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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무성욕자?

  • 서울에서 부태영의 침대에 올라가고 싶은 여자, 애인이 되고 싶은 여자는 셀 수 없이 많았지만, 유독 이렇게 그의 면전에서 아내가 되겠다고 큰소리치는 여자는 서아름이 처음였다. 부태영은 그녀가 어디서 온 자신감으로 큰소리친 건지 생각했다.
  • “내가 아내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내 아내가 되고 싶은 훌륭한 여자들은 사방에 널려져 있어. 너는 나와 조건을 따질 자격도, 거래할 자격도 없어.”
  • 부태영이 전화를 끊으려 하자, 서아름은 급히 계속해서 말했다.
  • “부사장님이 회사에 공개적으로 아내를 면접으로 뽑는다는 것은 아마도 집에서 급하게 재촉하는 것 같은데 저는 가짜 결혼을 받아들일 수 있고 일이 성사된 후에는 절대 부사장님에게 들러붙지 않을 거예요.”
  • 가짜 결혼? 부태영은 씩 웃으며 재미있는 여자라고 생각했다.
  • 서아름은 부태영의 대답을 듣지 못하자, 긴장되는 심정을 억누르며 또 말했다.
  • “다른 여자라면 가짜 결혼한다고 해도 일이 성사된 후에도 달라붙을 가능성이 크지만…”
  • “들러붙지 않을 자신이 있어? ”
  • “그럼요, 부사장님에게는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무성욕자예요. 게다가 제 마음은 이미 3년 전에 죽었어요.”
  • 3년 전 명문가의 딸에서 자존심이 짓밟혔고 존엄이 없는 대리 임신, 아버지의 투신자살, 진철의 파렴치한 배신, 신영 모녀의 악행을 겪은 뒤 가슴에 남은 거라고는 복수밖에 없었다.
  • 부태영은 ‘무성욕자'라는 단어를 곱씹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 “말 그대로 무성욕자여야 할거야.”
  • “그럼… 부사장님…?”
  • “작은 일이 아니니 이틀 동안 생각해볼게.”
  • 서아름은 들리지 않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 “네, 부사장님의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 부태영이 전화를 끊자 서재의 문이 작은 팔에 밀려 열렸다.
  • “아빠! 저랑 그림도 같이 안 그리고 누구랑 통화하고 있어요?”
  • 콩이는 금방 그린 그림을 안고 서재로 뛰며 들어오자 부태영은 몸을 숙여 딸을 품에 안고 총애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 “콩이가 뭐를 그렸는지 보자.”
  • 콩이는 며칠 전에 부태영과 콩이만 있는 수채화에 한 사람을 덧 드렸다. 한 사람이 많아진 그림을 본 부태영은 이마를 찌푸리며 물었다.
  • “이게 누구야?”
  • 콩이는 앳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 “이건 아름 이모에요. 오늘 아름 이모가 미술 수업을 할 때 몰래 그렸어요. 왜냐면 선생님이 엄마 아빠와 아이를 그려야 한다며 엄마를 안 그리면 안된다고 해서 그렸어요. 아빠, 내가 친구들한테 이 사람이 엄마라고 얘기하면 애들이 믿을까요?”
  • 콩이는 하얀 손으로 그림 속에서 아름을 가리키며 얼굴을 들어 천진난만하게 부태영에게 물었다.
  • 콩이가 슬퍼할까 봐, 부태영은 머리를 숙여 콩이의 뽀송뽀송한 머리에 뽀뽀하고 맞장구를 쳤다.
  • “응, 믿을 거야.”
  • “아빠, 엄마가 화성에서 오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면 아름 이모가 잠깐 콩이의 엄마 해주면 안 돼요?”
  • 부태영은 멈칫하고, 웃으면서 콩이를 보고 말했다.
  • “그건, 아름한테 물어봐야지.”
  • 콩이는 입을 벌리고 즐겁게 웃으며 신났다.
  • “내일 학교 가면 물어볼게요!”
  • 서아름이 집에 도착하자마자 여율은 서아름을 붙잡고 이것저것 물어봤다.
  • “아름아, 면접 어땠어?”
  • 면접 얘기를 꺼내자 서아름은 손을 들어 이마를 툭 치며 말했다.
  • “말도마, 면접장에 잘못 들어가서 큰 망신 당했어.”
  • 여율은 서아름의 기분이 안 좋은 것을 느꼈고 서광현의 초상화를 들고 돌아온 것을 보고 물었다.
  • “오후에 서씨 가문 별장에 갔었어?”
  • 서아름은 화장실에서 수건을 짜서 나와 서광현의 먼지 낀 초상화를 조심스럽게 닦으며 대답했다.
  • “응, 신영이랑 진철을 봤어, 이사하고 있더라.”
  • “뭐? 두 쓰레기를 봤다고? 너한테 무슨 짓 한 거 아니지?”
  • 서아름은 힘없이 웃으며 머리를 저었다.
  • “아니야. 옛날에는 너무 순진했어. 신영이랑 신연우한테 농락당하고, 진철한테 버림받고, 이제 내가 잃을 수 있는 건 다 잃었으니 겁날 거 없어.”
  • “그 신영이랑 신연우는 완전 불여우야! 그리고 그 진철은 완전 쓰레기이고! 다음에, 우리 오빠를 너에게 소개해줄게! 완전 훈남이야! 쓰레기 진철은 이제 잊어!”
  • 서아름은 여율을 바라보고 부태영과의 거래를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여율이가 만약 아빠의 별장을 위해 자신이 몸을 팔아넘겼다는 것을 안다면 여율이 그녀를 더러운 여자라고 오해 할까봐 여율한테 얘기하지 않기로 했다, 게다가 어차피 부태영과의 거래는 오래가지 못할 것 같았다.
  • 이 밤은 매우 편안하지 못하게 잤다. 남자의 뜨거운 숨결은 마치 불씨처럼 그녀의 피부에 뿜어져 매우 뜨거웠고 두 남녀는 얽히고설켜 큰 침대에서 뒹굴었다.
  • 훤칠한 몸매의 남자는 여자를 짓눌러 동작이 거칠고 난폭하여 참을 수가 없는 여자는 살살해달라고 울면서 빌었다.
  • “살살? 확실해? 20억 필요 없는 거야? ”
  • 여자는 고양이처럼 울며 커다란 소용돌이에 버려진 듯 아프면서도 저릿저릿한 느낌이 그녀를 불안하게 했다.
  • “아니요… 제발…제발요…아--”
  • 꿈이다! 서아름은 꿈에서 깨어나 땀범벅인 채 침대에 앉았다. 벌써 3 년이나 지났지만, 이 악몽은 여전히 늘 그녀를 시달렸다. 그러다 가끔은 그 남자, 아기의 아버지가 누구고, 또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 “아름아. 왜 그래? 악몽 꿨어?”
  • 밖에서 여율의 걱정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 “아니야! 나 괜찮아!”
  • 서아름은 옆에 있는 시계를 보니, 7시 45분, 이제 곧 8시가 되는 시간이었다. 서아름은 침대에 다시 누워 땀에 젖은 이마에 팔을 얹고 한참이나 가라앉히더니 침대에서 일어나 씻은 뒤 아침 식사를 하고 국제 유치원에 갔다.
  • 아침 8시 반, 서아름은 유치원에 도착하자마자, 분홍색의 뽀로로 가방을 메고 온 콩이가 길가 멀리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 “아름 이모!”
  • 서아름은 소리가 나는 방향을 보더니, 콩이가 작은 가방을 메고 서아름 쪽으로 달려왔고, 너무 빨리 달린 나머지 작은 얼굴이 그녀의 다리에 고꾸라졌다.
  • “아름 이모! 안녕하세요!”
  • 서아름은 씩 웃으며 꼬마의 헝클어진 단발머리를 주물렀다.
  • “안녕, 콩이야.”
  • 그녀는 한 손으로 아이를 잡고 유치원 밖으로 바라보았다.
  • “오늘 누가 데려다줬어?”
  • “아빠!”
  • 서아름은 멈칫하더니 자신과 부태영의 거래를 생각하며 고개를 숙여 콩이를 바라보았다. 콩이가 자신이 계모가 된다는 걸 알게 된다면 싫어하지 않을까고 걱정했다. 콩이를 처음 만난 후 집안 사정을 알고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아팠다.
  • “아름 이모, 나 보여줄 거 있어요.”
  • 꼬마는 멍하니 있는 서아름을 잡아당겨 계단에 앉히고, 등에 있는 작은 책가방을 벗었다. 서아름은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 “뭘 보여줄 건데?”
  • 콩이는 책가방 지퍼를 열고, 책가방에서 수채화를 꺼냈다.
  • “아름 이모, 이것 봐요! 이모를 나랑 아빠 옆에 그렸어요! 그러면, 나랑 아빠는 외롭지 않을 거에요! 아름 이모도 외롭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