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우현은 그녀를 욕실에 데려다 놓고는 나가버렸다. 하연은 고개를 숙인 채 우현이 떠나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볼 위에 남아있는 눈물을 손으로 가볍게 훔쳐냈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욕실 문을 잠근 그녀는 병원에서 준 그 임신 진단서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빗물에 젖어있던 진단서는 위에 쓰여있는 글자들도 이미 흐릿해져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망가져 있었다.
서프라이즈로 그에게 말해주려 했던 것도 이제는 완전히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진우현과 한 이불은 덮은지 2년, 그가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 사람임을 그녀가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굳이 그녀에게 문자를 보내 찾아오라 했다가는 또다시 돌아가라고 할 만큼 실없는 사람도 아니었다.
가능한 상황이라고는 다른 누군가가 그의 휴대폰으로 그녀에게 문자를 보내 그녀를 웃음거리로 만든 것일 거라는 것뿐이었다. 그녀가 우산을 들고 바보같이 건물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때, 위에서는 한무리의 사람들이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오래도록 진단서를 보고 있던 하연은 실소를 터뜨리며 천천히 그것을 찢어버렸다.
반 시간이 지나고, 하연이 담담한 표정으로 욕실에서 나왔다. 우현은 긴 두 다리를 바닥에 늘어뜨린 채 소파에 앉아있었다. 그런 그의 앞에는 노트북 하나가 놓여 있었다. 아마도 아직까지 일 처리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욕실에서 나온 그녀를 발견한 그는 옆에 있는 한 컵의 생강차를 가리켰다.
“생강차 마셔.”
“응.”
하연은 가까이 다가가 생강차를 감싸들었다. 하지만 바로 마시지 않고 무언가 생각이 난 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진우현.”
“왜?”
그의 말투는 차가웠다. 시선은 심지어 노트북 화면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였다. 하연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우현의 우월한 옆모습과 턱 선을 바라보며 조금은 창백한 기운이 감도는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이내 우현이 기다림에 짜증이 난 듯 고개를 들어 올렸고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
방금 목욕을 마친 하연의 피부는 핑크빛이 감돌고 있었다. 입술도 전만큼은 창백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비를 맞은 탓인지 오늘의 그녀는 어딘가 아파 보여 살짝이라도 건드리면 곧바로 부서져버릴 것 같았다.
단 한순간의 눈 맞춤은 우현의 어떠한 욕망을 자극했다. 하지만 마음이 복잡했던 하연은 우현의 기분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머릿속에서 정리하기 바빴다. 그녀가 드디어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을 때였다.
“너… 읍.”
옅은 분홍빛의 입술이 벌어지기 무섭게 우현은 참기 힘든 듯 그녀의 턱을 잡고는 몸을 숙여 입을 맞추었다. 그의 거친 손길에 그녀의 새하얀 피부가 순식간에 빨개졌다. 우현의 숨결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그의 입맞춤에 숨쉬기가 어려웠던 하연이 그를 밀어내려던 순간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그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가 동작을 멈추자 열기 또한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아쉬운 듯 그녀의 입술을 살짝 깨문 뒤 멀어지는 그의 목소리는 약간 갈라져 있었다.
“생강차 마시고 일찍 자도록 해.”
그리고 그는 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받으러 밖으로 나갔다. 베란다의 문이 닫히고 입맞춤으로 인해 조금 어지러웠던 하연은 잠시 앉아 숨을 고른 뒤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녀는 침실이 아닌 베란다로 향했다. 반쯤 닫힌 베란다 문틈 사이로 선선한 바람이 우현의 낮은 목소리를 싣고 들어왔다.
“응, 떠나지 않을 거야.”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얌전히 잠이나 자.”
우현의 목소리는 바람처럼 부드러웠다. 그 자리에서 잠시 동안 듣고 있던 하연은 이내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진우현에게도 이도록 다정한 순간이 있었던가.’
다만 그 상대가 자신이 아닌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몸을 돌려 침실로 들어선 그녀는 아무런 표정 없이 침대맡에 앉았다. 사실 두 사람의 결혼은 원래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또한 그저 일종의 거래에 불과한 것이기도 했다.
2 년 전, 심 씨 가문의 파산으로 하루아침에 거리로 나앉게 된 그녀는 강남 전체의 웃음거리로 전락해 버렸었다. 한때의 엄청나던 기세로 인해 적이 많았던 심 씨 가문이 몰락하자 수많은 이들이 그 우스운 꼴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심지어 어떤 이는 심 씨 가문의 아가씨를 자신에게 준다면 자신이 대신 가문의 빚을 갚아줄 수 있다는 망발을 하기도 했었다. 심 씨 가문이 몰락하기 전까지만 해도 하연에게 구애를 해오는 남자들이 부지기수였지만 누구 하나도 그녀의 눈에 들지 못했기에 시간이 지나면서 모두들 심 씨 가문 아가씨의 눈이 지나치게 높다고들 했었다. 그렇다 보니 가문이 몰락하고 난 뒤 그런 그녀를 농락하고 싶은 마음에 암암리에 그녀에게 값을 매기는 남자들도 있었다. 이렇듯 그녀가 가장 서럽고 절망적이던 때에 진우현이 돌아왔다. 그는 값을 매기며 입을 놀렸던 남자들에게 처절한 대가를 치르게 했고 심 씨 가문을 대신해 가문의 빚을 갚아주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말했다.
“나랑 약혼하자.”
하연은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는 충격받은 그녀를 보고는 손을 뻗어 그녀의 볼을 어루만졌다.
“뭘 그렇게 놀라? 내가 널 어떻게 하기라도 할까 봐? 걱정하지 마. 그저 가짜 약혼이니까. 할머니가 편찮으셔. 그런데 할머니께서 널 많이 예뻐하시잖아. 나랑 가짜로 약혼해서 우리 할머니를 기쁘게 해주면, 내가 심 씨 가문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줄게.”
‘아, 가짜 약혼이었구나. 그저 할머니를 기쁘게 하기 위해 서일뿐인 거구나. 날 좋아하는 게 아니었구나.’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의 마음속에 자신이 없음을 알면서도, 현재의 상황을 똑똑히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그 구렁텅이 속으로 뛰어든 것이다.
약혼 후 하연은 무척이나 불편했다. 두 사람은 오랜 친구였기에 이제껏 친구로만 지내오다 갑자기 약혼을 해버리니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무언가 굉장히 불편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우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각종 모임에 항상 그녀를 데리고 다녔다.
그러다 변고가 생긴 것은 그로부터 1년 이 지난 뒤였다. 진 씨 할머니의 병세가 악화된 탓에 두 사람이 결혼을 하게 되면서 그녀는 모든 이들이 부러워하는 진 씨 가문의 안주인이 된 것이다.
밖에서는 모두 그런 두 사람을 두고 오랜 친구 사이에서 끝내 이렇듯 성사되었다고들 감탄했다.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 보니 하연은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쉽게도 성사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것은 그저 서로 간의 합의하에 이루어진 거래에 불과했다.
“아직 안 자고 있었어?”
그때 갑자기 우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하연의 옆자리가 푹 꺼져들어가며 우현의 몸에서 풍기는 옅은 향기가 그녀를 감쌌다.
“말할 게 있어.”
하연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녀는 우현이 하려는 말을 대충은 짐작하고 있는듯했다. 우현이 입을 열었다.
“우리 이혼하자.”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하연은 마음 한편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녀는 휘몰아치는 감정을 억누르며 자신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언제?”
자신의 자리에 누워있는 그녀의 표정은 평온했고 목소리 또한 떨림이 없었다. 말투 역시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 만큼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그녀의 태도에 우현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입으로는 전혀 다른 말을 내뱉었다.
“곧, 할머니 수술 끝나고.”
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에 우현이 물었다.
“… 끝이야?”
그의 말에 하연은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뭐?”
그녀의 맑은 눈빛에는 그 어떤 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질문에 우현은 잠시 버벅거리더니 이내 소리 내어 힘없이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이 속없는 여자야.”
부부는 하루를 살아도 부부라는데, 하물며 자신과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부부로 지냈는데도 그의 이혼 얘기에 그녀는 그토록 담담했다.
‘하긴, 어차피 계약 결혼이었고, 서로가 필요한 것을 취한 것일 뿐이겠지. 내 존재는 그저 그녀에게 추근대는 이들을 포기하고 물러나게 할 뿐이려나. 지난 2년 동안 만약 할머니 때문이 아니었다면 아마 진즉 나와의 관계를 정리했겠지.’
우현은 하연의 담담했던 반응으로 인해 생긴 불편한 마음을 지워버리고 그녀의 옆에 누워 눈을 감았다.
“진우현.”
하지만 하연이 갑자기 그를 불렀다. 번쩍 눈을 뜬 우현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한 쌍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유달리 맑게 빛났다.
“무슨 하고 싶은 말 있어?”
하연은 그의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며 붉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끝내 한마디를 뱉었다.
“지난 2년 동안… 고마웠어.”
그녀의 말을 들은 우현의 눈가에서 맑은 빛이 서서히 사라졌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그가 입술을 삐죽이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