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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진단서

  • 화들짝 놀란 심하연은 하마터면 약사발을 떨어뜨릴 뻔했다.
  • 그러나 곧 이내 핏기 없는 입술을 깨물어 냉정을 되찾았다.
  • “뭐 하긴. 다 봐놓고 물어.”
  • 배 째라는 심하연의 말투에 진우현의 표정이 착잡해졌다.
  • 그는 심하연에게 다가가 텅 빈 그릇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 “네가 깨면 바로 마실 수 있게 여태껏 데워온 건데, 너무하는 거 아냐?”
  • 심하연은 그를 힐끔 바라봤다.
  • “싫다고 수차 얘기했을 텐데.”
  • 빈 그릇을 들고 화장실을 나서는 심하연의 뒤에서 진우현의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러려고 어제 저녁 일부러 비 맞은 거야?”
  • “아니. 내가 왜?”
  • 진우현의 눈초리에 맺힌 의심은 전혀 가시지 않았다.
  • “그러면 대체 왜 병원도 안 가겠다 하고 약도 안 먹는 건데?”
  • “약 너무 써서 싫어.”
  • 심하연의 흘려보내듯 가벼운 대답에 진우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 “어제…”
  • 그녀가 뭔가 알아챈 것 같아서 메시지 얘기를 꺼내려 했지만 어제 클럽 문에 들어서지도 않은 그녀가 알 리가 없다는 생각에 진우현은 열렸던 입을 도로 닫았다.
  • 진우현이 더 말이 없자 심하연은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 쉬었다.
  • 가볍게 받아치는 대답과는 별개로 진우현의 의심의 눈초리에 자신의 비밀이 걸려 나올까 봐 조마조마하기만 하던 차였다.
  • 때마침 고용인이 음식을 들고 들어오자 심하연은 도망치듯 진우현을 지나쳐 음식 앞으로 다가갔다.
  • 무지 고픈 배와는 별개로 입맛은 영 없은 데다가 고용인이 들고 온 음식은 죽 한 그릇에 밑반찬 몇 종이 다였다.
  • 그래도 지금은 오히려 간단하고 소화가 잘 되는 것들이 몸에 좋다는 건 알기에 심하연은 고용인이 차려온 음식을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 심하연이 식사를 하는 내내 진우현은 곁에 서서 그녀를 지켜보았다.
  • 기분 탓일까.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게 뭔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
  • 심하연, 방 안 가득, 심지어 자신에게도 뭐라고 형용하기 어려운 기운이 감돌고 있어 진우현은 심란해지기 시작했다. 실내의 공기마저 서서히 흐름을 멈추고 있는 느낌이었다.
  • 결국 진우현은 돌아서 나가버렸다.
  • 진우현이 나간 뒤, 심하연은 그제야 막혔던 숨이 트이는 듯 긴 숨을 내쉬고는 편안한 자세로 고쳐 앉았다.
  • 자기 전, 고용인이 또 약 한 사발을 들고 들어왔다.
  • 하지만 이미 진우현에게 꼼수를 한 번 들킨 데다가 그가 지금 집에 없다는 걸 안 심하연은 무지 당당했다.
  • “갖다 버리세요. 남은 것들도 다.”
  • 약사발을 든 고용인이 그 자리에 굳어졌다.
  • 심하연은 아랑곳 않고 분부를 내렸다.
  • “피곤해서 쉬고 싶네요. 나가 봐요.”
  • 눈만 끔뻑이던 고용인은 얼떨떨해서 그대로 나갔다.
  • 진우현이 돌아오지 않은 방 안.
  • 심하연 혼자 남은 침실은 조용하기만 했다.
  • 이불을 덮자, 다소 맑아졌던 머리가 다시 어지러워났다.
  • 아직 다 낫진 않았나 보다.
  • 언제면 열이 다 내릴까? 임산부 용 해열제도 찾아보면 있을 텐데.
  • 약 생각을 하자, 자연스레 강유라가 떠올랐다.
  • 진우현은… 지금쯤 그녀 곁에 가 있겠지.
  • 그 때 그를 구한 게 강유라가 아니라 자신이었다면… 그 때로 되돌아 간다면… 되돌아 가기엔 너무 늦어 버린 걸까.
  •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심하연은 다시 잠이 들었다. 눈가에서 굴러 떨어지는 반짝이는 한 방울은 모른 채.
  • 얼마나 잤을까. 또다시 꿈만 같은 기분 속에서 옆 자리가 움푹 파이는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가 곁에 눕는 것 같았다.
  • 그가 돌아온 걸까?
  • 하지만 더 생각할 새도 없이 심하연은 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이튿날 아침, 잠에서 깬 심하연은 바로 옆 자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 온기 한 톨 없이 차거웠다.
  • 실망감에 눌려 내려가는 눈길과 함께 심하연의 마음도 가라앉았다.
  • 이윽고 고용인이 아침 식사를 들고 들어왔다.
  • 세수를 하고 나오던 심하연은 그릇들 사이에 보이는 거무칙칙한 액체와, 음식 냄새에 가려지지도 않는 지독한 약 냄새에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 “사모님, 이건…”
  • “버리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내가?”
  •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날카로워졌다.
  • 평소에 부드럽기만 하던 사모님의 낯선 목소리에 고용인이 화들짝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 자신의 앙칼진 목소리에 심하연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 그녀는 아차 싶어 대뜸 미간을 꾹꾹 누르며 누그러진 목소리로 분부했다.
  • “미안해요. 내가 컨디션이 좀 안 좋아서… 약만 빼 주세요.”
  • 도망치듯 주방으로 돌아온 고용인을 발견한 집사가 손도 안 댄 약사발을 보고 표정이 어두워졌다.
  • “사모님께선 여전히 약을 거부하시던가?”
  • 고용인은 머리를 끄덕이고 방금 전 상황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 그 목소리에 섞인 불만 한 가락을 캐치한 집사는 고용인의 얘기가 끝날 때까지 조용히 듣고 있다가 부드럽게 타일렀다.
  • “사모님이 어떤 분이신지 자네나 나나 잘 알고있지 않은가. 편찮으셔서 목소리가 높아지신 것 뿐이니 마음에 담아두지 말게.”
  • 집사의 말에 고용인은 얼굴을 붉히며 연신 손사래를 쳤다.
  • “아닙니다. 제가 그럴 리가요.”
  • “그렇다면 다행이네. 누가 뭐래도 그 분은 우리 사모님이니까.”
  • 말과는 달리, 집사는 심하연이 걱정되기만 했다.
  • 특히나 어제 저택까지 찾아온 강유라를 본 뒤로 그 걱정은 커져만 갔다.
  • 이러다가 사모님이 바뀌는 건 아닌지.
  • 바로 그 때, 오싹하리만치 서늘한 목소리가 느닷없이 들려왔다.
  • “오늘도 약을 거절하던가?”
  • 집사와 고용인이 흠칫하며 돌아보았다.
  • “대표님…”
  • 출근하려던 참이었던지 정장 차림에 차 키를 손에 든 진우현이 눈보라가 휘몰아칠 듯한 얼굴로 서 있었다.
  • “보아하니 그러시는 것 같습니다.”
  • 대답한 집사가 한 마디 물었다.
  • “저, 실례지만 대표님, 이 약의 효능은 무엇인지요?”
  • 대표님이 화내실 정도로 억지를 부릴 사모님이 아니신데.
  • 혹시 약에 무슨 문제라도?
  • “열 내리게 하는 거.”
  • 난 또. 집사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 쉬었다.
  • 사모님께서 큰 병에 걸리시기라도 한 줄.
  • “난 또…”
  • 자신의 생각이 고용인의 입에서 그대로 튀어나오자 집사가 화들짝 놀라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 진우현 역시 고용인을 휙 돌아보았다.
  • 살벌한 두 눈길에 식은땀이 삐질 난 고용인이 급히 말을 이었다.
  • “사모님께서 큰 탈이 나시진 않은 것 같아 다행이네요.”
  • “왜 그렇게 생각한 거지?”
  • 진우현의 차거운 목소리가 고용인을 짓눌렀다.
  • “자세히 말해 봐.”
  • 진우현의 매서운 눈초리에 고용인의 입이 저도 모르게 열렸다.
  • “어, 어제 대표님 방 휴지통을 비우려다가 진단서 비슷한 종이 조각이 나와서요.”
  • 진우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 “무슨 진단서?”
  • “저도 잘은 몰라요. 갈가리 찢긴 데다가, 글자가 다 지워지고 희미하게 진단서란 글자만 겨우 보였어요.”
  • 고용인이 공포에 찬 눈빛으로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 “그 진단서는 지금 어디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