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5화 소위 말하는 자존심이라는 것을 지키는 것

  • 그녀는 병원에 갈수 없었다. 병원에 가는 순간 들켜버릴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이들이 이 아이에 관해 알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말하자니 웃기지만, 그녀는 자신의 그나마 남아있는 얼마 안 되는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다. 자신이 진우현과의 가짜 결혼을 승낙한 그날부터 그녀의 소위 말하는 그 자존심이라는 것은 이미 없었던 것임을 그녀 또한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 ‘지금처럼 그의 앞에서, 그리고 그가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 앞에서, 나에게 자존심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 있기나 한 걸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 심하연은 시선을 떨구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사람들의 비웃음을 살만한 일들을 전부 드러내놓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말에 진우현은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로 핸들을 틀어 무서운 기세로 갓길에 차를 세웠다. 그런 그의 모습에 심하연은 자신더러 차에서 내리라는 것으로 이해하고 차 문을 열기 위해 손을 뻗었다.
  • 철컥-
  • 하지만 다음 순간 차 문은 그대로 잠겨버렸다. 진우현은 백미러를 통해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 “병원엔 왜 안 가겠다는 거야?”
  • ‘어제 비를 맞고 돌아온 다음부터 내내 이상하게 구네.’
  • 심하연은 침착함을 유지한 채로 입을 열었다.
  • “정 힘들면 내가 알아서 갈 거야.”
  • 그 말에 진우현이 위험한 분위기를 잔뜩 풍기며 눈을 찡그리자 강유라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 “우현아, 혹시 내가 있어서 그런 거 아닐까? 아니면… 나 먼저 여기서 내릴 테니까, 넌 하연이 데리고 병원에 가볼래? 아무래도 몸 상태가 심상치 않은 것 같아서, 더 끌면 안될 것 같아.”
  • 말을 마친 강유라는 진우현 쪽으로 몸을 기울여 문의 잠금 버튼을 누르려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심하연이 보게 된 것은 진우현이 그런 그녀를 막으며 두 사람의 팔이 부딪히게 된 모습이었다.
  • “그런 말 하지 마.”
  • 진우현은 미간을 찡그린 채 심하연을 한번 살펴보고는 말을 이어갔다.
  • “너 때문 아니니까 괜한 생각 하지 마.”
  • 두 사람의 손을 슬쩍 쳐다보는 강유라의 눈빛에 찰나의 순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스쳤다. 심하연은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강유라의 시선이 그녀를 향하고 나서야 심하연은 조금은 당황한 듯 시선을 거두었다.
  • “하연아, 내가 널 오해했나 봐. 난 네가 나 때문에 우현이한데 심술부리는 건 줄 알고, 정말 미안해.”
  • 심하연은 담담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강유라가 자신을 도와준 일로 그녀에게 고마운 마음이 없었다면 심하연은 그녀가 여우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닐지 의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그녀는 자신에게 고마운 사람이었기에 심하연은 억지로라도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 “괜찮아.”
  • 하지만 강유라는 웃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 “네가 병원에 가기 싫어하는 게 설마 병원에 가는 게 무서워서인 건 아니지? 내 친구가 귀국하고 클리닉을 오픈했는데, 괜찮으면 걔한테 한번 가볼래?”
  • 말을 마친 그녀는 또 진우현을 향해 말했다.
  • “우현아, 네 생각은 어때?”
  • 하지만 진우현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 “클리닉? 믿을만한 거야?”
  • 강유라는 다소 난감한 듯 대답했다.
  • “당연하지. 믿을만하지 않았다면 내가 소개했겠어? 너 나 못 믿어?”
  • 잠깐 생각하던 진우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클리닉으로 가자.”
  • 이에 심하연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 “난…”
  • 하지만 다음 순간, 진우현의 차는 그녀가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그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강유라는 여전히 그녀에게 듣기 좋은 말들을 하고 있었다.
  • “하연아, 걱정하지 마, 내 친구 성격도 좋고 환자들한테도 인내심 있고 다정해. 내가 미리 말 잘해 놓을 테니까, 때 되면 걔랑 상의해 보고 너 원하는 대로 해. 괜찮지?”
  • 부드럽고 다정한 강유라와 비교하면 하연은 완전히 정반대였다. 아픈데도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 ‘내가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 심하연은 더 말하지 않았고 차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클리닉에 도착하자 강유라는 다급히 차에서 내리는 하연을 부축하며 다정하게 말했다.
  • “아직도 어지러워? 힘들면 내 어깨에 기대.”
  • 강유라의 말투는 나긋나긋했다. 몸에서는 옅은 가드니아 향수 냄새가 풍겼고 그녀를 부축하는 동작 또한 부드러웠다. 하연은 시선을 떨구며 생각했다.
  • ‘강유라는 생긴 것도 예쁘고 사람도 너무 괜찮아. 가장 중요한 건 진우현의 목숨을 구하기까지 했다는 거지. 내가 진우현이었어도 아마 좋아했을 거야.’
  • 강유라의 친구가 나오자, 그녀는 그에게 다가가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하얀 가운을 입고 있는 남자의 시선이 마지막엔 심하연의 얼굴 위에 머무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그녀 쪽으로 걸어왔다.
  • “안녕하세요. 유라 친구분이시죠? 고민성이라고 합니다.”
  • 하연은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 “안녕하세요.”
  • “열이 있으신가요?”
  • 고민성이 가벼운 목소리로 물으며 자신의 손등을 심하연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갑작스럽게 다가온 손길에 심하연이 옆으로 피하자 그런 그녀의 반응에 고민성은 살짝 웃으며 담백하게 말했다.
  • “그냥 체온을 체크해 본 거예요.”
  • 그리고 그는 체온계를 꺼냈다.
  • “먼저 체온부터 재보죠.”
  • 심하연이 체온계를 받아들자 뒤쪽에서 진우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체온계 쓸 줄은 알지?”
  • “…”
  • 하연은 그런 그에게 대꾸하지 않았다.
  • ‘어떻게 체온계 쓰는 법도 모르겠어?’
  • 하지만 몸이 아파서인지 머리가 어질어질했던 탓에 그녀의 동작은 느리기만 했다. 그녀가 체온계를 가져다 대자 고민성은 그대로 잠시 기다려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이를 지켜보던 강유라는 기회를 틈타 진우현에게 고민성을 소개했다.
  • “우현아, 이쪽은 내가 전에 통화하면서 말했었던 민성이. 의학 쪽으로 꽤 실력이 좋긴 한데 자유로운 걸 좋아해서 귀국하고 이 클리닉을 오픈했어. 민성아, 이쪽은 진우현, 그러니까…”
  •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내 부끄러운 듯 입을 열었다.
  • “내 친구.”
  • “친구?”
  • 그 호칭에 고민성은 눈썹을 들어 올렸다. 곧이어 그의 시선이 무의식중에 심하연의 얼굴을 스치고 다시 진우현에게로 돌아왔다.
  • “안녕하세요. 고민성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 진우현은 한참이 지나고서야 손을 들어 상대방과 가볍게 악수했다.
  • “진우현입니다.”
  • “알아요.”
  • 고민성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애매한 말을 했다.
  • “유라한테 많이 들었어요. 그쪽에 대한 평가가 꽤 높거든요.”
  • “민성아…”
  • 강유라는 정곡을 찔리기라도 한 듯 하얗던 두 뺨이 순식간에 발그레해졌다.
  • “왜? 내가 뭐 틀린 말 한 거 있어? 너 평소에 자주 사람들 앞에서 저 사람 칭찬하잖아?”
  • “그만해. 너 더 이상 말하지 마.”
  • 두 사람의 대화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와중, 진우현은 시선을 내려 심하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꺼풀을 살짝 늘어뜨린 채 그곳에 앉아있었다. 두 뺨 옆으로 몇 가닥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흘려내려 그녀의 이마의 절반을 가리고 있었다. 동시에 그녀의 아름다운 두 눈도 가려버려 그녀의 모든 감정들을 그 뒤로 감추어 버렸다. 그녀는 세상과 동떨어져 있는 듯, 이 모든 것들이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인 것처럼, 그렇게 조용히 앉아있었다. 진우현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졌다. 5분 뒤, 체온계를 받아 든 고민성은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 “체온이 조금 높은데요. 주사 한 대 맞죠.”
  • 하지만 심하연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
  • “주사는 안 맞을 거예요.”
  • 그 말에 고민성은 그녀를 쳐다보다 이내 웃음 지었다.
  • “아플까 봐 그래요? 걱정 말아요. 난 꽤 부드러운 사람이니까.”
  • 강유라도 이에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하연아, 건강이 더 중요하지.”
  • 하지만 심하연은 고개를 저으며 고집했다.
  • “전 주사 같은 거 맞고 싶지 않아요. 약도 먹고 싶지 않고요.”
  • 그녀의 고집스러운 모습에 진우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 “그럼 물리적으로 열을 내리는 수밖에 없겠네요. 제가 가서 약을 처방하고 물건들을 받아올 테니까 먼저 젖은 수건으로 이마를 식히고 있어요. 계속 열이 나는 채로 있는 것도 안 좋으니까.”
  • 고민성이 방을 나서려 하자 강유라가 말을 꺼냈다.
  • “그럼 나도 가서 도울게.”
  • 두 사람이 나가고, 방안에는 심하연과 진우현 두 사람 만이 남았다. 심하연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젖은 수건을 가져와 열을 식히고 싶었지만 그녀는 현재 조금의 기력도 없는 상태였다. 그때, 내내 별말이 없던 진우현이 갑자기 입술을 삐죽이며 한마디 했다.
  • “고집불통이 따로 없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