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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취해도 돼요, 내가 있으니까

  • “내 스타일이고 아니고는 내가 정해, 너한테 해명까지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 고형준은 그런 소예빈의 말을 차갑게 받아쳤다.
  • 그러자 소예빈은 이내 타깃을 바꿔 증오의 눈빛으로 백도희를 째려보며 목소리를 잔뜩 내리깔고 시비조로 물었다.
  • “그쪽이 고형준 여자친구예요? 두 사람 정말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 고형준은 백도희를 품속에 더 세게 끌어안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 “그냥 무시해요.”
  • 두 사람의 무심하고 차가운 태도에 소예빈은 더더욱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팔짝 뛰면서 백도희의 팔목을 세게 휘어잡았다. 이미 질투에 눈이 멀어 이성을 잃은 소예빈은 목소리마저 부들부들 떨면서 백도희를 궁지에 몰아세울 기세로 쏘아붙였다.
  • “내 말 안 들려요? 그쪽이 고형준 여자친구냐고요?”
  • 백도희는 두 사람이 어떤 사이인지 대충 짐작이 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입만 꾹 다물고 있었다.
  • “소예빈.”
  • 이때 고형준이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으로 한 손으로 백도희를 감싸 안으며 자신의 뒤로 몸을 숨기게 하고는 소예빈에게 말했다.
  • “내 여자친구가 아파하잖아.”
  • 차갑다 못해 서리가 낄 정도로 냉철한 고형준의 말투에도 소예빈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백도희에게 마구 소리를 질렀다.
  • “여자친구 맞냐고? 맞으면 맞다고 당당하게 말이라도 하지, 왜 우물쭈물하면서 대답을 못하실까? 혹시 벙어리에요? 이 남자 당신 거 아니거든요, 염치가 없어도 유분수지, 주제를 알고 들이대!”
  • “주제를 모르고 마구 들이대는 건 오히려 그쪽 아닌가?”
  • 발작하듯 악을 쓰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소예빈의 기에도 전혀 눌리지 않고 백도희는 덤덤한 표정으로 무심하게 한마디를 툭 던졌다.
  • 소예빈의 눈에서는 당장이라도 레이저가 나올 듯 불꽃이 튕겼고 여전히 그녀는 이성을 잃은 채 히스테리 아닌 히스테리를 부리고 있다.
  • “그쪽 지금 꼴을 좀 봐요, 내 눈에 당신 그저 광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말해봐요, 고형준한테 얼마 받았어요? 내가 열 배로 줄 테니까 당장 여기서 꺼져!”
  • “진짜 광대는 그쪽이라는 생각 안 들어요? 멍청한 여자는 사랑을 지키려 하겠지만 현명한 여자는 존엄을 지키는 법이죠.”
  • 바르게 쓴 글씨처럼 올곧은 백도희의 말투, 짧은 한 마디지만 알짜배기 의미만 골라 담은 듯 무게감이 느껴졌다.
  • 더 이상 말로 상대가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자 소예빈은 다짜고짜 백도희를 향해 뺨을 후려갈기려 했고 그 순간 고형준이 번개의 속도로 날아오는 소예빈의 손을 확 부여잡고 강렬한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며 경고를 했다.
  • “정도껏 좀 해.”
  • “왜? 내가 너무한 것 같아? 오빠 내 약혼자야, 어떻게 약혼자라는 사람이 딴 여자를 끼고 올 수 있어?”
  • 분노 게이지가 최대치에 달한 소예빈은 전혀 화를 삭이지 못하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 “주혜원 하나도 모자라서 또 여자를 데리고 와? 참는데도 한계가 있어, 오빠야말로 정도껏 좀 해.”
  • “난 한 번도 널 내 약혼녀라고 인정한 적 없는데?”
  • 까막득한 밤하늘처럼 어둡고 차가운 고형준의 동공에는 한줄기 어둠이 서렸고 그는 호통치듯 화난 목소리로 소예빈에게 말했다.
  • “경고하는데 만약 제니한테 하던 것처럼 우리 도희씨한테 무슨 짓이라도 하면 절대 가만 안 둬.”
  • 어찌나 무섭고 차가웠던지 후끈후끈하던 현장 분위기가 삽시에 굳어버렸고 마치 영하의 날씨처럼 찬 바람이 쌩쌩 몰아쳤다.
  • “됐어, 됐어, 그만해.”
  • 보다 못한 소준호가 살벌하게 싸우는 두 사람을 극적으로 뜯어말리면서 급기야 소예빈의 손을 잡고 어르고 달래주었다.
  • “우리 동생이 좀 참아, 누가 뭐라 해도 고형준은 네 약혼자잖아.”
  • 그러나 그녀는 소준호의 손을 홱 뿌리쳤고 여전히 살기가 가득한 두 눈으로 고형준을 째려보며 말했다.
  • “오빠 저 여자한테 키스할 수 있어? 이 자리에서 키스한다면 여자친구라고 믿어줄게!”
  • 그녀의 말에 고형준은 아무 말도 못한 채 굳어져 버렸고 소예빈은 더더욱 시뚝해서 코 웃음을 쳤다.
  • “거 봐, 못하지? 고형준! 이 세상에 당신한테 어울릴만한 사람은 나 하나야, 그러니까 도망갈 생각 하지 마.”
  • 고형준은 씨익 웃으며 몸을 돌려 백도희를 쳐다보았다.
  • 알듯 말듯 아리송한 고형준의 눈 빛이 백도희한테 쏟아지자 백도희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고형준의 표정을 보며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고 조건 반사하듯이 뒷걸음질 쳤다.
  • 그러자 고형준은 손으로 백도희의 머리를 살포시 잡더니 앵두같이 앙증맞고 매력적인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댔다.
  • 촉촉한 두 입술이 서로 맞닿는 순간 백도희는 온몸에 찌릿찌릿 전류가 통하는 것 같았고 당황한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형준을 바라보았다.
  • ‘아무리 가짜 여자친구 행세라고 하지만 이런 연기는 너무 선을 넘은 거 아닌가?’
  • 백도희는 무작정 입술을 꼭 다물고 반항 아닌 반항을 하고 있었다. 고형준은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릿카락을 쓰다듬으며 뒷목을 살짝 잡아 백도희가 어쩔 수 없이 머리를 들게 만들었다.
  • 그 순간 백도희의 입술이 열리면서 샤방샤방 봄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살 같은 따스한 촉감의 혀가 그녀의 입속으로 살포시 들어와 상큼함과 싱긋함을 선사했다.
  • 콩닥콩닥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댔다.
  • 예고 없이 훅 들어온 이 남자, 백도희는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고 그녀의 놀란 가슴과 심장도 전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모르는 남자와 아니, 사랑하는 감정이 1도 없는 남자와 키스를 하는 게 백도희는 너무도 싫었고 그녀는 있는 힘껏 고형준을 밀어냈다.
  • 그러거나 말거나 고형준은 애써 반항하는 백도희의 손을 더 꽉 잡은 채 더 깊게, 더 무아지경으로 키스를 이어갔다.
  • 점점 더 거칠어지는 그 남자의 숨소리, 그 시각 고형준은 먹잇감을 찾아 드넓은 초원을 헤매는 하이에나처럼 너무도 굶주려있었다. 그동안 쌓인 갈증을 시원하게 해결하려는 듯이 그의 행동은 점점 더 과격해져갔다.
  • 갈수록 더 가까이 느껴지는 상남자의 숨결, 맹수 손에 걸려든 어린 양처럼 백도희는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한 채 고스란히 받아치고 있다.
  • 3년 전에도 이 남자는 똑같이 했었다, 그녀가 원하건 말건 그건 안중에도 없고 오직 자신만의 욕망을 위해 막무가내로 들이대고 과감하게, 끈적하게 진한 스킨십을 해가며 억지로 백도희를 가졌던 고형준이다.
  • 그렇게 백도희는 원치 않게 자신을 고형준에게 뺏겼고, 덕분에 안 그래도 훅 치면 무너질 것만 같았던 그녀의 유리 멘탈은 와장창 제대로 아작이 났고 가까스로 버티고 있던 영혼마저 산산조각이 났었다.
  • 그때 그녀는 아래쪽이 찢어지는 듯이 아팠었고 극심한 통증은 연속 며칠 지속되었다.
  • 백도희는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바르르 떨며 고형준의 등을 퍽퍽 치며 가까스로 반항을 했다, 고형준은 그제서야 욕망이 좀 잦아들었는지 백도희의 입술에서 입을 뗐고 빨갛게 퉁퉁 부어오른 백도희의 입술은 방금 전 두 사람의 스킨십이 얼마나 격렬했는지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 백도희는 잔뜩 경계를 한 눈 빛으로 고형준을 쏘아보며 뺨이라도 한 대 갈기고 싶은 충동이 가득했지만, 그러나... 가짜 여자친구 행세를 하기로 약속을 한 건 본인인데 고형준한테 손까지 대면 너무 비인간적인 것 같았다.
  • 자아 보호 욕망이 극에 달해 잔뜩 경계심을 품은 백도희를 쳐다보는 고형준의 표정이 방금 전보다 더 깊고 심오해졌다.
  • 적나라한 키스 현장을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한 소예빈은 질투심이 폭발해 주먹을 불끈 쥐고는 홱 토라져 돌아선 채 와인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 샘이 나서 미칠 것만 같다.
  •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준호는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소예빈의 어깨를 다독이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 “그만 포기해, 세상엔 고형준 말고도 좋은 남자 많아.”
  • “남자는 많지만 누구나 다 고형준은 아니잖아.”
  • 여전히 분노를 삭히지 못하고 씩씩거리던 소예빈은 방금 전 따랐던 술 한 잔을 단숨에 들이켰고 먼발치에 서 있는 백도희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 “어이, 거기 여자, 나랑 술 한 잔 하시죠!”
  • 백도희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곁눈질로 소예빈을 쳐다보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 “어떻게 마실 건데? 내가 흑기사 하지!”
  • 소예빈이 대놓고 도전장을 던져오자 고형준이 멋지게 흑기사를 자처하며 막아 나섰다.
  • 소예빈은 더더욱 화가 치밀어 맥주병을 테이블에 힘껏 내리쳐 와장창 박살을 냈고 이성을 잃은 두 눈에서는 살벌한 기운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 “오빠가 뭔데 흑기사를 한 대? 이건 여자 대 여자의 전쟁이야, 나 지금 저 여자한테 정식으로 도전장 내민 거야, 고형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오빤 내 거야, 나한테 이러면 안 돼.”
  • 고삐 풀린 미친개처럼 마구 날뛰는 소예빈을 본 백도희는 착잡한 기분이 들었고 마음 한구석이 시려났다.
  •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는 게 얼마나 고통이고 생고문일지, 세상 모든 여자들이 다 통병을 앓고 있는 것 같다.
  • 너무 힘들어서, 버티기 힘들어서 급기야 자해를 하면서 마음속에 쌓인 분노를 그나마 쏟아내는 것!
  • 백도희는 소예빈이 너무도 안쓰러운 나머지 기분이 급 우울해졌다.
  • 엄마도 그렇고 백도희 본인도 그렇고 무엇보다 소욱을 생각하니 가슴은 맨 살을 에이는 듯 너무도 아팠다.
  • “좋아요, 같이 마시죠.”
  • 백도희는 차분하고 도도하게 소예빈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도전을 과감히 받아들였다.
  • 그러나 소예빈의 태도는 달랐다.
  • ‘감히 나 소예빈이랑 맞서겠다고? 주제를 알고 들이대라고 분명 경고를 했을 텐데?’
  • 자타 공인 말술인 소예빈은 백도희가 겁도 없이 덤벼든다는 생각이 들자 콧방귀를 뀌며 비웃었다.
  • “그쪽이 지면 발가벗고 실오리 하나 안 걸친 맨몸으로 여기서 춤을 춰요. 분위기 메이커를 못하겠다면 내 남자를 돌려주시던가.”
  • 당장이라도 백도희를 잘근잘근 씹어먹을 기세로 소예빈의 눈빛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 “만약 그쪽이 지면요?”
  •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차분하게 다 받아치는 백도희, 청아한 목소리와 티 없이 맑은 두 눈에는 소예빈을 향한 동정심이 잔뜩 묻어났다.
  •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지 않으면 설사 결혼을 했더라도 그것은 결혼이 아닌 생지옥이라는 사실을 소예빈은 몰라도 너무 모르고 있었다.
  • 이미 결혼의 고배를 한 번 마시고 사랑 없는 혼인이 얼마나 비참한지 다 겪어봤으니 그 도리를 너무 잘 알고 있는 백도희.
  • “난 무조건 이겨요.”
  • 소예빈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씩씩하게 쏘아붙였다.
  • “만약 예빈 씨가 지면 그냥 단념하시고 갑판 위에 올라가서 나는 고형준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라고 큰 소리로 외쳐요! 할 수 있겠어요?”
  • 여전히 올곧고 바른 말투로 백도희는 또박또박 말을 이어가며 입꼬리를 살짝 올려 가벼운 미소까지 보였다.
  • 만약 소욱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가 밖에서 여자들과 아무리 물고 빨고 뒹굴어도 백도희는 모두 눈감아줄 수 있었을 것이다.
  • 만약 소욱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백도희는 상처도 받지 않았을 것이다.
  • 부디 이 지독한 사랑이 하루빨리 식어버리고 씨가 말라버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랬더라면 마지막 남은 자존심 정도는 가까스로 지켜내고 이렇게까지 아프진 않았을 텐데 말이다.
  • “좋아요, 난 분명 그쪽한테 기회를 줬으니 나중에 딴 말 하기 없기예요, 여기 맥주 세 병, 누가 더 빨리 마시나 내기하죠.”
  • 소예빈도 흔쾌히 도전을 받아들였고 두 여자의 불꽃 튀는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 그러나 백도희가 맥주병을 집어 드는 순간 고형준이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제지했고 걱정 어린 말투로 백도희한테 말했다.
  • “마시지 마요!”
  • 고형준의 도발적인 행위에 백도희는 수줍게 웃었고 이내 맑고 청량한 아침이슬을 가득 담은 것 같은 촉촉한 두 눈으로 고형준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 “취하면 뭐 어때요? 형준 씨가 있는데?”
  • 백도희가 자신을 믿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고형준은 흠칫 놀랐고 동공이 흔들리며 잠시 망설이는 듯싶더니 백도희의 손을 천천히 놓았다. 그렇지만 그의 두 눈에는 여전히 백도희를 향한 걱정과 관심이 가득했다.
  • “취해도 됩니다, 내가 있으니까.”
  • 고형준은 백도희한테 안심하라고 당부를 했고 백도희는 맥주병을 들고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 한 병, 또 한 병.
  • 미처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못한 맥주가 주르륵 흘러내려 옷을 적셨고 그녀의 마음은 상처에 소금물이 스며든 듯 너무도 쓰리고 아파왔다.
  • 백도희는 드디어 맥주 세 병을 다 마셔버리고 마지막 빈 병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입가에 묻은 맥주를 맨손으로 닦아내다가 테이블 위에 이미 놓여 있는 소예빈의 맥주병 세 병을 보더니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체념한 듯 쿨하게 패배를 인정했다.
  • “그래요, 내가 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