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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그녀의 사정

  • “그랬어? 참, 정안아, 이 사람은 내 남자친구야. 남건 오빠는 말이 잘 통하니 부담 갖지 말고 말해.”
  • 서이설은 허정안의 손을 잡으며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 ‘이설이 그의 여자 친구라고? 하긴, 그 같이 우수한 남자한테는 이설처럼 예쁘고 착하며 집안 좋은 여자가 어울리지.’
  • 그녀는 남몰래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 “이설아, 고마워. 나와 남건 대표님의 상담은 거의 끝났어. 나는 이만 빠질 테니 좋은 시간 보내. 우리는 다음에 만나 얘기하자.”
  • “남건 대표님, 이건 이번에 우리가 준비한 구체적인 계약 사항이에요. 한번 봐주세요. 다른 의견이나 희망 사항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우리 쪽 전담 직원이 연락드릴 거예요.”
  • 회사 직원이라는 사명감이 허정안의 복잡한 심경을 이기며 그녀는 염치 불구하고 손안에 있던 계약서를 남건에게 내밀었다.
  • 남건은 계약서를 받을 생각이 추호도 없는 듯했다. 그는 그저 차가운 시선으로 허정안을 바라볼 뿐이었다. 예전에 그가 그렇게 애원해도 매정하게 자신을 떠나버린 여자를 바라보며 그는 허정안 못지않게 복잡한 마음이었다.
  • ‘당연히 원망해야 할 사람인데 왜 그녀의 무기력한 모습을 보니 이리도 가슴 아프지? 아니! 나를 버린 건 그녀야. 내가 왜 그녀를 도와줘야 하지?’
  • 여기까지 생각하자 남건은 갑자기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 남건은 계약서를 덥석 받아 들더니 보지도 않고 바로 책상 위로 집어 던졌다.
  • “뜻밖에도 당신이 이번 프로젝트의 책임자군요. 제가 보기에 귀사 직원의 인격과 신용에 문제가 있는 듯하니 조금 더 생각해 봐야겠어요.”
  • 남건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 “이만 나가 보세요.”
  • 남건은 그녀와 일할 생각이 없다는 듯 아주 명확하게 거절했다. 허정안도 빨리 이 자리를 뜨고 싶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알겠어요. 잠시 후 다른 직원이 연락드릴 거예요. 그럼 저는 이만 나가 볼게요.”
  • 허정안은 옆에 있는 서이설을 한번 바라보더니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고 했다.
  • 서이설은 막 입을 열려다가 남건의 싸늘한 표정을 보고 나서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
  • 허정안이 쓸쓸하게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남건의 주먹이 느슨해졌다가 꽉 쥐어졌다. 그는 이유 없이 짜증이 나서 책상을 힘껏 내리치고는 사무실을 나갔다.
  • 서이설은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 “허정안아, 허정안. 너와 남건 오빠 사이에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서이설은 중얼중얼 혼잣말하며 생각에 잠긴 듯한 눈빛이었다.
  • 남식 그룹의 정문을 나서자 허정안은 속이 쓰라렸다. 그녀는 남건을 다시 만날 줄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녀는 그 진지했던 감정을 기억 속 깊은 곳에 묻어두고 싶었다. 그런데 운명은 언제나 예측할 수 없어서 그들은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다시 만났다. 그리고 그는 이미 여자 친구가 있었다.
  • 허정안은 예전 생각이 났다. 예전에 남건과 만나고 서로 알아가며 사랑했던 나날들이 생각났다. 그들은 그렇게도 서로를 사랑했었는데 사랑이 깊었던 만큼 상처도 깊었다.
  • 그들이 막 사랑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할 때, 허정안은 신체검사에서 그녀의 뇌에 종양이 자랐으며 이미 말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 그것은 꽃 같은 나이의 허정안에게 있어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의사는 그녀에게 바로 출국해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며 회복할 확률이 10%도 안 된다고 했다. 종양이 이미 중추신경을 압박해서 그녀는 언제든지 실명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 허정안의 부모는 그날 바로 허정안의 휴학 절차를 밟았다. 그러나 그녀를 가장 고통스럽게 한 것은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남건에게 어떻게 이 소식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점이었다.
  • 허정안은 자신에게 불상사가 생기면 남건이 괴로워할까 봐 그와 헤어지기로 했다. 헤어지며 댄 핑계는 더는 그를 사랑하지 않으며 이미 다른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남건은 그녀에게 애원하며 매달렸고 그녀가 마음을 돌리기를 바랐다. 허정안은 비록 가슴이 아팠지만, 그에게 사실대로 말해주지 않았고 그가 그녀를 빨리 잊기를 바라며 더욱 심한 말로 그에게 상처를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