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각 침대에 누워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도무지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백도희, 잠도 안 오고 무료한 탓에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마침 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한창 휴대폰 게임에 열을 올리고 있었던 백도희인데 전화가 갑자기 오는 바람에 게임 속 캐릭터가 그만 죽어버리고 말았다.
살짝 분노가 치밀은 백도희는 씩씩거리며 전화를 받았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온 소욱에게 말했다.
“아, 왜?”
“욱이 오빠, 빨리 와, 나 아직 목말라, 더 해줘!”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여비서의 맹맹한 콧소리가 백도희의 청각을 어지럽힌다.
백도희는 몸을 살짝 떨며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대고 앉아 미심쩍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세요?”
“요망한 것, 대체 뭘 얼마나 더 해줘야 만족할래? 어딜 더 해줄까? 여기?”
이윽고 들려오는 소욱의 목소리, 데시벨이 점점 커지며 쩌렁쩌렁 울린다.
“아앙, 그러지 마요, 오빠 나빠!”
여비서는 점점 더 혀 꼬인 말투로 갖은 애교를 다 쏟아붓는다.
“나빠? 내가? 그래서 더 해줘 말아?”
굶주린 사자가 허겁지겁 먹잇감을 한 입에 해치우듯 소욱의 숨소리는 점점 더 거칠어져갔고 매혹적인 카리스마를 마구 뿜어댔다.
“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점점 더 자극적으로 변해가는 말투와 두 남녀의 은밀한 대화, 백도희는 휴대폰을 꼬옥 부여잡고 굳은 표정으로 음담패설에 가까운 그들의 애정행각을 귀로 똑똑히 듣고 있었다.
길고 가쯘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백도희의 맑고 청아한 두 눈엔 미세한 진동이 감지된다.
마음 한구석은 칼로 생 살을 에는 듯 찌릿찌릿 아파왔고 가까스로 지탱하고 있는 여린 멘탈은 훅 치면 와장창 부서질 것만 같이 너무도 취약해졌다.
분노와 배신감이 무형의 족쇄가 되어 그녀를 서서히 옥죄어왔으며 급기야 호흡곤란을 느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도희는 전화를 끊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체 사랑 없이 메마를 대로 메말라버린 이 결혼생활을 억지로 붙잡고 유지하려는 의도는 뭘까? 왜 꼭 유지해야만 하는가?
이 결혼에서 백도희가 얻은 거라곤 끝없는 배신감과 깊을 대로 깊어 이미 곪아버린 상처, 그 이상도 이하도 없다.
행복? 그런 건 애초에 없었다. 한 번도.
이미 벼랑 끝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백도희를 가까스로 지탱하고 있는 유일한 희망이자 동아줄이 있다면 아마 그래도 한때는 좋았던 그 남자와의 추억과 그 남자의 자상함이겠지.
미련하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그나마 남아있는 한 줄기 희망이라도 믿고 억지로 이를 악물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똑똑히, 확실하게 기억해야 했다. 대체 이 남자가 얼마나 잔인한 놈인지를, 소욱의 이름만 들어도 치가 떨리고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하고 미워할 수 있게 말이다.
“욱이 오빠, 만약 도희가... 우리 사이를 눈치챈다면 절 가만 안 두겠죠?”
이따금씩 들려오는 여비서의 코맹맹이 소리.
“그렇지!”
드넓은 광야에서 마음껏 질주하는 거친 야수처럼 소욱은 으르렁 거렸고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 아니꼬운 말투로 쏘아붙였다.
“지금 우리 중요한 일을 하고 있잖아, 이럴 땐 그 여자 얘긴 꺼내지도 마!”
“아, 욱이 오빠, 왜 도희 말만 나오면 죽는 건데요? 오빠 미워.”
일부러 소욱을 떠보는 듯한 여비서의 애교 섞인 목소리에도 소욱은 화난 목소리로 한마디 툭 던졌다.
“그거 알면 제발 내 앞에서 그 여자 얘긴 꺼내지도 말라고, 괜히 기분만 잡치잖아.”
백도희는 가슴이 미여지듯 아파왔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눈물은 어느새 주르륵 흘러 곱고 뽀샤시한 그녀의 피부를 촉촉하게 적셨다.
아직 그 남자를 사랑해서, 그 남자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가 아닌 과거의 백도희가 너무도 비참하고 불쌍하게 느껴져서 눈물이 한없이 흘렀다.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만큼 최선을 다해 한 사람만 사랑한 대가가 고작 해코지, 배신감 그리고 씻을 수 없는 깊은 상처뿐이라니.
이 상황에서도 여전히 소욱이라는 남자를 믿고 사랑한다면 그녀조차도 그녀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상대방은 전화를 끊었고 백도희는 천천히 겨우 몸을 침대로 옮겼다.
천장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백도희, 겉은 상처하나 없이 멀쩡한데 마음은 왜 이렇게도 아픈지... 심장 한구석이 찌릿찌릿 통증이 자꾸만 느껴진다, 이미 그녀의 마음은 썩어 갔고 깊게 베인 상처에서는 피가 뚝뚝 흘러 이제 곧 과다출혈이 올 것만 같다.
소욱의 별장.
여비서의 얼굴에는 승자의 여유와 시뚝한 표정이 가득했다.
이것은 그녀가 이미 의도적으로 녹화해 둔 녹음 파일이다.
이제 백도희가 알면 화병에 걸릴 일만 남았다고 판단한 그녀.
그 시각 욕실에서 걸어 나오는 소욱, 실오리 하나 안 걸친 맨몸을 욕실 타월 한 장으로 살짝 감싼 모습이 섹시하면서도 위험해 보인다.
소욱은 자연스럽게 휴대폰을 켜고 통화 기록을 조회하다가 문득 백도희의 이름이 시선을 강탈하자 얼굴색이 급 어두워졌다. 무언가 눈치챈 듯 날카로운 눈초리로 여비서를 쏘아보며 추궁하듯 물어보는 소욱.
“네가 그 여자한테 전화한 거야?”
도둑질을 하다 들킨 도둑처럼 여비서는 화들짝 놀라더니 겁에 질려 몸을 파르르 떨며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애원하듯 불쌍한 척 연기를 했다.
“욱이 오빠, 용서해줘, 난 그저 도희한테 사과하고 싶어서, 오빠도 알잖아, 만에 하나 백도희가 언론에 대고 내 얘길 나쁘게 하는 날엔 우리 부모님들도 알게 되실 텐데 나더러 얼굴을 어떻게 들고 다니라고 그래?”
“너 아직도 전에 그 사람들이랑 연락하고 지내?”
소욱은 어이가 없다는 듯 눈살을 심하게 찌푸렸고 여비서를 쏘아보는 눈빛은 점점 더 차갑고 무서워졌다.
“아니야, 절대, 그 무리에서 발을 뺀 지는 한참 됐어, 오빠 만난 뒤로 한 번도 간 적이 없는걸? 나 지금은 정말 손 싹 씻었어, 도희가 가지고 있는 증거 자료들 그거 다 열여덟 철없던 시절에 실수로 잘못을 저지른 거야, 욱이 오빠, 나 좀 살려줘, 나 오빠밖에 없어.”
여비서가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애원했지만 소욱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더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백도희에게 집으로 오라고 했지만 한참이 지나도 백도희는 집에 도착하지 않았다.
그는 홧 김에 다른 여자를 불러왔고 그는 백도희에게 이미 한이 깊게 맺힐 대로 맺혀 있었던 상태이다.
소욱한테서 걸려온 전화, 백도희는 표정 변화 1도 없이 덤덤하게 전화를 받았다.
“너 감히 소혜에 관련된 자료들을 인터넷에 뿌리기만 해봐, 절대 가만 안 둬.”
소욱은 화가 단단히 난 채 경고하듯 백도희에게 심한 말을 내뱉었다.
“헐.”
백도희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지만 눈물은 감정을 주체 못하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래도 백도희는 애써 안정을 되찾으며 태연하게 되물었다.
“가만 안 두면 어쩔 건데?”
“왜? 내 말이 말 같지 않은가 보지? 내 말 한마디면 넌 병원에서 끝장이야, 이 바닥에서 완전히 퇴출 시켜서 의사 노릇도 못하게 만들어줄 수 있어.”
이미 경고를 넘어 협박에 가까워진 소욱의 말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백도희의 마음에 마구 난도질을 해댔다.
아니, 어쩌면 소욱이 한 말은 협박이 아닌 단순히 미래 사실에 대한 서술일 수도 있겠다.
비참함의 끝판왕, 인간 지옥과도 같은 이런 삶을 이제 더 이상 지속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이 시궁창 밑바닥 인생에서 벗어날 수 있는 충분한 권리는 있었다.
“소욱 씨, 나 맨몸으로 나갈 테니까 우리 이혼해, 아무런 조건도 없으니까 내일 이혼서류 접수하러 와.”
끊임없는 사상 갈등을 거듭하다 드디어 큰 결심을 내린 백도희, 그 시각만큼은 그녀의 눈빛이 더없이 견고하고 빛이 났다.
그동안 수없이 겁내고 피하려 했던 그 한마디, 정작 입 밖으로 내뱉고 나니 이렇게 후련하고 시원할 줄이야!
“지금 뭐라고 했어?”
백도희의 도발적인 행동에 많이 당황했는지 소욱은 헛웃음만 치며 전혀 표정관리를 못하고 있다.
‘이 여자가, 나한테 이혼 통보를 했다?!!!’
과거의 납치 사건이 그가 벌인 자작극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작정 그한테 시집을 가려 했던 백도희였는데, 그런 백도희가 지금은 맨몸으로 나가줄 테니 이혼하자고 한다.
“너 대가리에 총 맞았냐?”
소욱은 분노가 폭발해 버럭 화를 냈다.
“지금껏 살면서 지금이 가장 침착해, 그리고 너 내가 더럽다고 했지? 그러는 너도 나보다 많이 깨끗한 것 같진 않던데? 아니다, 내 눈엔 네가 더 더러워,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 인간 말종.”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거침없이 걸쭉한 욕을 내뱉는 백도희.
“그러는 넌 쓰레기한테 시집왔냐?”
소욱도 한마디도 지려하지 않고 화가 잔뜩 나서 펄쩍 뛰었다. 갈 곳을 잃은 눈 동자는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으며 손등에 있는 핏줄까지 당장 터질 듯 선명하게 드러났다.
“나 당신 내연녀한테 납치당해서 겨우 도망 나왔어, 당신이랑 당신 내연녀가 차 안에서 한 그 더러운 짓들 이제야 알았지 뭐야, 이게 다 당신 혼자 쇼 한 거잖아.”
백도희는 또박또박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지만 소욱은 전혀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내 대본엔 네가 딴 놈이랑 자는 시나리오는 없었어.”
“네가 날 인적 드문 교외로 납치만 하지 않았어도 애초에 이런 일은 없었어, 아니야? 네 대본엔 없었다 해도 네 내연녀 대본에까지 없었다는 장담은 못 하지, 아까 나 가만 안 둔다는 말 과연 어떻게 가만 안 둘 건지 궁금해지네?!”
백도희의 분노지수도 점점 더 상승해갔고 눈빛은 이글거렸다,
“네년이 창녀라서 그래.”
이미 이성을 잃을 대로 잃어 제대로 된 판단이 어려워진 소욱은 분을 참지 못하고 심한 말을 내뱉고 말았다.
“그래서 너한테 시집갔잖아, 나에게 끝없는 고통과 상처만 준 건 너야, 그러니까 너도 평생 내 얼굴 보며 미워하고 원망하고 고통받으며 살아.”
백도희도 질세라 강하게 맞섰다.
“그럼 그냥 유지하면 되잖아?”
소욱이 차가운 말투로 쏘아붙이듯 말했다.
“이제 나 자신을 놓아주려고, 그러니까 앞으로 너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아, 병 걸려도 내 알 바 아니고, 나랑 아무 상관없으니까.”
챙챙한 목소리로 군더더기 없이 중점만 얘기하고 백도희는 전화를 확 끊었다.
한치의 양보도 없는 두 사람의 치열하고 팽팽한 신경전은 백도희의 또박또박 일리 있는 최후의 반격으로 잠시 막을 내렸다.
소욱은 억한 심정을 억누를 길이 없어 애꿎은 휴대폰만 세게 부여잡았다. 어찌나 힘이 강했는지 휴대폰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옆에서 살살 눈치를 살피던 소혜가 조심스레 물었다.
“백도희가 뭐래?”
소욱은 칼날같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혜를 쏘아보았고 두 눈엔 핏기가 잔뜩 서렸다. 당장이라도 모든 걸 태워버리고 집어삼킬 기세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소욱의 눈빛은 보는 이의 마음까지 섬뜩하게 만들었다.
대체 두 사람의 통화에서 백도희는 무슨 말했는지 소혜는 도통 알 길이 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언의 위압감과 공포감만 잔뜩 안겨주는 소욱에게 지레 겁을 먹은 소혜는 손톱만 깨물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