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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오늘 밤은 여기서 잘게요!

  • 그녀의 패배!
  • 사랑이라는 게임에서 진심을 쏟아 올인하는 자가 곧 패배자가 되는 법이며 한때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만큼 그 남자를 미친 듯이 사랑했던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 소예빈은 자신이 이겼다는 것에 만족하며 턱을 한껏 올리고 백도희를 벌레보듯 쏘아보며 비아냥댔다.
  • “약속대로 알몸으로 춤 출래요? 아니면 고형준한테서 떨어질래요? 선택은 본인이 하세요, 백도희씨가 염치가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너무 궁금한데요?”
  • “그만해, 소예빈, 네가 마음대로 걸고 내기할 수 있을 만큼 내가 만만해?”
  • 고형준이 얼른 나서서 소예빈을 막으려 하자 그녀는 살기 어린 두 눈을 부릅뜨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 “내기를 했으면 승패는 과감히 인정해야지.”
  • “만약 내가 졌으면 난 진짜로 갑판 위에 올라가서 난 고형준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큰 소리로 외칠 수 있어, 오빠, 나도 제발 내가 오빠를 사랑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백도희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 그렇다, 고형준을 사무치게 사랑하는 동시에 소예빈은 너무 고형준한테 빠져있는 자신이 미울 만큼 고형준을 사랑하고 싶지 않아 한다.
  • “춤 출게요.”
  • 백도희가 담담하게 한마디 하자 소예빈은 이때다 싶어 디제이한테 큰 소리로 주문을 내렸다.
  • “뮤직, 큐!”
  • 경쾌한 음악이 울리고 백도희는 무대로 올라가 음악에 맞춰 요염하고 아름다운 자태로 춤을 추었다, 마치 세상의 중심에 혼자 서 있는 사람처럼 무아지경으로 말이다.
  • 사실상 그녀는 세상에 의지할 곳 하나 없는 처량한 홀몸이 맞기는 하다.
  •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을 싫어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글쎄? 과연 어디에 있을까?
  • “옷 벗어.”
  • 백도희 괴롭히기에 한창 열이 오른 소예빈은 꺅꺅 부르짖었고 어찌나 아우성을 질렀는지 표정이 다 일그러질 정도였다.
  • 무대에 선 백도희는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 ‘그래, 다행히 자존심은 지켰으니 그걸로 됐어.’
  • 백도희는 소예빈같은 처지가 되기는 싫었으며 천천히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었다.
  • 여리여리하지만 예쁘게 각 잡힌 새하얀 쇄골부터 연예인 뺨치는 개미허리가 드러나면서 춤을 추는 그녀의 자태는 더더욱 매력적이고 아름다웠다. 때로는 요염하게, 때로는 귀엽게 다양한 콘셉트를 동시에 소화하며 백도희는 화려하고 현란한 춤 솜씨를 자랑했다.
  •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그런 백도희의 모습에 깜짝 놀랐으며 고형준마저 입이 떡 벌어진 채 백도희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 ‘백도희가 이 정도로 섹시퀸이었던가? 이 정도로 춤 실력이 뛰어난 여자였던가?’
  • 그 시각 남자들은 먹잇감을 도사리는 굶주린 늑대들처럼 침을 질질 흘리며 백도희를 쳐다보고 있었다.
  • 그러자 고형준은 미간을 심하게 좁히더니 소준호에게 말했다.
  • “소준호, 예빈이 데리고 여기서 나가.”
  • 제대로 날을 잡았다 싶었던 소예빈, 이참에 백도희한테 제대로 망신살을 주고 싶었지만 어떻게 된 게 백도희만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자 괜히 죽 쒀서 개 준 격이 된 것이다.
  • 고형준은 입고 있던 정장을 벗더니 백도희의 몸에 걸쳐주고 탐욕스럽고 징그러운 남정네들의 눈빛 속에서 백도희를 지켜내려 했다.
  • 비온 뒤 맑은 하늘에 싱긋하게 퍼지는 아름다운 이슬 향기처럼 백도희의 몸에서 퍼지는 청아하고 은은한 향은 고형준의 코를 부드럽게 자극했다.
  • “헤헤, 헤헤.”
  • 정신줄을 반 놓은 듯 백도희는 입을 헤벌리고 동네 바보처럼 웃음을 터뜨렸고 그녀의 눈빛에는 감출 수 없는 서러움과 서글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과연 이렇게까지 했어야 할까? 백도희의 맑고 투명한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당장이라도 쏟아질 것만 같았다.
  • “나 지금 되게 바보 같고 멍청하죠?”
  • 고형준은 일말의 감정도 없는 경건한 표정으로 백도희에게 물었다.
  • “내가 도희 씨를 사랑하길 원합니까?”
  • “네?”
  • 갑작스레 훅 들어오는 고형준의 공격 아닌 공격에 순간 백도희는 헛것이라도 들렸나 싶어 고형준을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 ‘그래, 분명 잘못 들은 거겠지.’
  • 고형준은 별다른 추가 멘트 없이 백도희를 부추기고 가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도희 씨 취했습니다.”
  • 그러자 백도희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두 눈을 살짝 내렸다.
  • ‘그래, 취했겠지...’
  • 얼마나 지났을까? 두 사람은 어느새 2층에 도착했고 고형준은 백도희에게 방 키 하나를 건넸다.
  • “오늘 밤은 이 방에서 자요.”
  • “집에 안 가요? 내일 일찍 출근해야 하는데.”
  • 백도희가 걱정 어린 말투로 말하자 고형준은 그녀를 다독이며 안심시켰다.
  • “내일 아침에 부두로 가게 되면 바로 도희 씨를 병원으로 모시고 갈 겁니다. 절대 지각하는 일 없을 테니 염려 마십시오.”
  • 고형준이 이렇게까지 나오자 백도희도 너무 매몰차게 거절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그의 말에 순응했다, 필경 요트를 운전하는 사람은 본인이 아니니까.
  • “고마워요.”
  • 백도희는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몸을 돌려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 빨갛게 멍이 들어버린 발뒤축을 보더니 백도희는 괴로운 듯 미간을 심하게 좁혔고 이렇게까지 자신이 처량하고 가련해 보이긴 처음이었다.
  • 백도희는 이내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가 소파에 걸터앉아 구두를 벗었다.
  • 유진한테서 빌려온 구두가 너무 딱딱해서 발뒤축이 빨갛게 멍이 들고 껍질까지 벗겨졌다.
  • 받으면 안 되는 구두였다.
  • 몸에는 온통 술 냄새가 진동했다.
  • ‘내일 출근도 해야 하는데.’
  • 백도희는 일회용 슬리퍼로 갈아 신고 욕실로 들어가 머리를 감고 샤워를 했다. 그러고는 겉옷부터 속옷까지 모조리 빨아 화장실에 말려놓고 욕실 타월을 몸에 걸치고 나갔다.
  • 고형준은 소파에 앉아 백도희를 기다리고 있었고 소파 앞에 놓여있는 약 상자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 백도희가 나온 걸 눈치채고 고형준은 고개를 돌려 타월 한 장만 걸친 채 여리여리하고 가냘픈 쇄골이 그대로 드러난 백도희의 모습을 보았다.
  • 엉덩이 바로 밑까지 아슬아슬하게 덮은 타월, 길고 쫙 빠진 모델 다리가 유독 시선을 강탈하며 아찔한 그녀의 몸매 라인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 고형준을 보자 백도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 타월 한 장만 딸랑 걸친 채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 “형준 씨가 왜 여기 있어요?”
  • 놀라서 긴장한 탓에 목소리마저 파르르 떨리는 백도희.
  • “이리 오세요.”
  • 대답 대신 짧고 굵은 명령조로 백도희를 오라고 하는 고형준이었다.
  • “그게... 제가 옷을 다 빨아서 좀 불편하네요.”
  • 이 상황이 너무 당혹스러운 듯 백도희는 어색한 목소리와 말투로 버벅대며 겨우겨우 말을 이어갔다. 고형준은 그런 그녀의 태도가 썩 내키지 않았는지 살짝 화가 섞인 말로 따지듯이 말했다.
  • “대체 뭘 걱정하는 겁니까? 그냥 좀 오세요.”
  • 본인은 그저 단순히 이쪽으로 오라는 의미였건만 정작 백도희는 이런저런 걱정이 앞서 지레 방패를 삼는 모습을 보며 고형준의 말투에는 거부할 수 없는 강렬한 카리스마와 불만이 살짝 섞여있었다.
  • 백도희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고형준 앞으로 다가가서 들릴락 말락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 “제가 좀 피곤해서 쉬고 싶어요!”
  • 여전히 우물쭈물 어찌할 바를 모르는 백도희와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 멋대로 약 상자에서 소독용 알코올과 밴드를 꺼내드는 고형준.
  • “이리 와서 앉아요.”
  • 고형준은 고개를 들어 백도희를 쳐다보지도 않고 밴드를 개봉해 테이블 위에 턱 올려놓았다. 선한 카리스마에서 느껴지는 꽤 그럴듯하게 따스한 배려,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츤드레?
  • 고형준의 의도를 알아차린 백도희는 마음속이 한결 가벼워졌으며 따스한 난류가 스며들듯 포근한 배려를 느꼈다.
  • “안 그러셔도 돼요, 저 혼자 할 수 있는데...”
  • 백도희는 쑥스러운 듯 고개를 살짝 숙이고 과즙미 팡팡 터지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했다.
  • 청순가련에 천생 여자 이미지이지만 알고 보면 고집불통인 백도희, 더 이상 이 여자한테는 명령도 권유도 통하지 않을 거라 판단한 고형준, 그는 단념이라도 한 듯 백도희의 손을 잡아끌어 강제로 옆에 앉혔다.
  • 백도희가 휘청거리며 몸의 평형을 잡지 못하자 고형준은 아예 그녀의 발을 번쩍 들어 올려 자신의 허벅지 위에 털썩 올려놓았다. 군더더기 1도 없이 깔끔하면서도 박력 있는 고형준의 행동, 역시 고형준 다운 선한 카리스마가 돋보였다.
  • 백도희는 놀란 아기 토끼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 ‘타월 한장 외엔 아무것도 안 입었는데, 이러다 다 보이면 어떡하지?’
  • 백도희는 잽싸게 두 다리에 힘을 꾹 주며 살결이 드러날까 딱 버티고 있었다.
  • 고형준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듯 여전히 덤덤하면서도 현란한 손짓으로 소독용 알코올을 꺼내 백도희의 상처에 살살 발라주었다.
  • 귀한 보석을 다루듯 살살 어루만지며 부드럽게 케어하는 고형준, 평소 박력 있고 카리스마 넘치던 인상과는 사뭇 다른 새로운 모습이다.
  • 껍질이 벗겨져 빨갛게 된 발에 알코올을 바르면서도 백도희는 통증을 전혀 느끼지 못했고 오히려 고형준의 부드러운 케어에 기분이 좋아졌다.
  • “그 구두 너무 딱딱한 것 같네요, 앞으론 신지 마세요.”
  • 고형준이 걱정 반 충고 반으로 말을 하자 백도희는 알았다며 순응했다.
  • “저쪽 발도 가져와요.”
  • 고형준은 중저음의 낮은 목소리로 말했고 백도희는 몸을 억지로 한 쪽으로 살짝 돌려 어정쩡하게 다른 발을 건넸다.
  • 이상하리만큼 거북한 백도희의 행동이 눈에 거슬렸는지 고형준은 아예 그녀의 발목을 손으로 꽉 부여잡았고 백도희는 나지막하게 아차 소리를 질렀다.
  • 순간 고형준의 눈빛이 백도희의 그곳에 떨어졌다... 세상에나...
  • 그가 보았다.
  • 단 0.1초의 짧디짧은 순간이지만 고형준이 본 건 확실하다.
  • 백도희의 얼굴은 제대로 무르익은 제철 사과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 ‘설마 정말 본 건 아니겠지? 진짜 봤으면 어떡하지?’
  • 백도희는 얼굴을 한 쪽으로 돌려 눈을 질끈 감았고 도저히 고형준과 눈을 마주칠 용기가 나지 않았다.
  • 그러자 고형준은 어험 기침을 살짝 하더니 고개를 숙이고 계속해서 백도희의 상처에 소독을 해주고 있었다.
  • 한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어색하고 아찔한 적막이 온 방안을 꽉 채웠다.
  • 어쩐지 꽁냥꽁냥 서로 열애 중인 커플의 핑크빛 기류가 감돌면서 두 사람은 서로 애꿎은 입술만 질근질근 깨물며 어린 소년 소녀처럼 쑥스러워했다.
  • “아직이에요?”
  • 어색한 침묵이 싫어서였을까?
  • 간질간질 핑크빛 기류가 부끄러워서 였을까?
  • 백도희가 재촉하듯 먼저 말을 걸었고 고형준은 그런 그녀의 발목을 더 세게 부여잡으며 말했다.
  • “움직이지 마세요.”
  • 텐션이 한결 낮아진 그 남자의 살짝 쉰 목소리, 걸걸한 보이스에서 뿜어져 나오는 진하고 섹시한, 아니, 어쩌면 위험할 수도 있는 남성호르몬의 냄새에 무아지경으로 빠져들 것만 같다.
  • “이제 하선하고 나면 형준 씨랑 수장님 더 이상 볼일 없는 거죠?”
  • 백도희가 조심스레 묻자 고형준의 동공에 살짝 지진이 일어난 듯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 “도희 씨가 만나기 싫다면 앞으로 영영 볼일 없을 겁니다.”
  •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은 했지만 사실 고형준의 말은 앞뒤가 참 안 맞는 구석이 없지 않아 있었다. 백도희가 만나기 싫다면? 그런 말은 없었다.
  • 그럼 말을 바꿔서 백도희가 만나고 싶어 한다면? 만나길 원한다면 계속 만날 수는 있는 건가?
  • 설사 만난다고 해도 대체 어떤 신분과 명목으로 만나야 한단 말인가?
  • 필경 이들은 서로 다른 세계와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 서로에게 있어 서로의 존재란 그저 긴 인생의 한 페이지를 꾸며줄 따스하지만 잠깐이면 사라지는 행복이자 스쳐지나는 인연인데.
  • 오늘 밤만 지나면 그녀는 정상적인 삶의 패턴으로 돌아갈 것이다.
  • “네.”
  • 백도희는 별다른 멘트 없이 네라는 한 글자만 뱉었지만 그 속에 숨겨진 건 앞으로 다신 보지 말자고 확실하게 쐐기를 박는 의미였다.
  • 그 말에 고형준의 낯색이 급 어두워지면서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 상처를 보듬어주고 밴드까지 붙여준 뒤 백도희가 발을 거두기도 전에 고형준은 이미 벌떡 일어섰다.
  • 백도희를 내려다보는 고형준의 눈빛은 이례적으로 깊고 심오했으며 원망과 분노가 미세하게 섞여있었다. 그 순간 고형준이 퉁명스럽게 건넨 한마디.
  • “나 오늘 여기서 잘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