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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맨몸으로 나가줄 테니까 이혼해

  • 그 시각 침대에 누워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도무지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백도희, 잠도 안 오고 무료한 탓에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게임을 하고 있었다.
  • 그러자 마침 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한창 휴대폰 게임에 열을 올리고 있었던 백도희인데 전화가 갑자기 오는 바람에 게임 속 캐릭터가 그만 죽어버리고 말았다.
  • 살짝 분노가 치밀은 백도희는 씩씩거리며 전화를 받았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온 소욱에게 말했다.
  • “아, 왜?”
  • “욱이 오빠, 빨리 와, 나 아직 목말라, 더 해줘!”
  •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여비서의 맹맹한 콧소리가 백도희의 청각을 어지럽힌다.
  • 백도희는 몸을 살짝 떨며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대고 앉아 미심쩍은 목소리로 말했다.
  • “여보세요?”
  • “요망한 것, 대체 뭘 얼마나 더 해줘야 만족할래? 어딜 더 해줄까? 여기?”
  • 이윽고 들려오는 소욱의 목소리, 데시벨이 점점 커지며 쩌렁쩌렁 울린다.
  • “아앙, 그러지 마요, 오빠 나빠!”
  • 여비서는 점점 더 혀 꼬인 말투로 갖은 애교를 다 쏟아붓는다.
  • “나빠? 내가? 그래서 더 해줘 말아?”
  • 굶주린 사자가 허겁지겁 먹잇감을 한 입에 해치우듯 소욱의 숨소리는 점점 더 거칠어져갔고 매혹적인 카리스마를 마구 뿜어댔다.
  • “음...”
  •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점점 더 자극적으로 변해가는 말투와 두 남녀의 은밀한 대화, 백도희는 휴대폰을 꼬옥 부여잡고 굳은 표정으로 음담패설에 가까운 그들의 애정행각을 귀로 똑똑히 듣고 있었다.
  • 길고 가쯘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백도희의 맑고 청아한 두 눈엔 미세한 진동이 감지된다.
  • 마음 한구석은 칼로 생 살을 에는 듯 찌릿찌릿 아파왔고 가까스로 지탱하고 있는 여린 멘탈은 훅 치면 와장창 부서질 것만 같이 너무도 취약해졌다.
  • 분노와 배신감이 무형의 족쇄가 되어 그녀를 서서히 옥죄어왔으며 급기야 호흡곤란을 느낄 정도였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도희는 전화를 끊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 대체 사랑 없이 메마를 대로 메말라버린 이 결혼생활을 억지로 붙잡고 유지하려는 의도는 뭘까? 왜 꼭 유지해야만 하는가?
  • 이 결혼에서 백도희가 얻은 거라곤 끝없는 배신감과 깊을 대로 깊어 이미 곪아버린 상처, 그 이상도 이하도 없다.
  • 행복? 그런 건 애초에 없었다. 한 번도.
  • 이미 벼랑 끝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백도희를 가까스로 지탱하고 있는 유일한 희망이자 동아줄이 있다면 아마 그래도 한때는 좋았던 그 남자와의 추억과 그 남자의 자상함이겠지.
  • 미련하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그나마 남아있는 한 줄기 희망이라도 믿고 억지로 이를 악물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똑똑히, 확실하게 기억해야 했다. 대체 이 남자가 얼마나 잔인한 놈인지를, 소욱의 이름만 들어도 치가 떨리고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하고 미워할 수 있게 말이다.
  • “욱이 오빠, 만약 도희가... 우리 사이를 눈치챈다면 절 가만 안 두겠죠?”
  • 이따금씩 들려오는 여비서의 코맹맹이 소리.
  • “그렇지!”
  • 드넓은 광야에서 마음껏 질주하는 거친 야수처럼 소욱은 으르렁 거렸고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 아니꼬운 말투로 쏘아붙였다.
  • “지금 우리 중요한 일을 하고 있잖아, 이럴 땐 그 여자 얘긴 꺼내지도 마!”
  • “아, 욱이 오빠, 왜 도희 말만 나오면 죽는 건데요? 오빠 미워.”
  • 일부러 소욱을 떠보는 듯한 여비서의 애교 섞인 목소리에도 소욱은 화난 목소리로 한마디 툭 던졌다.
  • “그거 알면 제발 내 앞에서 그 여자 얘긴 꺼내지도 말라고, 괜히 기분만 잡치잖아.”
  • 백도희는 가슴이 미여지듯 아파왔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눈물은 어느새 주르륵 흘러 곱고 뽀샤시한 그녀의 피부를 촉촉하게 적셨다.
  • 아직 그 남자를 사랑해서, 그 남자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가 아닌 과거의 백도희가 너무도 비참하고 불쌍하게 느껴져서 눈물이 한없이 흘렀다.
  •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만큼 최선을 다해 한 사람만 사랑한 대가가 고작 해코지, 배신감 그리고 씻을 수 없는 깊은 상처뿐이라니.
  • 이 상황에서도 여전히 소욱이라는 남자를 믿고 사랑한다면 그녀조차도 그녀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 상대방은 전화를 끊었고 백도희는 천천히 겨우 몸을 침대로 옮겼다.
  • 천장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백도희, 겉은 상처하나 없이 멀쩡한데 마음은 왜 이렇게도 아픈지... 심장 한구석이 찌릿찌릿 통증이 자꾸만 느껴진다, 이미 그녀의 마음은 썩어 갔고 깊게 베인 상처에서는 피가 뚝뚝 흘러 이제 곧 과다출혈이 올 것만 같다.
  • 소욱의 별장.
  • 여비서의 얼굴에는 승자의 여유와 시뚝한 표정이 가득했다.
  • 이것은 그녀가 이미 의도적으로 녹화해 둔 녹음 파일이다.
  • 이제 백도희가 알면 화병에 걸릴 일만 남았다고 판단한 그녀.
  • 그 시각 욕실에서 걸어 나오는 소욱, 실오리 하나 안 걸친 맨몸을 욕실 타월 한 장으로 살짝 감싼 모습이 섹시하면서도 위험해 보인다.
  • 소욱은 자연스럽게 휴대폰을 켜고 통화 기록을 조회하다가 문득 백도희의 이름이 시선을 강탈하자 얼굴색이 급 어두워졌다. 무언가 눈치챈 듯 날카로운 눈초리로 여비서를 쏘아보며 추궁하듯 물어보는 소욱.
  • “네가 그 여자한테 전화한 거야?”
  • 도둑질을 하다 들킨 도둑처럼 여비서는 화들짝 놀라더니 겁에 질려 몸을 파르르 떨며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애원하듯 불쌍한 척 연기를 했다.
  • “욱이 오빠, 용서해줘, 난 그저 도희한테 사과하고 싶어서, 오빠도 알잖아, 만에 하나 백도희가 언론에 대고 내 얘길 나쁘게 하는 날엔 우리 부모님들도 알게 되실 텐데 나더러 얼굴을 어떻게 들고 다니라고 그래?”
  • “너 아직도 전에 그 사람들이랑 연락하고 지내?”
  • 소욱은 어이가 없다는 듯 눈살을 심하게 찌푸렸고 여비서를 쏘아보는 눈빛은 점점 더 차갑고 무서워졌다.
  • “아니야, 절대, 그 무리에서 발을 뺀 지는 한참 됐어, 오빠 만난 뒤로 한 번도 간 적이 없는걸? 나 지금은 정말 손 싹 씻었어, 도희가 가지고 있는 증거 자료들 그거 다 열여덟 철없던 시절에 실수로 잘못을 저지른 거야, 욱이 오빠, 나 좀 살려줘, 나 오빠밖에 없어.”
  • 여비서가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애원했지만 소욱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더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 그는 백도희에게 집으로 오라고 했지만 한참이 지나도 백도희는 집에 도착하지 않았다.
  • 그는 홧 김에 다른 여자를 불러왔고 그는 백도희에게 이미 한이 깊게 맺힐 대로 맺혀 있었던 상태이다.
  • 소욱한테서 걸려온 전화, 백도희는 표정 변화 1도 없이 덤덤하게 전화를 받았다.
  • “너 감히 소혜에 관련된 자료들을 인터넷에 뿌리기만 해봐, 절대 가만 안 둬.”
  • 소욱은 화가 단단히 난 채 경고하듯 백도희에게 심한 말을 내뱉었다.
  • “헐.”
  • 백도희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지만 눈물은 감정을 주체 못하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래도 백도희는 애써 안정을 되찾으며 태연하게 되물었다.
  • “가만 안 두면 어쩔 건데?”
  • “왜? 내 말이 말 같지 않은가 보지? 내 말 한마디면 넌 병원에서 끝장이야, 이 바닥에서 완전히 퇴출 시켜서 의사 노릇도 못하게 만들어줄 수 있어.”
  • 이미 경고를 넘어 협박에 가까워진 소욱의 말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백도희의 마음에 마구 난도질을 해댔다.
  • 아니, 어쩌면 소욱이 한 말은 협박이 아닌 단순히 미래 사실에 대한 서술일 수도 있겠다.
  • 비참함의 끝판왕, 인간 지옥과도 같은 이런 삶을 이제 더 이상 지속하고 싶지 않았다.
  • 그녀에게는 이 시궁창 밑바닥 인생에서 벗어날 수 있는 충분한 권리는 있었다.
  • “소욱 씨, 나 맨몸으로 나갈 테니까 우리 이혼해, 아무런 조건도 없으니까 내일 이혼서류 접수하러 와.”
  • 끊임없는 사상 갈등을 거듭하다 드디어 큰 결심을 내린 백도희, 그 시각만큼은 그녀의 눈빛이 더없이 견고하고 빛이 났다.
  • 그동안 수없이 겁내고 피하려 했던 그 한마디, 정작 입 밖으로 내뱉고 나니 이렇게 후련하고 시원할 줄이야!
  • “지금 뭐라고 했어?”
  • 백도희의 도발적인 행동에 많이 당황했는지 소욱은 헛웃음만 치며 전혀 표정관리를 못하고 있다.
  • ‘이 여자가, 나한테 이혼 통보를 했다?!!!’
  • 과거의 납치 사건이 그가 벌인 자작극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작정 그한테 시집을 가려 했던 백도희였는데, 그런 백도희가 지금은 맨몸으로 나가줄 테니 이혼하자고 한다.
  • “너 대가리에 총 맞았냐?”
  • 소욱은 분노가 폭발해 버럭 화를 냈다.
  • “지금껏 살면서 지금이 가장 침착해, 그리고 너 내가 더럽다고 했지? 그러는 너도 나보다 많이 깨끗한 것 같진 않던데? 아니다, 내 눈엔 네가 더 더러워,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 인간 말종.”
  •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거침없이 걸쭉한 욕을 내뱉는 백도희.
  • “그러는 넌 쓰레기한테 시집왔냐?”
  • 소욱도 한마디도 지려하지 않고 화가 잔뜩 나서 펄쩍 뛰었다. 갈 곳을 잃은 눈 동자는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으며 손등에 있는 핏줄까지 당장 터질 듯 선명하게 드러났다.
  • “나 당신 내연녀한테 납치당해서 겨우 도망 나왔어, 당신이랑 당신 내연녀가 차 안에서 한 그 더러운 짓들 이제야 알았지 뭐야, 이게 다 당신 혼자 쇼 한 거잖아.”
  • 백도희는 또박또박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지만 소욱은 전혀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있었다.
  • “그래도 내 대본엔 네가 딴 놈이랑 자는 시나리오는 없었어.”
  • “네가 날 인적 드문 교외로 납치만 하지 않았어도 애초에 이런 일은 없었어, 아니야? 네 대본엔 없었다 해도 네 내연녀 대본에까지 없었다는 장담은 못 하지, 아까 나 가만 안 둔다는 말 과연 어떻게 가만 안 둘 건지 궁금해지네?!”
  • 백도희의 분노지수도 점점 더 상승해갔고 눈빛은 이글거렸다,
  • “네년이 창녀라서 그래.”
  • 이미 이성을 잃을 대로 잃어 제대로 된 판단이 어려워진 소욱은 분을 참지 못하고 심한 말을 내뱉고 말았다.
  • “그래서 너한테 시집갔잖아, 나에게 끝없는 고통과 상처만 준 건 너야, 그러니까 너도 평생 내 얼굴 보며 미워하고 원망하고 고통받으며 살아.”
  • 백도희도 질세라 강하게 맞섰다.
  • “그럼 그냥 유지하면 되잖아?”
  • 소욱이 차가운 말투로 쏘아붙이듯 말했다.
  • “이제 나 자신을 놓아주려고, 그러니까 앞으로 너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아, 병 걸려도 내 알 바 아니고, 나랑 아무 상관없으니까.”
  • 챙챙한 목소리로 군더더기 없이 중점만 얘기하고 백도희는 전화를 확 끊었다.
  • 한치의 양보도 없는 두 사람의 치열하고 팽팽한 신경전은 백도희의 또박또박 일리 있는 최후의 반격으로 잠시 막을 내렸다.
  • 소욱은 억한 심정을 억누를 길이 없어 애꿎은 휴대폰만 세게 부여잡았다. 어찌나 힘이 강했는지 휴대폰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 옆에서 살살 눈치를 살피던 소혜가 조심스레 물었다.
  • “백도희가 뭐래?”
  • 소욱은 칼날같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혜를 쏘아보았고 두 눈엔 핏기가 잔뜩 서렸다. 당장이라도 모든 걸 태워버리고 집어삼킬 기세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소욱의 눈빛은 보는 이의 마음까지 섬뜩하게 만들었다.
  • 대체 두 사람의 통화에서 백도희는 무슨 말했는지 소혜는 도통 알 길이 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언의 위압감과 공포감만 잔뜩 안겨주는 소욱에게 지레 겁을 먹은 소혜는 손톱만 깨물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 “너 대체 백도희한테 뭐라고 지껄인 거야?”
  • 소혜를 쏘아보는 소욱의 눈빛, 당장이라도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불 화산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