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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우리 무슨 사이길 바랍니까?

  • 백도희가 부대 대문 앞에 도착하자 고급 외제차 한 대가 그녀 앞에 멈춰 섰다.
  • 어딘가 낯이 익은 검은색 차량, 차 문이 쓱 내려지더니 나태한 눈빛과 늠름한 표정의 고형준이 얼굴을 삐쭉 내밀고는 턱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을 건넸다.
  • “타십시오.”
  • 군더더기 없이 짧고 굵은 그 남자의 한 마디, 욕이 한 글자도 들어가지 않은 차분한 말투였지만 그것은 분명 누구든 감히 거역할 수 없는 강력한 명령조였다.
  • 백도희는 살짝 거리낌을 느끼며 이내 차 문을 열고 조수석에 올라탔다.
  • 백도희가 차에 오른 뒤에도 두 사람은 서로 자리에 앉아있기만 할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백도희는 지독한 적막이 맴도는 차 안 분위기에 숨이 턱턱 막히는 것만 같았다.
  • “저, 돈은 어떻게 드릴까요?”
  • 어색하고 딱딱한 분위기를 만회하려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모르던 백도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 그런 백도희와는 달리 고형준은 그녀한테 제대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초점을 잃은 채 앞만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의 눈 빛과 표정에서는 일말의 감정조차 읽을 수 없을 만큼 차가운 기운이 맴돌았다. 세상 만물을 모조리 얼려버릴 것만 같이 냉철하게 굳어버린 표정을 한 채 고형준은 백도희의 말을 차갑게 받아쳤다.
  • “난 뇌물 같은 거 안 받습니다.”
  • 그러자 살짝 당황한 듯 백도희가 버벅거리며 해명 아닌 해명을 했다.
  • “이건 고형준 씨가 준 화장품 값이 아니고요.”
  • “화장품이 마음에 안 드시면 그냥 버리세요.”
  • 여전히 서늘한 눈 빛, 늘 그랬듯이 온기 없는 차가운 말투로 일관하는 이 남자.
  • 그것은 농담이 아닌 백 프로 진심이었다.
  • 백도희는 사람 등골을 시리게 만드는 고형준을 보며 기분이 찜찜하고 언짢았으며 고형준 특유의 사나운 횡포가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았다.
  • “이러시면 저 곤란해요, 제가 뭐라고 고형준 씨한테서 공짜로 물건을 받겠어요? 우리 아무 사이도 아닌데 이건 좀 아닌 것 같네요.”
  • 백도희의 말에 고형준은 심오한 눈 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대답 대신 오히려 되물었다.
  • “그러는 도희 씨는 우리가 무슨 사이길 바랍니까?”
  • “...”
  • 훅 들어온 고형준의 역 질문에 말문이 턱 막혀 아무 말도 못 하는 백도희였다. 어쩐지 고형준의 말투에서 꽁냥꽁냥 썸을 타는 예비 커플 같은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럴수록 그녀는 반갑거나 설레기는커녕 오히려 고형준을 밀어내고 싶어졌다.
  • “전 이미 남편이 있는 사람입니다.”
  • “그걸 누가 모릅니까?”
  • 백도희의 답변에도 고형준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앞을 보며 운전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 알듯 말듯 자꾸만 아리송한 말만 하는 고형준,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결론은 나지 않았고 오히려 짜증만 쌓여 혈압이 높아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백도희도 굳이 대꾸하지 않고 착잡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 “저 좀 도와주십시오.”
  • 그러자 고형준이 굵고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엔 질문이 아닌 서술문이었지만 백도희는 그래도 아무 대답 안 하고 입만 삐쭉 내밀었다.
  • “무슨 일인지 안 물어봅니까?”
  • 고형준은 곁눈질로 그녀를 흘겨보며 물었다.
  • “절 부르셨다는 건 제가 확실히 도움이 된다는 의미겠죠, 그저께 일은 다 기억이 나는 건 아니지만 그쪽이 절 도와주셨다는 건 사실인 것 같으니 저도 당연히 도움을 드려야죠.”
  • 백도희는 고형준의 제의에 흔쾌히 승낙했다.
  • 다만 고형준 씨가 아닌 “그 쪽”이라는 호칭을 쓰니 순간 두 사람 사이가 엄청나게 멀게 느껴졌다.
  • “제 여자친구가 되어주십시오.”
  • 그의 말에 백도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형준을 빤히 쳐다보았다,
  • ‘일반적인 상상을 뒤엎는 폭탄 발언을 이렇게 스스럼없이 내 뱉는다고? 그것도 세상 차분하고 담담한 말투로?’
  • “가짜 여자친구 말입니다.”
  • 고형준은 백도희를 지긋이 바라보더니 한 마디 더 했다.
  • “모임에 같이 참석해 주십시오.”
  • “유부녀의 몸으로 누군가의 가짜 여자친구 행세를 하는 건 좀 아니라고 보는데요?”
  • 예고 없이 훅 들어온 고형준의 제안에 백도희는 자신이 유부녀임을 강조하며 제법 잘 받아쳤고 고형준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끝이 안 보이는 넓고 푸른 바다, 망망대해같이 전혀 감이 안 잡히는 고형준의 표정은 오늘따라 더욱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 “그래서 더 믿고 맡기는 겁니다, 유부녀니까 딴맘 먹는 일은 없을 테니까, 안 그렇습니까?”
  • 고형준의 참으로 그럴싸한 답변에 백도희는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해 잠시 멈칫했다.
  • 고형준은 유부녀한테 딴 맘먹을 만큼 비겁한 남자는 아니었다, 정말 그가 그런 사람이었다면 두 사람은 어제 이미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을 것이다...
  • 백도희는 할 말이 있는 듯 마른 기침을 몇 번 하더니 마치 무슨 생각에 잠긴 듯했다.
  • 이때, 백도희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백도희의 친구 유진이었다.
  • “군인이랑 데이트는 어땠어?”
  • 전화를 받자마자 유진이 잔뜩 신이 난 목소리로 물었다.
  • 그러나 우연인지 필연인지 하필이면 백도희의 휴대폰 통화음은 옆 사람이 다 들릴 정도로 음량이 높았고 백도희는 혹시라도 고형준이 듣게 될까 봐 너무 난감했다. 그래서 백도희는 목소리 톤을 한껏 낮추고 다그치듯이 유진한테 말했다.
  • “야, 데이트는 무슨, 헛소리 좀 그만해.”
  • “그 남자 널 아주 흐뭇하게 해줬을 것 같은데? 맞지? 맞지? 호호호.”
  • “자꾸 헛소리 지껄일 거면 전화 끊어.”
  • 좀 정도껏 해줬으면 좋았을 건데 자꾸만 깐족대는 유진에게 백도희는 살짝 화가 치밀었다.
  • “농담이야, 저녁에 너한테 선물 하나 줄게, 잘 놀고 있어.”
  • 유진은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고 통화가 끝난 백도희도 아무 말 하지 않고 입술만 잘근잘근 씹어댔다. 차 안에는 또다시 어색하고 무거운 침묵이 맴돌기 시작했고 백도희는 고형준을 곁눈질로 슬쩍 살폈다.
  • 이제는 너무도 익숙해진 고형준의 포커페이스, 역시 무표정, 무감정으로 운전에만 집중하고 있는 이 남자, 대체 얼마나 들었고 어디까지 들었을지 너무도 궁금한 백도희였다. 그런 고형준에게 당장이라도 해명 아닌 해명을 하고 싶었지만 만에 하나 고형준이 아무것도 못 들었다면 백도희가 괜스레 혼자서 오버한 게 되는데 그게 더 비참할지도 모른다.
  •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백도희는 끝내는 해명을 안 하기로 마음먹고 입을 꾹 다물고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 어느덧 차가 쉐라톤 호텔 앞에 도착했고 소욱은 갸름한 얼굴에 반듯한 인상의 이쁜 여자 한 명을 품에 안고 호텔에서 나오고 있었다.
  •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분이 한껏 부풀어 오른 소욱, 자신 옆에 찰싹 달라붙은 예쁜 아가씨를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귓가에 대고 속삭이다가 아가씨의 이마에 쪼옥 뽀뽀를 했다. 꽁냥꽁냥 마치 사랑을 금방 시작한 연인처럼 두 사람 사이가 엄청 각별해 보인다.
  •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백도희는 얼굴을 옆으로 슬쩍 돌려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었고 초점을 잃은 동공은 앞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 그 순간 백도희는 앞이 하나도 안 보일 만큼 자욱한 안갯속을 걸어 들어갔다 나오는 기분이 들었다.
  • 어쩌면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백도희는 소욱에 대한 기억을 모조리 정리했고 꽁꽁 묶어서 가장 구석에 자리한 작은방에 꿍져 넣었다.
  • 그 뒤로 단 한 번도 그 기억을 건드리거나 생각하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눈에서 안 보이면 마음에도 멀어진다고 생각을 안 하니 상처도 안 받고 마음도 아프지 않았던 것이다.
  • 이때 그녀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발신번호는 다름 아닌 소욱의 번호였다.
  • 백도희는 잠시 망설이는듯싶더니 전화를 받지 않았고 또다시 전화가 걸려오자 백도희는 그제서야 받았다.
  • “너 어디야?”
  • 참으로 소욱 다운 경망스럽고 방정맞은 말투였다.
  • 수화기 너머로 이따금씩 들려오는 여자의 애교 섞인 콧소리가 유독 거슬리며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다.
  • “어디면 뭐?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 그동안 참아왔던 울분과 분노가 한꺼번에 쏟아지듯 백도희의 말투도 예전에 비하면 엄청 날카로워졌다.
  • “한 시간 안으로 오피스텔로 돌아가, 나도 금방 갈 테니까.”
  • 명령인 듯 명령 아닌 명령 같은 어조, 소욱의 말투는 늘 그랬듯이 차가웠고 전화를 끊은 뒤 백도희는 냉큼 전원을 끊고 휴대폰을 가방 속에 홱 집어넣었다.
  • 백도희의 기분을 알기라도 한 듯 고형준이 말을 건네왔다.
  • “지금이라도 내려줄 수 있습니다.”
  • “됐어요.”
  • 백도희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앞만 보며 대충 쏘아붙였다.
  • 심오하고 어두운 고형준의 눈빛, 그 속에는 백도희를 향한 연민의 감정이 살짝 엿보였고 고형준은 괴로운 듯 미간을 심하게 좁혔다. 고형준은 심기가 점점 불편했는지 애꿎은 페달만 세게 밟았다.
  • 잠시 뒤 차량은 부두에 도착했고 두 사람은 고씨 집안 상징이 찍힌 대형 요트 앞에 멈춰 섰다.
  • 고형준은 백도희에게 문을 열어주었고 백도희가 하차하자 한 손을 그녀의 어깨에 걸쳐 백도희를 끌어안았지만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매너손을 지켰다.
  • 고형준의 몸에서는 백도희가 좋아하는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싱긋한 쑥 잎 향기 비슷한 연하고 기분 좋은 향 말이다.
  • 이미 가짜 여자친구 행세를 하기로 합의를 본 이상, 백도희도 이 정도 스킨십은 용납할 수 있었다. 비록 여자친구라는 신분은 가짜일지 몰라도 모양새는 그럴 듯 리얼하게 해야 하니까 말이다.
  • 두 사람이 요트에 오르자 소준호가 그들을 반기며 나섰다, 두 손은 여유 넘치게 바지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천천히 걸어 나오는 소준호, 그의 시선이 백도희한테 잠시 멈추더니 이내 아리송한 깊은 미소를 지으며 고형준을 바라봤다.
  • “백도희 씨 어제 별일 없었죠?”
  • “그럼요.”
  • 고형준은 가볍게 대답하며 어깨동무를 한 손으로 백도희를 더욱 바짝 끌어안았다.
  •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준호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얕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 “우리 동생 오늘 밤 제대로 심장 폭행 당하겠는데? 들어가죠, 애들이 다 도희 씨만 기다리고 있어요.”
  • 고형준은 백도희를 끌어안고 안으로 들어갔다.
  • 요트가 시동이 걸리자 살짝살짝 흔들렸고 백도희는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 그러자 어깨동무를 하고 있던 고형준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고 고형준은 그런 백도희 옆에 더 바짝 다가가서 넘어지지 않도록 세게 끌어안았다.
  • 순간 허리에 찌릿 전류가 통한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백도희는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고 자기도 모르게 허리를 곧게 펴고 고형준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 “요트가 안정이 되면 괜찮아질 겁니다.”
  • 그녀의 허리를 손으로 감싼 건 오직 그녀를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듯한 고형준의 말투, 마치 백도희가 괜히 오버하고 쪼잔하게 구는 것처럼 몰아가는 느낌이다.
  • “고마워요.”
  • 파티장으로 들어가 보니 분위기 좋은 와인바 느낌으로 꾸며져 있었다.
  • 안에 있던 사람들은 백도희와 고형준이 나란히 바짝 다가붙어 꽁냥거리며 다가오자 약속이라도 한 듯 모든 시선이 두 사람한테 쏠렸다.
  • 의아하고 경악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질투하고 시샘하는 이도 있고, 무슨 구경이라도 난 듯 흥미진진해하는 이들도 있었다.
  • 특히 매력적이고 개성 넘치는 새우 눈으로 백도희를 뚫어져라 째려보는 한 여자의 날카로운 눈빛이 백도희한테 적나라하게 쏟아졌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했던가? 마치 당장이라도 백도희를 통째로 집어삼킬듯한 기세는 보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정도였다.
  • “정식으로 소개할게, 이쪽은 내 동생 소예빈.”
  • 살벌한 기운을 조금이나마 만회하고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자 소준호가 버벅거리며 동생 예빈을 소개했다.
  • 그러자 소예빈은 입을 삐쭉거리며 같잖다는 듯 콧방귀를 뀌더니 이내 180도로 태도가 확 바뀌었다. 방금 전 살벌하던 기세와 날카로운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여리여리 청순가련 소녀처럼 애교 섞인 콧소리로 고형준에게 말을 걸었다.
  • “아니, 오빠, 꼭 이렇게까지 해야 했어? 가짜 여자친구는 왜 만들어 와? 이 여자 전혀 오빠 스타일 아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