여기 재워?”
노부인은 경멸에 찬 눈빛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그녀의 눈에 하초희는 부도덕하고 수치심을 모르는 더러운 여자였다. 그런 그녀가 다른 남자와 잔 것도 모자라, 손자의 침대에 떡하니 누워 있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노인은 당장이라도 이 여자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의 손자는 최고만 소유해야 한다. 이런 걸레짝 같은 여자는 눈만 더럽힐 뿐이다.
부태준이 그녀를 품에 안고 돌아와서 침실로 데려다가 자기의 침대에 눕힌 것을 생각하면 노부인은 후회막급이었다.
‘그때 이 여자 말대로 밖에 내다 버렸어야 했는데!’
어차피 그녀에게 이백억이라는 돈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나중에 하씨 가문에 돈을 요구하면 될 일이었다.
고용인에게 하초희를 잘 보살피라고 명한 부태준은 노부인을 부축해 침실을 나섰다. 그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할머니, 이 여자를 집에 들이고 싶으셨던 게 아니었어요?”
“처음엔 나도 그랬지.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 하초희 저 여자는 이미 더럽혀진 몸이야. 우리 부씨 가문에 저런 여자는 필요 없어. 저런 여자가 낳은 아이를 받아들일 생각도 없고!”
‘저 여자 이름이 하초희였군! 그럭저럭 예쁜 이름이네.’
부태준은 그녀의 이름을 속으로 되뇌며 노부인을 부축해 서재로 들어갔다. 뒤따라오던 한 집사와 기타 고용인들은 문밖에서 대기했다.
“할머니, 화 푸세요. 뭔가 오해가 있었을 수도 있잖아요! 기자들이 허위 기사를 쓰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인가요? 그리고 이런 걸 믿고 화를 내시면 누군가의 의도 대로 되는 게 아니겠어요?”
부태준은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담담히 말했다. 순간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노부인은 예리한 눈으로 손자를 쳐다보았다.
노인은 손자의 조각 같은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날카로우면서도 차가운 얼굴에서 어릴 땐 본 적 없는 성숙한 남자의 분위기가 풍겼다. 순간 노인은 아끼던 손자가 더는 부모의 손길을 필요로 하던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생각이 확 들었다.
“태준아, 네 말은 누가 사건을 조작했다는 거야?”
부태준은 할머니를 부축해 의자에 앉힌 뒤, 맞은편에 앉아 담담한 표정으로 차를 따랐다.
“할머니! 차 마셔요!”
남자는 한 손으로 찻잔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찻잔을 받쳐 공손히 노부인에게 건넸다. 그 모습을 본 노부인은 찻잔을 받아들고 한 모금 마신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너 뭔가 알고 있지? 빨리 얘기해 봐. 조급해 죽겠어.”
오랜 세월 부씨 가문의 안주인으로 살아 온 그녀는 명석한 두뇌를 가진 노인이었다. 남편을 일찍 잃고 아들 내외마저 먼저 떠나보낸 그녀는 홀로 이 큰 가문을 이끌며 수많은 풍파를 겪었다. 나약하고 멍청한 여자였으면 가문은 진작 풍비박산 났을 것이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할머니께선 최신 잡지와 신문을 받아 보셨어요. 좀 이상하지 않아요?”
부태준은 차가운 눈빛으로 담담히 노부인을 마주 보았다. 그 말을 들은 노부인도 문득 수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랬다! 노부인은 이른 아침 누군가로부터 잡지를 받았고, 잡지 표면을 장식한 하초희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래서 한 집사를 시켜 확인차 그녀에게 전화했는데 전화기가 꺼져 있자 불같이 화를 냈다.
하초희가 집에 돌아오자 노인은 분노를 표출하기 급급해서 전혀 수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분노에 이성을 잃었던 것이다.
손자의 말을 듣고 보니 노부인도 누군가의 꿍꿍이일 것 같다는 생각이 확 들었다. 그 사람의 의도는 아마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하초희를 모함해서 부씨 가문에서 쫓겨나게 만들고 싶었거나, 고의로 부씨 가문 명예를 추락시키려는 수작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오해였다고 해도 하초희가 나가서 술을 마시고 외간 남자랑 잠을 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여자의 신분으로 밤중에 나가서 술을 먹는다는 자체를 보수적인 노부인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고 가장 참을 수 없었던 건, 마구 흐트러진 차림새로 호텔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것도 보란 듯이 외간 남자의 셔츠를 입고서!
노부인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만 더 치밀어서 차갑게 코웃음 쳤다.
“흥! 아무리 누군가에게 모함을 당했다고 해도 그건 지가 멍청해서야! 부씨 가문에 들어온 지 이틀 만에 겁도 없이 이런 사고를 저질러? 주제를 몰라도 분수가 있지. 어디 여자가 밤중에 나가서 술을 먹고 돌아다녀! 그리고는 염치도 없이 외간 남자랑 잠이나 자고. 난 절대 이런 여자를 우리 가문에 계속 둘 수 없어. 우리 가문 명성만 떨어뜨릴 뿐이야….”
부태준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존귀하고 자존심 강한 부씨 가문 대표로서 유부녀와 바람난 외간 남자로 오해 받았는데, 기분이 좋으면 이상했다.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남자의 얼굴에 잠깐 분노가 스쳤다. 그는 고개를 숙여 찻잔을 손에 들고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었다.
“그럼 할머니는 그 여자를 내쫓고 싶으신 거죠?”
담담하면서도 위엄 있는 목소리에 마구 욕설을 퍼붓던 노부인도 순간 멈칫했다.
“물론이지!”
하지만 이내 두 눈을 부릅뜨며 대답했다.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그 여자의 잘못도 있었으니까.
남자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유리로 된 찻잔이 탁자와 부딪치며 ‘쨍강’하는 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