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 낯이 익은 검은색 차량, 차 문이 쓱 내려지더니 나태한 눈빛과 늠름한 표정의 고형준이 얼굴을 삐쭉 내밀고는 턱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을 건넸다.
“타십시오.”
군더더기 없이 짧고 굵은 그 남자의 한 마디, 욕이 한 글자도 들어가지 않은 차분한 말투였지만 그것은 분명 누구든 감히 거역할 수 없는 강력한 명령조였다.
백도희는 살짝 거리낌을 느끼며 이내 차 문을 열고 조수석에 올라탔다.
백도희가 차에 오른 뒤에도 두 사람은 서로 자리에 앉아있기만 할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백도희는 지독한 적막이 맴도는 차 안 분위기에 숨이 턱턱 막히는 것만 같았다.
“저, 돈은 어떻게 드릴까요?”
어색하고 딱딱한 분위기를 만회하려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모르던 백도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 백도희와는 달리 고형준은 그녀한테 제대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초점을 잃은 채 앞만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의 눈 빛과 표정에서는 일말의 감정조차 읽을 수 없을 만큼 차가운 기운이 맴돌았다. 세상 만물을 모조리 얼려버릴 것만 같이 냉철하게 굳어버린 표정을 한 채 고형준은 백도희의 말을 차갑게 받아쳤다.
“난 뇌물 같은 거 안 받습니다.”
그러자 살짝 당황한 듯 백도희가 버벅거리며 해명 아닌 해명을 했다.
“이건 고형준 씨가 준 화장품 값이 아니고요.”
“화장품이 마음에 안 드시면 그냥 버리세요.”
여전히 서늘한 눈 빛, 늘 그랬듯이 온기 없는 차가운 말투로 일관하는 이 남자.
그것은 농담이 아닌 백 프로 진심이었다.
백도희는 사람 등골을 시리게 만드는 고형준을 보며 기분이 찜찜하고 언짢았으며 고형준 특유의 사나운 횡포가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러시면 저 곤란해요, 제가 뭐라고 고형준 씨한테서 공짜로 물건을 받겠어요? 우리 아무 사이도 아닌데 이건 좀 아닌 것 같네요.”
백도희의 말에 고형준은 심오한 눈 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대답 대신 오히려 되물었다.
“그러는 도희 씨는 우리가 무슨 사이길 바랍니까?”
“...”
훅 들어온 고형준의 역 질문에 말문이 턱 막혀 아무 말도 못 하는 백도희였다. 어쩐지 고형준의 말투에서 꽁냥꽁냥 썸을 타는 예비 커플 같은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럴수록 그녀는 반갑거나 설레기는커녕 오히려 고형준을 밀어내고 싶어졌다.
“전 이미 남편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걸 누가 모릅니까?”
백도희의 답변에도 고형준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앞을 보며 운전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알듯 말듯 자꾸만 아리송한 말만 하는 고형준,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결론은 나지 않았고 오히려 짜증만 쌓여 혈압이 높아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백도희도 굳이 대꾸하지 않고 착잡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저 좀 도와주십시오.”
그러자 고형준이 굵고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엔 질문이 아닌 서술문이었지만 백도희는 그래도 아무 대답 안 하고 입만 삐쭉 내밀었다.
“무슨 일인지 안 물어봅니까?”
고형준은 곁눈질로 그녀를 흘겨보며 물었다.
“절 부르셨다는 건 제가 확실히 도움이 된다는 의미겠죠, 그저께 일은 다 기억이 나는 건 아니지만 그쪽이 절 도와주셨다는 건 사실인 것 같으니 저도 당연히 도움을 드려야죠.”
백도희는 고형준의 제의에 흔쾌히 승낙했다.
다만 고형준 씨가 아닌 “그 쪽”이라는 호칭을 쓰니 순간 두 사람 사이가 엄청나게 멀게 느껴졌다.
“제 여자친구가 되어주십시오.”
그의 말에 백도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형준을 빤히 쳐다보았다,
‘일반적인 상상을 뒤엎는 폭탄 발언을 이렇게 스스럼없이 내 뱉는다고? 그것도 세상 차분하고 담담한 말투로?’
“가짜 여자친구 말입니다.”
고형준은 백도희를 지긋이 바라보더니 한 마디 더 했다.
“모임에 같이 참석해 주십시오.”
“유부녀의 몸으로 누군가의 가짜 여자친구 행세를 하는 건 좀 아니라고 보는데요?”
예고 없이 훅 들어온 고형준의 제안에 백도희는 자신이 유부녀임을 강조하며 제법 잘 받아쳤고 고형준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끝이 안 보이는 넓고 푸른 바다, 망망대해같이 전혀 감이 안 잡히는 고형준의 표정은 오늘따라 더욱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더 믿고 맡기는 겁니다, 유부녀니까 딴맘 먹는 일은 없을 테니까, 안 그렇습니까?”
고형준의 참으로 그럴싸한 답변에 백도희는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해 잠시 멈칫했다.
고형준은 유부녀한테 딴 맘먹을 만큼 비겁한 남자는 아니었다, 정말 그가 그런 사람이었다면 두 사람은 어제 이미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을 것이다...
백도희는 할 말이 있는 듯 마른 기침을 몇 번 하더니 마치 무슨 생각에 잠긴 듯했다.
이때, 백도희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백도희의 친구 유진이었다.
“군인이랑 데이트는 어땠어?”
전화를 받자마자 유진이 잔뜩 신이 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우연인지 필연인지 하필이면 백도희의 휴대폰 통화음은 옆 사람이 다 들릴 정도로 음량이 높았고 백도희는 혹시라도 고형준이 듣게 될까 봐 너무 난감했다. 그래서 백도희는 목소리 톤을 한껏 낮추고 다그치듯이 유진한테 말했다.
“야, 데이트는 무슨, 헛소리 좀 그만해.”
“그 남자 널 아주 흐뭇하게 해줬을 것 같은데? 맞지? 맞지? 호호호.”
“자꾸 헛소리 지껄일 거면 전화 끊어.”
좀 정도껏 해줬으면 좋았을 건데 자꾸만 깐족대는 유진에게 백도희는 살짝 화가 치밀었다.
“농담이야, 저녁에 너한테 선물 하나 줄게, 잘 놀고 있어.”
유진은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고 통화가 끝난 백도희도 아무 말 하지 않고 입술만 잘근잘근 씹어댔다. 차 안에는 또다시 어색하고 무거운 침묵이 맴돌기 시작했고 백도희는 고형준을 곁눈질로 슬쩍 살폈다.
이제는 너무도 익숙해진 고형준의 포커페이스, 역시 무표정, 무감정으로 운전에만 집중하고 있는 이 남자, 대체 얼마나 들었고 어디까지 들었을지 너무도 궁금한 백도희였다. 그런 고형준에게 당장이라도 해명 아닌 해명을 하고 싶었지만 만에 하나 고형준이 아무것도 못 들었다면 백도희가 괜스레 혼자서 오버한 게 되는데 그게 더 비참할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백도희는 끝내는 해명을 안 하기로 마음먹고 입을 꾹 다물고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어느덧 차가 쉐라톤 호텔 앞에 도착했고 소욱은 갸름한 얼굴에 반듯한 인상의 이쁜 여자 한 명을 품에 안고 호텔에서 나오고 있었다.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분이 한껏 부풀어 오른 소욱, 자신 옆에 찰싹 달라붙은 예쁜 아가씨를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귓가에 대고 속삭이다가 아가씨의 이마에 쪼옥 뽀뽀를 했다. 꽁냥꽁냥 마치 사랑을 금방 시작한 연인처럼 두 사람 사이가 엄청 각별해 보인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백도희는 얼굴을 옆으로 슬쩍 돌려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었고 초점을 잃은 동공은 앞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그 순간 백도희는 앞이 하나도 안 보일 만큼 자욱한 안갯속을 걸어 들어갔다 나오는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백도희는 소욱에 대한 기억을 모조리 정리했고 꽁꽁 묶어서 가장 구석에 자리한 작은방에 꿍져 넣었다.
그 뒤로 단 한 번도 그 기억을 건드리거나 생각하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눈에서 안 보이면 마음에도 멀어진다고 생각을 안 하니 상처도 안 받고 마음도 아프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 그녀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발신번호는 다름 아닌 소욱의 번호였다.
백도희는 잠시 망설이는듯싶더니 전화를 받지 않았고 또다시 전화가 걸려오자 백도희는 그제서야 받았다.
“너 어디야?”
참으로 소욱 다운 경망스럽고 방정맞은 말투였다.
수화기 너머로 이따금씩 들려오는 여자의 애교 섞인 콧소리가 유독 거슬리며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다.
“어디면 뭐?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그동안 참아왔던 울분과 분노가 한꺼번에 쏟아지듯 백도희의 말투도 예전에 비하면 엄청 날카로워졌다.
“한 시간 안으로 오피스텔로 돌아가, 나도 금방 갈 테니까.”
명령인 듯 명령 아닌 명령 같은 어조, 소욱의 말투는 늘 그랬듯이 차가웠고 전화를 끊은 뒤 백도희는 냉큼 전원을 끊고 휴대폰을 가방 속에 홱 집어넣었다.
백도희의 기분을 알기라도 한 듯 고형준이 말을 건네왔다.
“지금이라도 내려줄 수 있습니다.”
“됐어요.”
백도희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앞만 보며 대충 쏘아붙였다.
심오하고 어두운 고형준의 눈빛, 그 속에는 백도희를 향한 연민의 감정이 살짝 엿보였고 고형준은 괴로운 듯 미간을 심하게 좁혔다. 고형준은 심기가 점점 불편했는지 애꿎은 페달만 세게 밟았다.
잠시 뒤 차량은 부두에 도착했고 두 사람은 고씨 집안 상징이 찍힌 대형 요트 앞에 멈춰 섰다.
고형준은 백도희에게 문을 열어주었고 백도희가 하차하자 한 손을 그녀의 어깨에 걸쳐 백도희를 끌어안았지만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매너손을 지켰다.
고형준의 몸에서는 백도희가 좋아하는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싱긋한 쑥 잎 향기 비슷한 연하고 기분 좋은 향 말이다.
이미 가짜 여자친구 행세를 하기로 합의를 본 이상, 백도희도 이 정도 스킨십은 용납할 수 있었다. 비록 여자친구라는 신분은 가짜일지 몰라도 모양새는 그럴 듯 리얼하게 해야 하니까 말이다.
두 사람이 요트에 오르자 소준호가 그들을 반기며 나섰다, 두 손은 여유 넘치게 바지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천천히 걸어 나오는 소준호, 그의 시선이 백도희한테 잠시 멈추더니 이내 아리송한 깊은 미소를 지으며 고형준을 바라봤다.
“백도희 씨 어제 별일 없었죠?”
“그럼요.”
고형준은 가볍게 대답하며 어깨동무를 한 손으로 백도희를 더욱 바짝 끌어안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준호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얕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우리 동생 오늘 밤 제대로 심장 폭행 당하겠는데? 들어가죠, 애들이 다 도희 씨만 기다리고 있어요.”
고형준은 백도희를 끌어안고 안으로 들어갔다.
요트가 시동이 걸리자 살짝살짝 흔들렸고 백도희는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그러자 어깨동무를 하고 있던 고형준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고 고형준은 그런 백도희 옆에 더 바짝 다가가서 넘어지지 않도록 세게 끌어안았다.
순간 허리에 찌릿 전류가 통한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백도희는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고 자기도 모르게 허리를 곧게 펴고 고형준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요트가 안정이 되면 괜찮아질 겁니다.”
그녀의 허리를 손으로 감싼 건 오직 그녀를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듯한 고형준의 말투, 마치 백도희가 괜히 오버하고 쪼잔하게 구는 것처럼 몰아가는 느낌이다.
“고마워요.”
파티장으로 들어가 보니 분위기 좋은 와인바 느낌으로 꾸며져 있었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백도희와 고형준이 나란히 바짝 다가붙어 꽁냥거리며 다가오자 약속이라도 한 듯 모든 시선이 두 사람한테 쏠렸다.
의아하고 경악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질투하고 시샘하는 이도 있고, 무슨 구경이라도 난 듯 흥미진진해하는 이들도 있었다.
특히 매력적이고 개성 넘치는 새우 눈으로 백도희를 뚫어져라 째려보는 한 여자의 날카로운 눈빛이 백도희한테 적나라하게 쏟아졌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했던가? 마치 당장이라도 백도희를 통째로 집어삼킬듯한 기세는 보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정도였다.
“정식으로 소개할게, 이쪽은 내 동생 소예빈.”
살벌한 기운을 조금이나마 만회하고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자 소준호가 버벅거리며 동생 예빈을 소개했다.
그러자 소예빈은 입을 삐쭉거리며 같잖다는 듯 콧방귀를 뀌더니 이내 180도로 태도가 확 바뀌었다. 방금 전 살벌하던 기세와 날카로운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여리여리 청순가련 소녀처럼 애교 섞인 콧소리로 고형준에게 말을 걸었다.
“아니, 오빠, 꼭 이렇게까지 해야 했어? 가짜 여자친구는 왜 만들어 와? 이 여자 전혀 오빠 스타일 아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