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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당신이 안 가지면 누가 가지겠어?

  • “별말 안 했습니다!”
  • 고형준은 쌀쌀맞게 대답했다.
  • 백도희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 이곳에 오래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백도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형준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 “어제 재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 “화장품 갖고 가세요.”
  • 고형준이 명령했다.
  • “아니에요.”
  • “선생님 드리려고 일부러 산 건데, 안 가져가시면 누가 가지겠습니까?”
  • 고형준의 말투는 더욱 싸늘해졌다.
  • 그런 그가 조금 무서워진 백도희는 선물 보따리를 안고 말했다.
  • “돈은 돌아가서 드릴게요, 계좌 주세요.”
  • “돈 있으면 이곳으로 와서 직접 갚으면 됩니다.”
  • 그는 종이에 재빠르게 번호를 적고 백도희에게 건넸다.
  • “오면 저한테 전화 주시면 됩니다.”
  • “네.”
  • 백도희는 공손히 받았다.
  • 고형준은 깊은 눈으로 그녀를 보고는 전화를 걸고 분부했다.
  • “의사 선생님 배웅해드립니다.”
  • 오늘 그녀는 오프였다.
  • 집으로 돌아간 그녀는 선물을 테이블 위에 놓고 옷을 갈아입고 엄마 백도연을 보러 정신병원으로 향했다.
  • 백도연은 이혼당한 후부터 정신질환을 앓다가 5년 전 소욱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고 많이 호전되었다.
  • 하지만 3년 전 백도희가 납치되고, 낯선 남자에게 강간당한 일을 안 백도연은 멘탈이 붕괴되고 사람을 다치게 하여 강제로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병실을 나간 적이 없었다.
  • 백도희는 죄책감을 갖고 병실로 들어갔다.
  • 백도연은 조용히 창가에 앉아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있었다.
  • 백도희는 빗을 들고 그녀의 머리를 빗겨주었다.
  • 백도연이 고개를 돌려 말했다.
  • “우리 딸은 언제 나 보러 오는 거야?”
  • 백도희는 그녀의 머리를 묶어주고 맞은편에 앉아 부드럽게 말했다.
  • “엄마, 나야, 도희.”
  • 백도연은 흠칫 놀라더니 백도희를 훑어보고는 또 그녀의 뒤를 쳐다보며 두려운 듯 말했다.
  • “소욱은? 왜 같이 안 왔어? 너희들 설마 무슨 일 있는 거야?”
  • 백도희는 쓸쓸하게 웃었고 눈 속의 안개는 더욱 자욱해졌다.
  • 당시 백도연은 멘탈이 붕괴된 상태에서 무조건 소욱에게 시집가라고 우겼다. 백도희는 자신의 마음도 잘 추스르지 못하고 소욱과 결혼했다.
  • ‘만약 그때 엄마 정신이 온전하고, 엄마 추억 속에 시달리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몰아붙일 수 있었을까?’
  • “우리 아무 문제 없어요, 나한테 얼마나 잘해주는데. 참, 나 곧 부과장으로 승진해.”
  • 백도희는 웃으며 말했다.
  • “그런데 왜 나 보러 안 오는 거야? 내일 무조건 오라고 해.”
  • 그녀는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다.
  • “내일 출근해야지.”
  • 백도희가 애써 설명했다.
  • 백도연은 딸의 따귀를 때리며 소리쳤다.
  • “다음엔 같이 와, 아니면 나 못 볼 줄 알아, 난 너 같은 딸 없는걸로 생각할거야.”
  • 백도희는 얼굴이 화끈거리며 아파졌고 붉어진 눈으로 백도연을 쳐다보았다.
  • ‘엄마, 폭력성 정신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나 이렇게 때리지 않을 거지? 그렇지?”
  • “응, 알겠어요.”
  • 백도희는 긴 속눈썹으로 눈 속의 물안개를 감추었다.
  • “꺼져. 지금 당장 꺼져, 아니면 죽여 버릴 거야.”
  • 백도연은 흉악하게 말했다.
  • 백도희는 할 수 없이 일어나 부드럽게 말했다.
  • “엄마, 잘 있어, 또 보러 올게.”
  • “꺼져.”
  • 백도희는 몸을 돌려 정신 병원을 나왔고, 고개를 돌려 엄마의 병실을 바라보았다.
  • 고3 때 성적은 좋았지만 집이 가난해서 엄마는 시장 바닥에 앉아 구걸을 해야만 했다.
  • 뜨거운 여름이든 엄동설한이든 꼬박 일 년 동안 무릎을 꿇어 그녀의 대학 등록금을 마련했었다.
  • 그녀는 엄마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 다만, 병이 생겨서, 아프면 정신이 혼란스럽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 그녀는 긴 숨을 들이쉬었다. 엄마가 걱정으로 병세가 악화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 시장에 가서 장을 보고 소욱에게로 향했다.
  • 별장 문 비밀번호는 여전히 19920316, 그녀의 생일이었다.
  • 변하지 않은 비밀번호에 그녀는 다소 위로가 되었다.
  • 채소들을 들고 안으로 들어가니, 방안은 썰렁했고 부엌의 휴지통도 텅 비어있었다. 자주 집에서 밥을 먹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냉장고를 열자, 술이 가득했다. 그리고… 콘돔.
  • 백도희는 순간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고,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에 빠진 것 같았다.
  • 한기가 침투되어 대뇌까지 차가워났다.
  • ‘이미 습관 된 거 아니었어?’
  • 오늘은 검사하러 온 것도 아니고, 옛정을 이야기하려는 것도 아니었고 부탁을 하러 온 것이었다.
  • 백도희는 남은 재료들을 냉장고에 넣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 전에 넣어둔 앞치마를 두르고 채소를 씻고, 썰고, 끓이고…
  •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 그리고 집을 한번 대청소하려고 보니 거실, 주방, 회장실을 제외한 기타 방문들은 모두 굳게 잠겨 있었다, 그들이 살던 새집을 포함해서…
  • 하지만 그녀는 열쇠가 없었다.
  • 백도희는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집 전화기로 소욱에게 전화를 걸었다.
  • 세 번의 연결음 후 소욱은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나야.”
  • 소욱은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비아냥거렸다.
  • “내 집엔 왜 갔어? 외도 현장 잡으러 갔어?”
  • 그의 비꼬아대는 말투에 그녀는 이미 익숙해졌다.
  • “아니, 오늘 휴가야, 당신 저녁밥 준비해놨어.”
  • 백도희는 담담하게 말했다.
  • “누가 너더러 밥을 하래?”
  • 소욱의 목소리는 갑자기 차가워졌다.
  • “하.”
  • 백도희는 가볍게 웃었다.
  • “내가 하라고 했다, 왜.”
  • 그녀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 미간을 찌푸리고 눈에서는 짜증이 가득했다.
  • 하지만 곧바로 후회가 밀려왔다.
  • 그에게 할 부탁이 있으니, 좀 참아야 했었다.
  • “스윽.”
  • 도어락이 열렸고 백도희는 현관 쪽을 바라보았다.
  • 소욱이 걸어 들어왔고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사악하게 웃으며 말했다.
  • “설마 사과하러 온 거야? 이혼하기 싫다고?”
  • 그녀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 “소욱, 이혼은 동의해. 하지만 조건이 있어.”
  • 백도희는 더 이상 참고 싶지 않았다.
  • 소욱이 한 달에 한 번 함께 백도연을 만나러 간다고 약속하면 그를 놓아줄 수 있었다, 그녀 자신도 놓아주고 말이다.
  • 소욱의 눈에서는 날카로운 빛이 스치더니 분노한 얼굴로 죽일 듯이 노려보며 말했다.
  • “내가 어떤 여자 제일 싫어하는지 알아?”
  • 백도희는 조용히 그를 쳐다보았다. 좋은 말을 듣지 못할 거란 걸 잘 알고 있었다.
  • 소욱은 그녀를 위아래로 손가락질하더니 거리낌 없이 말했다.
  • “앞치마 두르고, 슬리퍼 신고 알랑대며 오빠라고 부르는 애들. 네가 나한테 어울려? 나랑 이혼하는데 감히 조건이 있어?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야?”
  • 백도희는 차갑게 말했다.
  • “혼외자가 있다는 사실을 내가 만천하에 알리면, 네 앞길에도 조금 방해가 되는 거 아니야?”
  • “그건 내 자식 아니야, 난 다른 여자 뱃속에 내 씨 같은 거 남기는 사람 아니라고.”
  • 소욱은 자부하며 말했다.
  • “계속 바닷가를 걷는데 어떻게 발이 젖지 않을 수 있겠어. 너랑 이혼할 거야. 앞으로 네가 어떻게 놀든 나랑 상관없으니까, 한 달에 한 번 나랑 우리 엄마 만나러 가줘. 그거면 돼.”
  • 소욱은 비웃었다.
  • “한 달에 한 번,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한 거야? 이딴 꼼수 부리지 마, 나한텐 안 먹혀.”
  • “조건은 이미 말했어, 잘 생각하고 연락 줘.”
  • 백도희는 설명하기도 귀찮아 소파 위의 백을 들고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