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지우는 수밖에
                    
                                                    - 한참 뒤에야 심하연은 한숨을 내 쉬었다. 
- 모르는 게 약이지 뭐. 알면 더 곤란해질 거 아니야.  
- 정략 결혼이라고, 그저 모종의 거래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각자 필요한 몫을 챙기는 게 맞는 것 같았다. 
- 그렇게 생각하며 심하연은 살포시 진우현을 밀어내고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 “있지. 아무튼 넌 아니야.” 
- 그 말에 진우현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 “내가 아니라면 누군데? 말해 봐.”  
- 진우현은 자신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높아졌다는 걸 인지하지 못한 듯했다.  
- 심하연이 대답이 없자, 그는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 “누구야? 대답해.”  
- 그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었다.  
- 심하연의 어깨를 움켜쥔 손에도 점점 힘이 들어갔다.  
- 심하연이 눈썹을 찡그리며 그를 밀어냈다. 
- “아파. 이거 놔.” 
- 진우현은 대뜸 그녀의 어깨를 놓아주었지만 질문은 멈추지 않았다. 
- “고의로 그런 건 아니야. 사과할게. 그러니까 대답해 줘. 그 사람 누구야? 진단서는 또 뭐고?” 
- 이 남자가 이토록 집착이 강한 사람이었나? 
- 심하연은 막무가내라는 듯 대답했다. 
- “나, 나 자신이라고. 나 자신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거 아니야.” 
- “진단서는?” 
- “그놈의 진단서는 대체 뭔데? 보여줘 봐.”  
- 모른다고 딱 잡아뗐지만, 진우현은 전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 그녀의 목소리에는 확신에 차 있었다.  
- 하지만 그 점이 진우현은 더 수상했다.  
- 만에 하나 정말 모르는 일이라 해도, 이토록 집요하게 물으면 혹시나 하고 기억을 더듬어 보기라도 하는 게 정상일 터. 
- 하지만 심하연은 너무나도 강경한 태도였다. 
- 마치 자신이 진단서를 보여주지 못한다는 걸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 “고용인 하나가 휴지통에서 진단서 한 장을 발견했다고 하더군.” 
- 한 장? 
- 떠보기는. 
- 심하연은 낯빛 한 번 변하지 않았다. 
- “그래? 봐 봐.” 
- “찢겨져 버려졌다고 했어. 우리 방 휴지통에. 분명 내 건 아닐 테고. 그럼 누구 건지 뻔하지 않아?” 
- “아, 찢겨서 버린 그 거? 그건 내 거 맞아. 내가 정신이 없어서 깜박했네.”  
- 이 정도는 인정해도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 아직 다 들킨 건 아니라는 확신이 들어서였다.  
- 심하연이 눈길을 다시 노트북에 돌렸다. 
- “그 진단서가 왜?”  
- 진우현의 눈빛이 맹수처럼 날카로워졌다. 
- 심하연의 티끌만 한 표정 변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녀를 주시하며 다시 물었다. 
- “무슨 진단서였어?” 
- 심하연은 끄덕도 않았다. 
- “건강검진 진단서.” 
- 그 말에 진우현은 픽 웃었다. 
- “지금 누굴 바보로 아는 거야? 건강검진 진단서를 찢어서까지 버릴 필요가 있었다고?” 
- 재빨리 그 한 마디를 마친 진우현은 그녀의 새하얀 손목을 확 움켜잡았다. 
- “대체 숨기려는 게 뭐지? 무슨 내용이었기에?” 
- 비를 그대로 다 맞으며 집에 돌아오질 않나, 된감기로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병원도 가기 싫다, 약도 먹기 싫다 고집을 피우질 않나, 평소와는 너무나도 다른 심하연의 행동이 그 진단서의 내용과 관련된 게 틀림없었다. 
- “비에 다 젖어서 글자가 다 지워졌어. 그래서 버린 거야.” 
- “그냥 버리면 되지 왜 찢었어?”  
- 심하연의 대답이 여전히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진우현은 계속 집요하게 따졌다. 
- 심하연은 그런 진우현을 돌아봤다. 
- 진우현의 빨려들어갈 듯 새카만 눈동자는 그 깊이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 그녀는 한숨을 폭 내 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 “내가 찢은 게 아니야.” 
- 진우현의 눈썹이 순간 꿈틀했다. 
- “그러면?” 
- “비에 다 젖어서 호주머니 속에 덕지덕지 붙어있었어. 그나마 한 조각씩 겨우 떼어내 봤더니 글자마저 다 지워지고. 그래서 버린 거야.” 
- 그 말에 진우현이 움찔했다. 
- 그 때 상황에서 유추해 보니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다. 
- 온 몸이 다 젖어서 들어왔는데, 호주머니 속의 종이 한 장만 성할 리가 없었다. 
- 고용인이 휴지통에서 발견했을 때는 다 말라서 누군가가 찢은 것처럼 보였을 테고. 납득이 되는 듯, 심하연의 손목을 움켜쥔 진우현의 손이 점점 느슨해졌다. 
- 심하연은 목구멍까지 튀어나오던 심장이 다시 제 자리로 내려가는 것 같았다. 
- 바로 진우현을 되려 떠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이 시점에서 한술 더 떠서, 그의 의심을 죄다 가시게 할 타산이었다. 
- 낮게 내리깐 목소리로 심하연이 말을 이었다. 
- “뭐가 그리 걱정인데? 혹시 임신 진단서였을까 봐?”  
- 첫 마디에 진우현의 입가에 피어나던 가소롭다는 듯한 미소가 그 뒷마디에 그대로 굳었다. 
- 곧 그의 얼굴에서 모든 표정이 사라졌다. 
- 그리고는 심하연을 위아래로 훑어보기 시작했다. 
- 심하연은 장난스런 표정을 지어보였다. 
- “뭐야. 설마 진짜 그런 걱정 한 건 아니지? 임신이라도 했을까 봐, 유라와 둘 사이에 걸림돌 생길까 봐.” 
- 진우현의 눈매가 또다시 가늘어졌다.  
- 뭔가 의심할 때마다 버릇처럼 나오는 표정이었다. 
- “임신했어?” 
- 심하연은 어깨를 으쓱했다. 
- “그렇다면 그 진단서를 더 소중하게 간직했겠지. 애를 지우는 조건으로 두둑이 뜯어낼 수 있을 테니까.” 
- “뭐라고?”  
- 진우현의 낯빛이 확 바뀌는 게 보였다. 
- “애를 지우겠다고?” 
- 긍정인지 부정인지 뜻을 모를 말투에 심하연은 가슴이 확 조여왔다. 
- “만약 애를 가졌다면 그럴 수도 있단 뜻이지.” 
- “만약이 아니라면?”  
-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심하연은 도통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 “만약이 아니라는 건 또 뭐야.”  
- 진우현의 새카만 눈동자에는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 “만약 애를 가졌다면 진짜로 지울 거야?” 
- 한 마디씩 뱉는 말이 심하연의 달팽이관을 아프게 때렸다.  
- 그녀는 저도 모르게 머리를 끄덕이며 눈을 깔았다. 
- “아마도.” 
- 그녀는 미처 보지 못했다.  
- 자신이 대답하는 순간, 당장 잡아먹기라도 할 듯 사나워진 진우현의 눈빛을. 
- 진우현은 가슴 속이 콱 막히는 것 같았다. 
-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고 속이 울렁거렸다. 
- 하지만 이어지는 심하연의 말에 찬물을 확 끼얹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 “안 지우면 너랑 유라는 어떡하라고.” 
- 너랑 유라는 어떡하라고. 
- 메아리마냥 귓가에 울리는 그 한마디에 진우현의 분노가 눈 녹듯 사라졌다. 
- 눈 앞의 심하연이 점점 더 또렷하게 보였다. 
- 긴 속눈썹에 눈빛이 가려진 채,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은 그녀는 쏟아지는 폭우 속에 피어난 한 떨기의 청초한 꽃과도 같았다.  
- 그녀를 넋이 나간 듯 바라보다가 진우현은 벌떡 일어섰다. 
- “오늘은 집에서 쉬어.”  
- 다시 차겁고도 냉정한 진우현으로 돌아온 말투였다.  
- 침실을 나서는 진우현의 얼굴은 어둡다 못해 먹물이 떨어질 지경이었다. 
- 심하연의 마지막 한 마디,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을 담담히 읊조리는 그 한마디가 귓가에서 끊임없이 맴돌았다. 
- 그는 강유라를 저버릴 수가 없었다. 
- 저버리면 안 되었다. 
- 문득 그 날의 세찬 물결과, 사정없이 입과 코로 밀려들던 강물과, 숨 막히는 고통 속 몸부림이 생각났다. 
- 의식이 점점 흐려지고 시야가 어두워지는 와중에 보이던, 자신을 향해 미친 듯이 헤엄쳐 오는 가냘픈 실루엣도 생각났다. 
- 자세히 보기도 전에 진우현은 의식을 잃었고 그가 깼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눈물이 그렁그렁해 자신을 바라보는 강유라와 그녀의 손에 감긴 새하얀 붕대였다. 
- 모두가 강유라가 그를 구하느라 손을 다쳤다고 했다. 
- 손만 다친 게 천만다행으로, 자칫하면 목숨마저 잃을 뻔한 상황이었다고 했다. 
- 그 때 그는 다짐했었다. 
- 그녀를 평생 지켜 주겠다고. 
- 그녀가 원한다면 자신의 곁을, 아니 목숨마저 내어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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