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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약을 잘못 먹은 것뿐

  • 다음날, 눈을 뜬 하연은 감기 기운이 있는 것을 느끼곤 서랍에서 감기약을 꺼내 컵에 따뜻한 물을 따랐다. 하지만 감기약을 입에 털어 넣은 순간 그녀는 무언가 생각난 듯 안색이 순식간에 변하더니 욕실로 달려가 입안의 약들을 토해냈다. 그녀는 방금 전 삼킨 쓴맛까지 토해내려 세면대에 고개를 박고 입을 헹궈댔다.
  • “왜 그렇게 허겁지겁 그래? 어디 아파?”
  • 갑자기 문 어구에서 울려 퍼진 남자의 맑고도 시린 목소리에 하연은 깜짝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우현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급히 시선을 돌린 하연은 잠시 숨을 고르고는 입을 열었다.
  •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약을 잘못 먹어서.”
  • 말을 마친 그녀는 입가의 물기를 손으로 닦아내고는 몸을 일으켜 욕실을 나갔다. 몸을 돌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우현은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어젯밤 돌아와서부터 어딘가 이상한 것 같다는 느낌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 아침식사를 마치고 부부는 함께 집을 나섰다. 우현은 아직도 안색이 조금 창백한 하연을 보며 입을 열었다.
  • “내 차 타고 갈래?”
  • 심하연은 어제 비를 맞은 탓에 오늘 일어난 뒤부터는 확실히 몸이 좋지 않다고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려던 순간 진우현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는 고개를 숙여 휴대폰을 확인했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강유라였다. 그가 하연을 피해 전화를 받으려 고개를 돌렸지만 그녀는 이미 알아채고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 두 사람은 부부이기는 했지만 마음이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하연은 평소에도 우현의 통화를 엿들은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이 지내온 방식은 늘 이런 식이었다. 하지만 오늘 우현은 황급히 자리를 피해버린 그녀로 인해 마음 한편이 찌릿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 느낌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그는 이내 전화를 받았다.
  • 심하연은 멀지만은 않은 거리를 두고 그를 지켜보았다. 그가 풍기는 분위기로 이미 그녀는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하고 있었다. 온화한 분위기, 그것은 그녀를 대할 때는 한 번도 본 적 없던 상태였다. 그녀는 깊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속의 부러운 기분을 억눌렀다. 그러고는 휴대폰을 꺼내며 차고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5분 뒤, 통화를 마친 진우현이 몸을 돌렸을 때 그의 뒤는 이미 텅텅 비어있었다. 그 어디에서도 심하연의 그림자를 찾을 수 없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휴대폰으로 문자 한 통이 전송되었다.
  • “급히 회사에 들어가 봐야 해서, 먼저 갈게.”
  • 뚫어져라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진우현의 눈빛은 짙게 깔려있었다.
  • *
  • 아픈 몸을 이끌고 회사에 도착한 심하연은 들어서자마자 사무실 의자 위에 주저앉아 곧바로 책상 위에 엎드렸다.
  • ‘머리가 너무 아파…’
  • 하지만 그녀는 현재 임신 중이었기에 함부로 약을 먹을 수도 없었다. 사실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알 수 없었다. 도리대로라면 두 사람의 결혼은 진짜가 아니었기에 그녀가 임신을 했다 하더라도 그런 그녀를 위해 진심으로 기뻐해 줄 사람은 진 씨 할머니 한 사람뿐이었다. 다른 이들은 모두 이 아이를 환영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진우현은 더욱 그럴 것이다.
  • 어제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임신한 사실을 알고 나서 그녀는 혹시라도 진우현이 이 아이를 받아들여 두 사람의 결혼이 진짜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유라가 돌아오고, 그의 감정마저 그대로인 것을 알게 된 후로는 그녀가 생각하는 그의 첫 반응은 아마도 자신과 유라의 결혼에 지장이 생길까 아이를 지우라고 할 것이었다. 그렇기에 더 늦기 전에 아이를 지워야 한다고 그녀의 이성이 말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 이대로 질질 끈다면 그녀의 마지막 남은 체면까지도 전부 사라지게 될 것이 뻔했다.
  • “하연 언니.”
  • 부드러운 여성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심하연이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비서인 임수민이 서있었다. 하연은 몸을 바로 세우고는 그녀를 향해 의례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 “왔어요? 좋은 아침이네요.”
  • 하지만 임수민은 웃지 않았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듯 심하연을 바라보았다.
  • “언니, 안색이 안 좋은데, 어디 아픈 거 아니에요?”
  • 그 말을 들은 하연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 “괜찮아요. 어젯밤에 잠을 조금 설쳐서 그런 걸 거예요.”
  • “진짜요?”
  • 임수민은 그다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 “하지만 안색이 정말 너무 안 좋은데요. 진짜 괜찮은 거 맞아요? 아니면 월차 쓰고 병원에 가보세요.”
  • “진짜 괜찮아요. 어제의 총결은 다 끝났나요?”
  •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았는데 또다시 일 얘기로 이어지자 그런 그녀를 어쩔 수 없다는 듯 임수민은 정리를 마친 서류들을 가져온 뒤 그녀에게 따듯한 물을 한잔 따라주었다.
  • “병원에 안 가볼 거면 따듯한 물이라도 많이 마셔요.”
  • 임수민은 심하연이 직접 뽑은 비서로, 평소 꽤나 일 처리가 빠릿빠릿했지만 두 사람은 일 외에는 어떠한 사적인 교류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가 이처럼 자신을 신경 써줄지는 몰랐기에 하연은 마음이 포근해지는 것을 느끼며 따뜻한 물을 몇 모금 들이켰다. 따뜻한 물을 조금 마시고 나서야 몸을 감돌던 냉기가 사라지며 편안해졌다. 하지만 임수민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듯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 “오늘 보고서는 제가 가서 올릴까요? 언니는 사무실에서 쉬고 계실래요?”
  • 하연은 고개를 저었다.
  • “그럴 필요 없어요. 제가 하면 돼요.”
  • 그저 몸이 조금 안 좋은 것뿐이다. 그녀는 그 정도로 유난을 떠는 사람이 아니었다. 조금만 문제가 생겼다고 자신의 일을 다른 사람에게 대신시킨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나태해질 뿐이다.
  • ‘이후에 몸이 안 좋을 때 도와주는 사람이 없게 되면 어쩌려고?’
  • 심하연은 수중의 서류들을 정리해들고는 몸을 일으켜 진우현의 사무실로 향했다. 그녀의 사무실과 우현의 사무실 사이는 거리가 꽤 있었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거리였지만 아마 오늘 몸이 좋지 않은 탓이었는지 하연은 사무실까지 걸어가는 것이 힘에 부쳤다.
  • 똑똑.
  • “들어와요.”
  • 얼음장처럼 차갑고도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문 안쪽에서 들려오고 나서야 하연은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려던 하연은 사무실 안에 사람이 한 명 더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얀색의 원피스는 강유라의 가는 허리라인을 그대로 드러내고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가 그 옆으로 부드럽게 늘어져있었다. 지금 순간, 통유리로 되어있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 속의 강유라는 아름다우면서도 생기가 넘쳤다. 상대의 존재를 확인한 하연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 “왔어, 하연아?”
  • 강유라가 밝게 웃으며 그녀를 향해 걸어와서는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몸을 숙여 그녀를 끌어안았다. 몸을 더욱 뻣뻣하게 굳힌 채로 강유라의 어깨너머로 시선을 던지던 하연은 마침 우현의 짙고도 검은 두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남자는 사무실 테이블 옆에 기대선 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두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연이 아직 굳어있는데, 강유라가 멀어지며 말을 꺼냈다.
  • “네 일은 진우현한테 다 들었어. 힘들었겠다.”
  • 강유라의 얼굴에 안타깝다는듯한 기색이 비쳤다.
  • “뭐라도 도울 일이 있다면 나한테 꼭 알려줘.”
  • 그녀의 말을 들은 하연은 멈칫했다.
  • ‘진우현한테 다 들었다고?’
  •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 ‘하긴, 나와 진우현의 결혼은 처음부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으니, 숨길 수도 없겠지.’
  • 숨길 수 없다면 확실하게 설명을 해야 하는 것이 맞았다. 게다가 그녀 역시 강유라에게 고마운 일이 있었기에 하연은 씁쓸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창백한 입술을 틀어올려 미소 지었다.
  • “고마워. 넌 언제 돌아온 거야?”
  • “난 어제 비행기로 돌아왔어.”
  • ‘어제? 그렇다면 진우현은 강유라가 돌아오자마자 만나러 간 거였겠네. 역시 마음속 1순위라는 건가.’
  • “근데 너 안색이 왜 그래? 어디 아픈 건 아니지?”
  • 강유라가 갑자기 물어왔다. 그 말에 느긋하게 책상 옆에 기대 있던 진우현이 시선을 들어 심하연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찬찬히 훑어보던 그가 눈썹을 찌푸렸다.
  • “어젯밤에 비를 맞은 것 때문인 거야?”
  • “비를 맞다니?”
  • 강유라가 궁금한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에 심하연이 한숨을 짧게 내쉬곤 무언가 설명하려던 순간 진우현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몸도 안 좋으면서 왜 센 척이야? 너 하나 없다고 회사가 안 돌아가는 거 아니니까, 돌아가서 쉬어.”
  • 그 말을 들은 강유라는 진우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 ‘저 자식 왜 갑자기 화난 것처럼 보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