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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나를 잘 알아?

  • 고용인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다.
  • “버, 버렸어요. 대표님…”
  • 진우현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 “뭐?”
  • 고용인은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대표님, 버리시는 건 줄 알고…”
  • 진단서란 건 알았지만 그냥 집주인이 버린 종이 쪼가리라 여기고 별 생각 없이 버렸었다. 그저 돈 벌어 먹고 살려고 고용된 사람이 휴지통에 버린 것들조차 유의할 리가 없었다. 한약을 데울 때에야 전에 봤던 진단서가 문득 생각나 사모님을 걱정하던 차였다.
  • 진우현의 미간은 점점 더 구겨졌다.
  • 어쩐지 수상하더라니.
  • 선심에 남에게 우산을 내 줬다 해도, 비가 끊기를 기다리거나 저택 기사에게 전화해 데리러 오게 하면 되었다.
  • 쏟아지는 비를 오롯이 다 맞으며 돌아올 필요가 없었다.
  • 큰 일이라도 일어난 게 아니라면.
  • 진단서란 소리에 멍해졌던 집사가 근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 “대표님, 사모님께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 “가 봐야겠어.”
  • 진우현은 차 키와 상의를 집사에게 넘겨주고는 한 마디를 남기고 침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 *
  • 고용인이 나간 뒤, 잠시 누워 휴식하려던 심하연은 전화 한 통을 받았다.
  • 혜림 그룹 비서실장에게서 걸려온, 그녀가 담당하고 있는 프로젝트에 관한 내용이었다.
  • 어제 하루 종일 아프다 보니 회사 일에 대타로 찾아둔 이도 없었다.
  • 통화를 마친 심하연은 절로 구겨지는 미간을 꾹꾹 눌렀다.
  • 하루 미뤄뒀을 뿐인데 일감이 이렇게 쌓일 줄이야.
  • 오늘은 재택근무라도 해서 밀린 업무를 해결해야 할 것 같았다.
  • 노트북을 켜고 쌓인 이메일을 확인하던 심하연은 문득 문 밖에서 가까워지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 어느 고용인인 줄 알고 다시 노트북에 눈길을 돌려 밀린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 발자국 소리는 그녀의 곁에 멈췄다.
  • 옆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에 심하연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다가 진우현의 새카만 눈동자와 마주쳤다.
  • 순간 흠칫한 그녀가 물었다.
  • “네가 왜 여기에?”
  • 그러자 진우현의 입가가 한 쪽으로 얄밉게 삐딱해지더니 냉랭하게 뱉었다.
  • “여기 내 방이거든.”
  • 홍두깨 대답에 심하연이 어정쩡해 다시 물었다.
  • “아침부터 말투가 왜 그래? 어젯밤 밖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은 거야?”
  • 진우현의 눈썹이 꿈틀했다.
  •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화가 났는데라는 말이 입가에서 맴돌았지만 뭔가 생각난 듯 그가 입을 다시 열었을 때는 말이 바뀌었다.
  • “밖이라니. 집에 있었는데.”
  • 그러자 심하연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 진우현은 그런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 “그 놀란 표정은 뭐지? 하긴, 쿨쿨 자느라 내가 옆에 누워있었던 것도 몰랐겠지.”
  • 그 말에 심하연의 표정이 아리송해졌다.
  • 꿈이 아니란 걸 알았다.
  • 강유라를 찾아간 줄로만 알았던 진우현이 집에, 그것도 자신 곁에 내내 누워있었다는 걸 알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 “난 또… 어제 외박한 줄 알고…”
  • 그 말에 진우현은 더 대답이 없었다.
  • 어색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서 감돌았다.
  • 심하연의 말 속에 숨은 뜻을 진우현이 모를 리가 없었다.
  • 강유라가 돌아온 지 겨우 이틀밖에 안 되었지만 두 사람 사이는 벌써 너무나도 서먹서먹해져 버렸다.
  • 하지만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하겠다는 듯, 두 사람 모두 이 난처한 대화 주제는 피하려 하고있었다.
  • 한동안의 침묵을 깨고 진우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 “약은 왜 안 먹는 거지?”
  • 또 이 질문이다.
  • 노트북에 시선을 돌리며 심하연은 여전히 담담하게 흘러가는 듯 대답했다.
  • “어제는 그냥 싫었고, 오늘은 먹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 “그럼, 진단서는 뭔데.”
  • 진우현의 기습 질문에 바쁘게 마우스를 움직이던 심하연의 손이 뚝 멈췄고 그걸 진우현은 캐치했다.
  • 그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 역시 뭔가를 숨기고 있군.
  • 심하연은 숨이 멎었다.
  • 생각도 멈췄다.
  • 자신의 모든 것이 한순간 그 자리에 멈춰진 것만 같았다.
  • 진우현의 뾰족한 시선만이 콕콕 찔러올 뿐.
  • 잠시 뒤, 심하연은 천천히 진우현을 바라봤다.
  • “무슨 진단서?”
  • 의문이 가득 찬 그녀의 눈망울에 진우현은 대답 대신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 자연스러운 몸짓과 눈빛, 의아하다는 말투.
  • 진우현이 묻는 순간 멈칫한 그 손만 아니었다면 전혀 흠잡을 데 없는 연기였다.
  • 진우현의 눈매가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 “계속 모르쇠 댈 거야?”
  • 하지만 심하연의 눈길과 말투에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 “뭐가. 무슨 진단서를 말하는 거냐니까.”
  • 솔직히 진단서란 말에 심장이 멈출 뻔했다.
  •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지워지고 찢겼었는데, 어떻게?
  • 설마 임신했다는 사실까지 안 건가?
  • 하지만, 그녀는 재빨리 침착함을 되찾았다.
  • 집안 사업이 파산되자, 남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안은 부잣집 아가씨에서 한 순간 나락으로 떨어진 심하연이었다.
  • 그 바닥에서 악착같이 기어일어나, 피와 땀을 들여가며 심 비서가 되었다.
  • 진영그룹과 왕래가 잦은 기업들의 회장님들도 그녀만 보면 친절하게 인사를 건넸다.
  • 진우현의 아내라는 신분도 신분이지만 더우기는 그녀의 우아하고도 차분한 자태와 빼어난 실무 능력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다.
  • 2년 간 그녀가 쏟아부은 모든 노력은 그녀를 배신하지 않았고, 그녀는 더이상 일만 터지면 허둥거리는 소녀가 아니었다.
  • 더군다나, 확신된 거라면 진우현이 그녀에게 물을 리가 없었다.
  • 그 누구보다도 자신을 믿는 진우현이니까.
  • 그냥 찔러보는 게 분명했다.
  • 심하연은 빛의 속도로 계산을 마쳤다.
  • 진우현은 그녀 앞에 다가가 앉았다.
  • 두 사람의 눈길이 같은 높이로 맞춰졌다.
  •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온 심하연이 어떤 과정을 겪어 왔는지 진우현은 너무나도 잘 알고있었다.
  • 자신의 회사에 영입한 것도 그녀가 뭐든 혼자 잘 해낼 수 있도록 성장하길 바라서였다.
  • 2년이라는 짧은 기간, 그 어려운 걸 심하연은 해냈다.
  • 나무랄 데가 없는 든든한 서포터로 성장했다.
  • 수백 명을 상대로 진행되는 브리핑도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깔끔하게 마치곤 했으니.
  • 자신 앞이라고 쉽게 흔들릴 심하연이 아니었다.
  • “심하연, 네가 어떤 여자인 지는 잘 알아. 하지만 내 앞에서만큼은 조금 솔직해 졌으면 좋겠어.”
  • 문초라도 하는 듯한 진우현의 말투에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심하연이 입을 열었다.
  • “그래? 나를 잘 안다고?”
  • 순간, 커다란 손이 그녀의 뒷목을 아프지 않게 움켜잡았고 두 사람의 이마가 한 데 맞대어졌다. 둘의 뜨거운 입김이 한 데 엉켜졌다.
  • “널 가까이에서 지켜본 지 이십 년도 넘었고 잠자리를 함께 한 나날도 2년이나 되었는데 나보다 널 더 잘 아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 진우현의 악다문 이빨 사이로 으르렁대는 듯한 말소리가 새어나왔다.
  • 그의 말에 담담하던 심하연이 벙해졌다.
  • ‘그렇게나… 오래 됐어? 그런데도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르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