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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버려진 약

  • 심하연의 돌직구에 강유라가 움찔하더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 “아니, 나는 그런 뜻이 아니라…”
  • 변명 같지도 않은 변명을 심하연은 그저 흘려들었다.
  • 클리닉을 나서기 전, 고민성이 약봉지를 내밀며 강유라에게 당부했다.
  • “친구분이 약 먹기 싫다고 하셨지만 아무래도 필요할 것 같아. 몸에 좋은 한약재들로 만든 거니까 이것만 다 마시면 곧 나을 거야.”
  • “고마워.”
  • 강유라가 약봉지를 받아들었다.
  • 이윽고 세 사람을 태운 차가 진 씨 저택에 도착하자 심하연이 힘겹게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 같았고 빨리 침대에 누워 쉬고만 싶었다.
  • 차에서 내리는 순간 심하연은 눈 앞이 아찔해났다. 다리에 힘까지 풀려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 바로 그 때, 순식간에 심하연 앞에 나타난 진우현이 잽싸게 그녀를 낚아챘다.
  • “약도 주사도 싫다고 하니 이 지경이지. 너는 참…”
  • 뒤따라 내린 강유라가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을 힐끗 보고는 재빨리 다가왔다.
  • “내가 할게. 너는 약 챙겨.”
  • 심하연을 부축해 집에 들어서며 강유라는 마중 나오는 고용인들한테 인사했다.
  • 강유라를 보고 깜짝 놀란 고용인들은 세 사람이 윗층으로 올라간 뒤에야 한데 모여 수군대기 시작했다.
  • “내가 잘못 본 거 아니죠? 유라 아가씨 맞죠?”
  • “유라 아가씨가 누군데요?”
  • 저택에 있은 지 꽤 오래 된 고용인들은 강유라를 대뜸 알아봤으나 새로 온 몇은 누군지 전혀 모르는 눈치들이었다.
  • “강유라 아가씨요. 진 대표님께서 입에 달고 다니시던 그 분.”
  • “아, 그 분이에요?”
  • 누구냐고 묻던 고용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아니, 그 분이 여긴 왜 왔대요? 진 대표님은 이미 결혼한 몸이신데…”
  • “모르는 소리. 가문 사이의 정략 결혼에 무슨 감정이 섞였겠어요?”
  • 고용인 하나가 가문의 큰 비밀을 알기라도 하는 듯한 표정으로 소리를 낮춰 썰을 풀기 시작했다.
  • “소싯적 물에 빠졌던 진 대표님을 구해준 분이 바로 유라 아가씨였어요. 그 때부터 진 대표님께서 유라 아가씨를 생명의 은인이라 부르며 연모하기 시작했고 유학 떠난 유라 아가씨를 지금껏 기다려 온 거예요.”
  • “어머머, 그러면 우리 사모님께선…?”
  • “편찮으셨던 진 씨 가문 노부인께서, 대표님이 빨리 가정을 이루시길 바라셨던 모양이예요. 마침 그 때 우리 사모님 가문이 파산되었고요. 이쯤 하면 알겠죠?”
  • 이야기를 마친 고용인은 눈을 치켜뜨며 목소리를 더 낮췄다.
  • “이건 명문가 비밀이니까 소문내면 안 돼요. 아셨죠 다들?”
  • “그럼요. 그나저나 두 분, 금슬 좋으신 줄로만 알았더니 쇼윈도였네요.”
  • “말했잖아요. 정략 결혼이라고요…”
  • 그 때, 그들 뒤에서 묵직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 어느샌가 고용인들이 모인 뒷쪽에 나타난 집사가 노기 서린 얼굴로 그들을 쏘아보고 있었다.
  • “한가해? 할 일들 없나?”
  • 고용인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 반백 살도 넘은 집사의 희끄무레한 눈썹이 찌푸려졌다.
  • 그 강유라가 돌아왔을 줄이야…
  • 어쩐지, 어제 저녁 사모님께서 상태가 안 좋으시더라니.
  • 한편, 강유라는 심하연을 부축해 방으로 들어섰다.
  • “고마워.”
  • “아니야. 얼른 누워서 쉬어.”
  • 심하연이 침대에 누운 뒤, 방에 들어선 진우현은 그녀에게 스치듯 눈길을 주고는 곧 강유라를 바라봤다.
  • “데려다 줄까?”
  • 진 씨 저택에 강유라가 오래 머무르긴 아직 이른 듯했다.
  • “응.”
  • 진우현을 따라 문을 나서며 무심하게 방 안을 한 번 더 둘러보던 강유라는 문득 벽에 걸린 고급 수트 상의를 발견했다.
  • 진우현이 즐겨 입는 스타일의 특제 수트였다.
  • 그렇다면 이 방은…
  • 강유라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조용히 진우현을 따라 나갔다.
  • 모두 나간 뒤, 눈을 뜬 심하연은 새하얀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 ‘뱃속 아기… 어떡하지?’
  • 그녀와 진우현의 아기가 생겼다.
  • 진우현에 대한 감정이야 잘 감추기만 하면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문제될 게 없지만… 임신은? 달이 차면 배가 불러와 감출래야 감출 수가 없게 될 텐데.
  • 생각할 수록 머릿속이 복잡해지다 못해 흐리멍텅해 진 심하연은 깜박 잠이 들었다.
  • 몽롱한 의식 속.
  • 자신의 옷깃을 풀어헤치는 손길이 느껴졌다. 곧 누군가의 서늘한 몸이 자신의 몸 위에 포개어졌다.
  • 그 시원한 촉감이 열에 시달리는 심하연에게는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어 그녀는 무의식 간에 팔과 다리를 모아 그 몸에 자신의 몸을 꼭 밀착시켰다.
  • 이내 남자의 거친 숨소리가 점점 가까워 오다가 부드럽고 촉촉한 무언가가 그녀의 입술을 콱 막고 입 속으로 밀고 들어왔다.
  • 이질감에 심하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입 속을 휘젓고 다니는 그것을 꼭 깨물었다. 동시에 남자의 아픈 듯한 들숨 소리와 함께 그녀의 입 속에 피 냄새가 퍼졌다.
  • 한참 뒤, 볼이 꼬집히는 느낌과 함께, 남자의 굵은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 ‘이게 오냐오냐 해 줬더니, 물기까지 해?’
  • 얼굴이 아파 오자 심하연은 웅얼거리면서 볼을 꼬집는 손을 밀어내고는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 그녀가 깨었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 곁에서 지키고 있던 고용인이 그녀가 깨자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 “사모님, 드디어 깨셨네요.”
  • 고용인은 다가가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 “열이 좀 내리신 것 같아요. 정말 다행이에요.”
  • 잠에서 방금 깬 심하연은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기억 조각들을 더듬다가 고용인에게 물었다.
  • “언제부터 와 있었어요?”
  • “사모님께서 잠드실 때부터 쭉이요.”
  • 고용인의 대답에 심하연의 눈망울에 차오르던 기대가 쏙 가라앉았다.
  • 꿈인지 현실인지 가늠이 안 되는 기억 속에서 자신을 안아 주던 남자.
  • 분명… 진우현이었다.
  • 그 기억 조각들조차 점점 희미해져 가다가 사라져 버렸다.
  • 아니었네.
  • 잠겼던 사색에서 헤어나와 보니 고용인이 약 한 사발을 들고있었다.
  • “마침 약 데워놓았는데 식기 전에 얼른 드시죠.”
  •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과 함께 지독한 약 냄새가 코를 찌르자 심하연은 본능적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연신 손사래를 쳤다.
  • “사모님, 이거 식으면 약효가 떨어진다고 하더라고요. 얼른요.”
  • 심하연이 빨리 낫길 바라는 마음이 급했던지 고용인은 연신 뒤로 피하는 심하연을 마다하고 약사발을 그녀의 코 앞까지 들이밀었다.
  • “그… 저기 둬요. 좀 있다 먹을게요.”
  • 심하연은 한 손으로 다가오는 약사발을 막아내며 다른 한 손으로 침대맡에 놓인 작은 탁자를 가리켰다.
  • “하지만 따끈따끈할 때 드시게 하라고…”
  • “지금은 배가 너무 고파서요. 일단 먹을 것 좀 가져다 줄래요? 그거 먹고 약 먹으려고요.”
  • 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아프던 몸이 좀 개운해지자 배가 무지 고파왔다.
  • 고용인이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약사발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 “그러네요. 여태껏 드신 게 없으니… 인츰 차려 올게요. 잠시만요 사모님.”
  • 방을 나간 고용인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자 심하연은 이불을 걷고 일어나 약사발을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 거무칙칙한 액체가 쏟아내려 변기로 흘러들어갔다.
  • 심하연은 행여 흔적이라도 남길까 봐 물을 몇 번이고 더 내렸다.
  • 강유라의 지인이 지어준 한약 한 사발은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 말끔해진 변기 속을 힐끗 들여다보고 심하연이 돌아서는 순간.
  • 진우현의 날카로운 눈길과 마주쳤다.
  • 화장실 문 앞에 팔짱을 끼고 선 진우현이 새카만 눈동자로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 “지금 뭐 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