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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진우현은 알아챘을까

  • 진우현이 나간 뒤, 한참을 멍 때리던 심하연은 다시 일을 보기 시작했다.
  • 진우현의 반응은 예상 그대로였으니, 나머지를 감수하는 건 오로지 그녀 자신 몫이었다.
  • 그 때, 안준호에게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 “준호 오빠, 어쩐 일이야?”
  • “혜림 비서실장 전화 받았어?”
  • 휴대폰 너머로 안준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응, 그래서 지금 진도 체크하던 중이었어.”
  • 심하연이 확인하려던 메일을 클릭하며 대답했다.
  • “밀린 거 나한테 넘겨. 넌 쉬고.”
  • “응?”
  • 심하연이 잠시 멈칫했다.
  • “수민이한테 너 아프다고 들었어. 왜 나한테는 말 안 한 거야?”
  • 나무라는 말투였지만 여전히 부드럽고 따뜻했다.
  • “아프면 다 나을 때까지 푹 쉬는 거야. 무리하면 몸만 더 망가져.”
  • 안준호는 재하 그룹에서 심하연의 가장 든든한 조력자였다.
  • 예고 없던 재하 그룹의 파산에, 젊고 능력 뛰어난 안준호를 놓칠 줄로만 알았던 심하연이었다.
  • 안준호가 그녀를 따라 대진 그룹에 입사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심하연은 크게 놀라 그를 찾아갔었다.
  • 왜 하필 대진 그룹이냐는 그녀의 물음에 안준호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었다.
  • “대우 좋고 전망 좋은 데를 찾다 보니 공교롭게도 여기였네.”
  • 맞는 말이라 심하연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 하지만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그렇게 쉽게 감춰질 리가 있을까.
  • 안준호에게 심하연을 점찍어 주겠다는 심하연 아버지 심창희의 말에 그는 그녀를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이렇게 대답했었다.
  • “하연이 아직 어리잖아요. 앞으로의 일은 누구도 모르죠.”
  • 그 뒤로부터 그는 하나부터 열까지 빠질 것 없이 그녀를 보살펴 주었고 그녀를 바라보는 눈길도 점점 더 부드러워만 갔다.
  • 대놓고 말하지 않았다 뿐이지 그의 마음이 심하연에게는 너무나도 또렷이 보였지만 그의 마음을 받아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마음은 일찍 그 차거운 남자한테 가 있었으니까.
  • 추억 속에서 헤어나온 그녀는 그의 호의를 담담히 밀어냈다.
  • “아니야 준호 오빠, 나 다 나았어. 신경 써 줘서 고마워.”
  • 휴대폰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안준호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 “하연아, 오빠한테 이렇게 서먹하게 굴 거야?”
  • 심하연이 대답이 없자 안준호가 말을 이어갔다.
  • “어려서부터 쌓아 온 친분은 그렇다 쳐도, 지금도 회사 동기인데 이 정도의 도움은 당연한 거 아니야?”
  • “준호 오빠…”
  • “아니면, 오빠가 도와주면 일에 차질이라도 생길까 봐 그래? 오빠 못 믿어?”
  • “아니야, 절대 아니야.”
  • “아니면? 오빠가 싫어진 거야?”
  • “그럴 리가. 내가 오빠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 오빠가 없는 심하연을 안준호는 친동생 그 이상으로 아꼈다.
  • 그녀도 안준호를 친오빠처럼 아끼고 믿어왔다.
  • 쩔쩔 매는 심하연의 휴대폰 너머에서 안준호의 낮은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 “그렇다면 오빠한테 얼른 넘겨. 안 그러면 삐칠 거다.”
  • 으름장 놓는 듯한 안준호의 말투에 심하연은 입가를 실룩이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 “알았어, 고마워 오빠. 내가 밥 한 번 살게.”
  • “고맙긴. 밥은 꼭 사라?”
  • “풉, 알았어.”
  • 통화를 마친 뒤, 심하연은 프로젝트 관련 내용들을 꼼꼼하게 적은 문서를 작성해 메일들과 함께 안준호에게 보냈다.
  • 한참 뒤에야 안준호에게서 문자가 왔다.
  • “메일이랑 문서 확인했어. 걱정 말고 얼른 쉬어.”
  • 그 한마디가 너무나도 든든했다.
  • 심하연은 한 시름 놓고 집에서 편히 쉬기로 했다.
  • 하지만 밀린 업무가 해결되자, 다른 걱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 심하연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 대체 어떻게 해야 맞는 걸까.
  • 아무 것도 모른 채 자라고 있는 이 조그마한 생명을.
  • 정말… 지워야만 하는 걸까.
  • 아니면?
  • 그녀의 머릿속은 또다시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 한 참을 고민하던 심하연은 누군가에게 전화했다.
  • *
  • “풉-! 뭐어어? 임신??”
  • 어느 카페 안.
  • 심하연의 맞은켠에 앉은 한 여자가 우아하게 잔을 들어 마시던 커피를 그대로 뿜었다.
  • 목소리 또한 어찌나 컸던지 카페 안 손님들과 점원들마저 다 깜짝 놀라며 이 쪽을 바라보았다.
  • “……”
  • 주위를 살펴본 심하연은 모두 낯선 얼굴들이란 걸 확인한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 쉬며 얼른 티슈 한 장을 주소희에게 내밀었다.
  • “소리 낮춰 좀. 다 쳐다보잖아.”
  • 주소희가 황급히 티슈를 건네받아 입을 닦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 “미안 미안, 너무 놀라서 그래.”
  • 그러고는 심하연의 코 앞까지 얼굴을 쑥 들이밀고 그녀를 말똥말똥 쳐다보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 “어떻게 된 거야. 혹시… 둘이 노 뭐를 선호하는 거야?”
  • “아니야, 했어. 했는데…”
  • 민망한 기색을 감추며 심하연이 커피 한 모금 들이키고 말을 이었다.
  • “딱… 한 번, 안 했던 것 같은데…”
  • “복권 당첨이네. 어떡할 거야?”
  • 심하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 주소희가 눈을 몇 번 깜박이다가 다시 물었다.
  • “안 낳으려고? 왜, 한 번 밀어붙여 보기라도 해 봐. 아무리 가짜 결혼이라지만 함께 지낸 시간이 얼만데. 없던 감정도 생길 수 있는 거지, 안 그래?”
  • 친구의 열변에 심하연은 담담히 웃을 뿐이었다.
  • “과연 그럴까?”
  • 주소희는 더 말하는 대신 심하연을 찬찬히 뜯어봤다.
  • 이 무심한 반응은 뭐지? 임신이 장난도 아니고.
  • “진우현은 알아?”
  • “안 알려줬어.”
  • “너…”
  • 대체 무슨 생각인 거냐는 말이 튀어나올 뻔한 걸 가까스로 참으며 주소희는 다시 물었다.
  • “언제 알려줄 건데?”
  • 입을 꾹 닫고 있는 심하연.
  • “?”
  • “뭐야, 안 알려주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애 아빠인데?”
  • 심하연은 계속 대답이 없었다.
  •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심하연이 너무도 답답해 주소희가 다발총 난사를 퍼붓기 시작했다.
  • “이 지지배가 정말. 너 한 사람 일이 아니라고. 애 아빠랑 둘이 의논해야 될 일이라고. 임신이 여자한테 얼마나 중요한 일…”
  • “강유라가 돌아왔어.”
  • 주소희의 닥달이 뚝 멈췄다.
  • 심하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피어났다.
  • “그래도 알려줄 필요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