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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아이를 지워

  • 심하연은 살짝 짜증이 났다.
  • “그냥 비 좀 맞은 것뿐이야. 나 아무렇지도 않아.”
  • 말을 마친 그녀는 앞으로 걸어나가 어제의 보고서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 “이건 어제의 업무 보고서, 내가 다 정리해놓은 거야. 그럼 난 또 다른 일들이 있어서, 두 사람도 오랜만에 만났을 텐데, 더 방해하지 않을게.”
  • 심하연이 강유라를 바라보자 그녀가 재빨리 미소 지었다. 심하연은 그렇게 사무실을 나갔다. 하지만 진우현은 여전히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 “진우현?”
  • 강유라가 그를 부르고 나서야 그는 정신을 차렸다. 진우현의 그런 모습에 강유라는 이상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다정하게 말을 꺼냈다.
  • “보니까 하연이 상태가 확실히 안 좋아 보이긴 하더라. 지금에야 네 비서 일을 하고 있지만, 걔도 집안이 망하기 전에는 심 씨 집안 아가씨였는데, 절대 홀대하면 안돼.”
  • ‘홀대?’
  • 진우현은 마음속으로 실소를 터트렸다.
  • ‘누가 감히 그 여자를 홀대할 수 있겠어?’
  • 하지만 그는 그런 말들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은 채 그저 가볍게 대답했다.
  • “응.”
  • 비틀거리며 사무실로 돌아온 심하연은 의자에 앉자마자 참지 못하고 책상 위에 엎드렸다. 어지러움이 더 심해진 것 같았다. 얼마쯤 지났을까, 임수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하연 언니, 아무래도 돌아가서 쉬는 게 좋겠어요.”
  • 확실히 하연은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너무 힘들었던 탓에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 “수민 씨, 나 조금만 잘게.”
  • 말을 마친 그녀는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심하연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열여덟 살 때로 돌아가 있었다. 그날은 심하연과 진우현의 성인식이 있던 날이었다. 성인식은 두 집안이 함께 주최한 것이었다. 당시 심하연은 자신이 좋아하는 파란색의 프릴 드레스를 입은 채 특별히 굵은 웨이브 머리로 세팅하고 네일아트도 했었다. 그리고 성인식 날에 맞춰 진우현에게 고백할 생각이었다. 한참을 찾아헤매던 그녀는 작은 정원에서 겨우 진우현을 찾아냈다. 그녀가 치맛자락을 잡고 그쪽으로 다가가려던 그때 진우현의 몇몇 친구들이 그를 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우현아, 이제 성인인데 좋아하는 여자애 없어? 슬슬 약혼도 고려해야지.”
  • “난 하연이도 괜찮던데. 맨날 네 뒤만 졸졸 따라다니잖아.”
  • 그 말을 들은 심하연은 진우현의 대답을 듣고 싶은 마음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무래도 그의 대답이 그녀가 곧 하려는 일에 있어서는 굉장히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진우현이 대답도 하기 전에 누군가 먼저 입을 열었다.
  • “하연이는 아니야. 우현이는 걜 그저 동생으로 생각한다고. 우리 우현이 마음속엔 오직 한 사람뿐이라는 걸 누가 모르겠어. 바로 유라 말이야.”
  • ‘유라…’
  • 하연은 몰래 숨어서 우현을 바라보았다. 달빛 아래 돌로 된 의자에 앉아 있는 소년은 다리가 너무 길어 둘 데가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잘생긴 얼굴 위에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띤 채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 “하긴, 유라가 예쁘고 다정하긴 하지. 여성스럽달까. 하연이는 그냥 조그만 계집애잖아. 게다가 제일 중요한 건 유라가 우현이의 생명의 은인이라는 거지.”
  • 말을 한 사람은 진우현의 가장 친한 친구 중의 하나인 백민준이었다. 평소 심하연을 놀리기 좋아했던 그는 그녀를 만날 때마다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곤 했다. 그는 또한 심하연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 중 하나이기도 했다.
  • ‘누가 조그만 계집애라는 거야!’
  • “맞다. 유라가 네 목숨을 구해줬었지. 그때 강물의 물살이 엄청 셌잖아. 걔가 뛰어들어 널 구하지 않았으면 아마 진우현은 진즉에 이 세상에 없었을 거야.”
  •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끝내 어렵사리 응이라는 한마디의 대답을 내뱉었다. 달빛 아래 그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 “내 옆자리는 영원히 그 앨 위해 남겨둘 거야.”
  • 둥-
  • 심하연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사라지며 창백하게 변했다. 생각지도 못하게 그녀는 고백도 하기 전에 차인 것이었다. 강유라가 진우현의 목숨을 구한 일은 무리 중에서 끊입없이 회자되는 일이었다.
  • 옛날에 영웅이 미녀를 구한 이야기가 있었다면, 지금은 연약한 미인이 잘생긴 소년을 구한 이야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강유라와 진우현이었다.
  • 하지만 심하연은 그 일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해 그녀 역시도 물에 빠졌었던 것인지 고열에 시달리며 크게 아팠었기 때문이었다. 깨어난 뒤에는 그 이전에 있었던 많은 일들이 가물가물했기에 자신이 어쩌다 물에 빠지게 되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그녀가 장난을 치다 실수로 물에 빠졌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그렇게 알고 있을 뿐이었다.
  • 하지만 하연은 자신이 무언가 잊어버린 것 같은 느낌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생각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시간이 지나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녀는 그때의 일을 완전히 잊어버리게 되었다.
  • ‘진우현이 자기 목숨을 구해준 사람을 내내 잊지 못하고 있었을 줄이야.’
  • 심하연은 그때 물에 뛰어들어 그를 구해낸 사람이 자신이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꿈속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의 마음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커다란 돌덩이가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듯 견디기가 힘들었고 두통 또한 더욱 심해졌다.
  • ‘왜 그때 뛰어들어 그를 구해낸 사람이 내가 아닌 거지? 만약… 만약…’
  • 그때 갑자기 진우현의 얼굴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의 눈빛은 차갑고 매정했다.
  • “하연아, 아이를 지워.”
  • 곧이어 그의 옆에 강유라가 나타났다. 그녀는 덩굴 마냥 진우현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 “하연아, 아이를 지우지 않는 건 설마 나와 우현이의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의도는 아닌 거지?”
  • 갈라놓는다는 말을 듣자 진우현의 눈빛이 한층 더 차가워지며 앞으로 몇 걸음 더 다가와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다.
  • “알아서 잘 처신해, 그렇지 않으면 내가 직접 손을 쓸 테니까.”
  • 그의 강한 손아귀 힘에 심하연의 턱은 당장이라도 으스러질 것 같았다. 몸부림치며 퍼뜩 정신을 차린 하연의 온몸은 식은땀에 젖어있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창밖으로 끊임없이 멀어져 가는 도로뿐이었다.
  • ‘방금 그건… 꿈인가? 너무 생생했어…’
  • 심하연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 “하연아, 깼구나.”
  • 앞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올린 심하연의 눈에 보인 것은 걱정스러워하는듯한 강유라의 얼굴이었다.
  • “다행이다. 가는 길 내내 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데.”
  • ‘강유라? 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 곧이어 무언가 알아차린 심하연이 그녀의 옆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운전을 하고 있는 사람은 역시나 진우현이었다. 그리고 강유라는 그의 조수석에 앉아있었다. 운전을 하고 있던 진우현은 그녀가 깨어났다는 말에 백미러를 통해 그녀를 확인했다.
  • “깼어? 어디가 또 불편하거나 한데는 없어? 좀 있다 병원에 도착하면 그것까지 같이 의사한테 말해.”
  • 악몽으로 인해 심란했던 마음을 이제 겨우 조금 안정시켰는데, 그런 심하연의 마음이 진우현의 한마디로 인해 또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
  • “아니, 병원에 갈 필요 없어. 난 괜찮아.”
  • 그 말은 들은 진우현의 시선이 다시 한번 그녀에게 향했다.
  • “무슨 고집이야? 너 열나고 있는 거 몰라?”
  • 강유라도 한마디 보탰다.
  • “그래 하연아. 너 지금 열이 심하게 나고 있어. 병원에 가봐야 해. 우현이가 그러는데 너 어제 비 맞았다며. 도대체 무슨 일인 거야?”
  • ‘무슨 일?’
  • 눈앞의 강유라를 보며 심하연은 창백한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한 글자도 내뱉지 않았다. 어제의 그 일은 강유라도 분명 현장에 있었을 것이다.
  • ‘저렇게 묻는 건, 뭔가를 암시하는 건가?’
  • 한창 생각하고 있는데, 강유라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비쳤다. 그러고는 미안한 듯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 “혹시 어제…”
  • 그 순간 진우현이 강유라의 말을 가로챘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잔잔했다.
  • “어쨌든 병원부터 가. 아프면 며칠 동안 푹 쉬고, 회사엔 한동안 나올 필요 없어.”
  • 말이 끊겨버린 강유라는 어딘가 이상한 듯 진우현을 쳐다보았다. 심하연은 시선을 떨구었다. 그녀의 예쁜 눈가에 짙은 냉기가 흘렀다.
  • ‘역시 마음속의 1순위라는 건가. 철저하게 감싸고 도네.’
  • 그녀는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고개를 들었다.
  • “나 병원 안 가.”
  • 진우현은 그녀가 오늘따라 유달리 제멋대로인 것 같은 느낌에 눈살을 찌푸렸다.
  • “아픈데 병원엘 가지 않겠다니, 대체 뭘 어쩌겠다는 거야?”
  • 심하연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 “내 몸은 내가 잘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