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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나에게 있어 당신은 독사, 맹수나 다름없어요

  • 강한 눈빛으로 박력 있게 쏘아붙이는 고형준의 말을 백도희는 결코 거부할 수가 없었고 깜짝 놀란 채 두 눈을 크게 뜨고 벌떡 일어섰다.
  • “이 방, 저한테 잡아준 거 아니었어요?”
  • 당황함과 놀라움이 뒤섞인 어색한 말투로 백도희는 버벅거리며 겨우 말을 했다.
  • “맞습니다.”
  • 여전히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해 안절부절하는 백도희는 안중에도 없는 고형준, 그저 자기 할 말만 짧고 굵게 던지면서 해명이나 변명조차 하지 않으려는 저 뻔뻔한 패기와 유아독존의 카리스마.
  • “도희 씨는 침대에서 자요, 난 소파에서 잘 테니.”
  • ‘아무리 그래도 젊은 남녀가 한 방에서 잠을 잔다는 건 너무 망측한 일 아닌가?’
  • 소욱과도 한 번도 이런 적이 없는 백도희였다. 그녀의 얼굴은 불시에 터진 화산처럼 빨갛고 뜨겁게 후끈후끈 달아올랐으며 머릿속은 하얀 백지장처럼 공백이 되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 “아, 아니, 우린 그저 남사친, 여사친 사이잖아요, 굳이 한 방에서 자는 건 좀 아닌 것 같은데...”
  • 백도희의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고형준은 잔뜩 어둡고 침침해진 두 눈으로 백도희를 쳐다보며 그녀 앞으로 한 발 두 발 다가오기 시작했다.
  • 그 시각 이곳은 군기를 바짝 세워야 할 군대도 아니고, 상하급 계급 색채가 다분한 전쟁터도 아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백도희는 고형준의 카리스마와 기에 자꾸만 눌리고 무작정 제압 당하는 묘하고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 엉거주춤 몸 조차 가누지 못하던 백도희는 슬슬 뒷걸음질 치다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고 고형준은 그녀 앞에 다가와 몸을 아래로 낮추고 한 손으로 소파를 짚고 한 손으로 백도희를 끌어안았다.
  • 서리 내린 늦가을 밤, 찬 바람이 쌩쌩 몰아치는 듯 냉철하면서도 차가운 고형준의 눈빛은 점점 백도희를 옥죄어왔고 백도희는 족쇄에 얽매인 듯 꼼짝달싹 못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닿을 듯 아찔하게, 점점 더 가까워지는 두 사람의 거리, 백도희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고 공포감에 휩싸인 백도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 “왜 이래요?”
  • “내가 독사라도 됩니까? 아니면 맹수에요? 왜 이렇게 바들바들 떨고 있죠?”
  • 백도희의 마음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듯 정곡을 콕 찌르는 고형준의 한마디에 백도희는 해명인 듯 변명인 듯 어색하게 웃으며 버벅거렸다.
  • “그, 그게 아니라!”
  • “그러니까 그게...”
  • 지고무상의 지위와 권력을 거머쥔 남자, 이미 임자가 있는 유부녀인 여자.
  • 어떤 식으로든 엮일 수도 엮여서도 안 되는 두 사람이 지금 이 순간 같은 방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적합하지 않았다.
  • 그러나 해명을 하려 할수록 백도희가 고형준을 못 미더워하고 있다는 메시지만 더 강하게 어필되는 것 같은 거북한 느낌이 다분하게 느껴졌다.
  • 그래서 백도희는 생각을 접었고 해명도 변명도 하지 않으려 했다.
  • “그냥 제가 소파에서 잘게요.”
  • 백도희의 말에 고형준의 바짝 날이 서 있던 눈 빛은 살짝 풀렸지만 별이 총총한 밤하늘 같은 심오함은 여전했다.
  • “방이 하나밖에 안 남아서 그럽니다, 싫으시겠지만 이해 좀 해주십시오, 백도희씨 털끝 하나 건들지 않을 테니까 걱정 붙들어 매시고 그냥 침대에서 주무십시오, 전 소파에서 잘 테니까.”
  • 백도희는 당연히 고형준을 믿는다, 털끝이라도 건드릴 거였으면 진작에 건드렸겠지, 하지만 백도희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 ‘고형준 같은 무결점 완벽남 눈에 과연 나 같은 스타일이 들어오기나 할까?’
  • 고형준은 몸을 일으켜 욕실 쪽으로 걸어가자 백도희는 그제서야 옷이랑 신발 심지어 원피스까지 몽땅 화장실에 두고 나온 사실이 생각나 꺄악 소리를 질렀다.
  • “잠깐만요.”
  • 흔들림 없이 경건한 눈빛으로 백도희를 바라보는 고형준, 순간 고형준은 무슨 생각이라도 들었는지 씨익 웃더니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백도희한테 물었다.
  • “왜요? 샤워라도 시켜주려고요?”
  • 백도희는 머리를 심하게 얻어맞은 듯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남 부러울 것 없는 재벌집 완벽남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 당황하고 놀랄 틈도 없이 백도희는 부랴부랴 고형준 쪽으로 걸어갔다.
  • “아니요, 그럴 리가요, 제 물건들이 아직 안에 있어서 그래요, 정리하고 나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줘요.”
  • 고형준은 백도희의 말을 거부하지 않고 순응했고 백도희는 허겁지겁 욕실로 달려들어가 물건들을 챙기고 나왔다.
  • 급한 마음에 경황이 전혀 없었는지 일회용 슬리퍼가 축축하게 젖는 바람에 촉감이 너무 별로였고 물기에 미끄럽기까지 했다.
  • “앗.”
  • 백도희가 깜짝 놀라 꺄악 비명을 지르며 넘어지려 하자 고형준이 빛의 속도로 달려가 그녀의 팔목을 잡았고 백도희는 고형준의 품에 살포시 안겼다.
  • 걷잡을 수 없이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인데다 두 사람 행동이 과격했던 탓인지 백도희가 걸치고 있던 타월이 스르륵 벗겨졌다. 그녀의 부드럽고 매끈한 살결이 고형준의 손에 적나라하게 닿았고 고형준은 본의 아니게 그 아찔한 촉감을 고스란히 느끼고 말았다.
  • 고형준도 당황했는지 동공에 심한 지진이 일어났고 온몸이 후끈후끈 달아올라 백도희를 뚫어져려 쳐다보았다.
  • 너무도 어색한 이 상황에 백도희는 입을 열수가 없었고 우유 빛깔 부드럽던 피부는 부끄러워 빨갛게 상기 된 그녀의 두 볼처럼 온통 선홍빛 색깔을 띠기 시작했다.
  • “미... 미안해요.”
  • 백도희가 먼저 입을 열자 고형준은 그녀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 손은 놓았지만 방금 전 촉촉하고 부드럽던 촉감은 여전히 손끝에 남아있다. 마치 3 년 전의 그녀처럼 말이다.
  • 백도희는 재빨리 타월을 집어 들어 온몸을 꽁꽁 싸맸다.
  • 그러나 고형준은 전혀 그 자리를 뜰 의도가 없어 보였고 오히려 활활 타오르는 뜨거운 눈 빛을 한 채 사과처럼 빨개진 그녀의 두 볼을 바라보며 한 발 두 발 백도희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 심장은 콩닥콩닥 전혀 주체를 못 하고 마구 나대고 있었으며 백도희는 애써 침착한 척 뒷걸음질 치다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벽면에 등이 닿아 우뚝 멈춰 섰다.
  • 차가운 벽에 몸이 닿아서 였을까? 순간 백도희는 번쩍 정신이 들었다.
  • 그러거나 말거나 고형준은 그녀 앞에 바짝 다가왔다. 한 손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감싸 쥐고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백도희를 내려다보는 고형준의 뜨겁고 강렬한 시선에 백도희는 온몸이 화상을 입은 듯 뜨거워졌다.
  • “왜요? 겁나요?”
  • 고형준의 혼란스러운 눈빛과 중저음 보이스가 숨 막히는 적막을 깨면서 백도희의 고막을 살살 자극했다.
  • 백도희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자 고형준의 눈빛에 심한 어둠이 한 층 서렸다.
  • “나에게 있어 당신이야말로 독사나 맹수와 다름없습니다.”
  • 고형준의 알 수 없는 멘트에 백도희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 ‘무슨 말이지? 내가 싫다는 건가?’
  • 옷을 안 입은 것도, 욕실에 굳이 들어가려는 것도, 넘어진 것도 모두 그녀였고 하필이면 샤워 타월까지 딱 그 타이밍에 떨어지다니, 이런 소름 끼치는 우연이 어디 또 있을까.
  • 기가 막힐 만큼 딱 맞아떨어지는 상황, 이런 걸 두고 미필적 고의라고 하나? 백도희가 고형준이었어도 분명 백도희가 끼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 “미안해요.”
  • 참으로 난감하고 뻘쭘해진 백도희, 그녀는 바들바들 떨며 어찌할 바를 몰라 고개를 푹 떨구고 사과를 했다.
  • 고형준은 그런 백도희를 그윽하게 쳐다보며 중저음의 살짝 거친 보이스로 말했다.
  • “방은 도희 씨가 써요, 제가 나가서 잘게요.”
  • 돌아서는 고형준의 눈빛은 베일을 쓴 듯 아리송하면서도 심오하고, 심지어 신비로운 색채를 띤다.
  • 고형준은 두려웠다, 순간의 감정을 주체 못하고 또다시 3년 전에 그녀에게 했던 그 짓을 반복하게 될까 봐.
  • 3년 전, 그는 약물 효과에 의해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제할 수 없었지만 방금 전엔... 역시 이루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한 충동에 자칫 흔들릴 뻔했다.
  • 2층 로비.
  • 육지은이 고형준 옆에 앉아 우아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고형준에게 차를 따르고 있다.
  • “오빠, 외할머니가 그러는데 고씨 그룹 오빠 거라며? 화요일에 있을 뉴스 시사회는 빠진다 쳐도 만찬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나와야 한다!”
  • 고형준은 그녀의 의도를 불 보듯 뻔하게 잘 알고 있다는 듯 그윽한 눈매로 지은을 쳐다보며 입을 열였다.
  • “만찬은 참석할 수 있어, 그러나 의도가 불순하다면 앞으로 두 번 다시 그런 자리에 나가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 고형준의 정곡을 콕 찌르는 말에 지은은 난감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억지로 해명을 하려 했다.
  • “오빠, 사실 예빈이가 어릴 적부터 오빠를 많이 좋아했어, 과거에 걔가 무슨 짓을 했던 그건 다 오빠를 너무 사랑해서 그럴 수밖에 없어서 그랬던 거야. 외할머니도 그러셨어, 오빠도 이젠 슬슬 혼담이 오갈 나이도 됐고 마침 예빈이는 집안도 학력도 좋고 게다가 능력까지 있으니 오빠의 짝으로는 딱이지. 내일의 만찬은 어찌 보면 당연한 홍문연이 될 수도 있어.”
  • 그 말에 고형준은 피식 코웃음을 치며 손에 들고 있던 찻 잔을 테이블 위에 툭 올려놓고 냉담한 말투로 말했다.
  • “집안 사업을 통째로 놓는 한이 있어도 난 절대 내가 사랑하지 않는 여자랑은 결혼 안 해, 내일 만찬 나는 참석 안 한다.”
  • “그럼 정말 오늘 같이 온 그 여자를 사랑하기라도 하는 거야?”
  • 지은은 고개를 갸우뚱하고 고형준의 속마음을 알려는 의도로 조심스레 물었다.
  • 고형준은 멈칫했다. 칠흑같이 어두운 눈빛은 끝이 안 보이는 심오한 밤바다처럼 알 수 없는 기운을 뿜었고 대체 이 남자가 대체 무슨 생각인지 궁금증만 자아냈다.
  •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 고형준이 물었다.
  • “아니, 그 여자는 너무 약해빠진 것 같아서, 오빠도 알잖아, 할머니가 정한 며느릿감의 기준. 오빠가 지름길 놔두고 굳이 진흙탕길로 가려는 것 같아서 걱정이 돼.”
  • 지은은 근심 어린 말투로 권유하듯 말을 건넸지만 고형준은 오히려 자신감이 넘치는 말투로 씩씩하게 대답했다.
  • “착각하지 마, 내가 좋아하는 여자는 내가 지켜, 그것이 가시밭길이던 진흙탕 길이던 그 어떤 시련도 날 막을 수 없어.”
  • 고형준이 오늘날의 지위와 명성, 그리고 성과를 얻은 건 막강한 집안 배경 때문도 아니고 돈 많은 아빠 빽도 아닌 오로지 자신의 실력으로 쌓아온 것이었다.
  • 지은은 그런 고형준이 자신의 사촌 오빠라는 점이 무척이나 자랑스러웠고 늘 고형준을 우상처럼 우러러보며 숭배해왔다.
  • “오빠가 내 사촌 오빠만 아니었어도 난 아마 예빈이보다 더 오빠를 사랑했을 거야, 아주 미친 듯이,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었을걸?”
  • 지은이 활짝 웃으며 말하자 고형준은 깊은 눈빛과 덤덤한 말투로 대답했다.
  • “싫은 건 어쩔 수 없는거야, 혼자 살지 언정 절대 원치 않는 사랑을 할 수는 없지.”
  • “아이고, 우리 오빠 나중엔 대단한 애처가 되시겠네, 안 봐도 비디오야.”
  • 지은이 한숨을 살짝 쉬더니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 그 순간 고형준의 머릿속에는 백도희의 얼굴과 표정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났고 고형준의 눈빛이 더더욱 심상치 않아졌다.
  • “가서 여자 원피스 한 벌이랑 촉감이 좋은 편한 구두 굽 낮은 걸로 구해와. 내일 상륙전에 보내오면 돼. 그리고... 이불 하나만 가져다줘, 나 오늘 거실에서 잘 거니까.”
  • “왜왜? 설마 그 여자가 오빠 내 쫓은 거야?”
  • 갑자기 훅 들어온 지은의 도발적인 질문, 그녀는 한술 더 떠가며 고형준을 떠보듯이 놀려대고 있다.
  • “우리 오빠의 거친 남성미와 치명적인 매력을 감히 당해낼 여자는 없을 텐데?”
  • “쓸데없는 소리 말고 가서 일 봐.”
  • 그런 지은이 거슬리고 귀찮다는 듯 고형준은 미간을 심하게 찌푸리며 그녀를 밀어냈다.
  • “그래.”
  • 지은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가 사라지지 않은 채 고형준을 한번 슥 쳐다보고는 거실 밖으로 나갔다.
  • 소파에 누운 고형준은 머릿속이 온통 방금 전 욕실에서 발생한 상황들뿐이었다.
  • 눈을 감아도 주마등처럼 스치는 또렷한 기억들, 3년 전 있었던 그 일과 데자뷔처럼 소름 끼치게 딱 맞아떨어진다.
  • 만약 그때, 고형준이 먼저 그녀에게 솔직히 말을 했었더라면 상황이 조금은 달라졌을까?
  • 당시의 고형준은 백도희의 행복을 깨고 싶지 않아서 그런 선택을 한 거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그녀도 딱히 행복해 보이진 않는다는 사실이 너무 괴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