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9화 넌 무조건 이 혼약에 동의해야 해

  • 그날 밤, 강소원은 욕탕에서의 일 때문에 밤새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 다음날 일어나니 그녀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룸서비스로 아침식사를 주문한 승빈이가 그런 그녀가 신경이 쓰이는지 말을 꺼냈다.
  • “엄마, 이따가 식사 마치고 좀 더 자는 게 어때?”
  • “엄청 피곤해 보이는데, 어젯밤 또 밤늦게까지 일한 거야?”
  • 승민이가 눈을 깜빡이며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혹시 자신이 그녀에게 집의 돈이 거의 다 떨어져 간다고 거짓말을 한 것 때문에 그녀가 잠을 이루지 못한 건 아닐지 생각했다. 승아 역시 다정하게 물어왔다.
  • “내가 어깨라도 주물러줄까?”
  • 이에 강소원은 미간을 주무르며 억지로라도 정신을 차리고는 철이 든 세 아이들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 “괜찮아. 어제 오후에 너무 많이 자서 저녁에 잠이 안 왔던 건가 봐. 오늘 밤에 일찍 자면 돼. 이따가 너희들이랑 같이 아침을 먹고 난 뒤에 엄마는 잠시 어디 나갔다 와야 하니까 너희들은 얌전히 호텔에서 엄마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알겠지?”
  • 그 말에 세 아이들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 “본가에 가는 거야, 엄마?”
  • 승빈이가 강소원에게 우유를 한 잔 건네며 물었다. 이에 강소원은 잔을 건네받아 한 모금 마시고는 대답했다.
  • “응. 빨리 해결해 버려야지. 그 일을 해결하고 나면 해야 할 일들이 많은데, 그 사람들이랑 너무 오래 엮이고 싶지 않아.”
  • 승빈이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일찍 갔다가 얼른 돌아와, 엄마. 동생들은 내가 잘 돌보고 있을게.”
  • 그 말에 마음이 약해진 강소원은 손을 들어 아이의 볼을 가볍게 꼬집으며 사랑스럽다는 듯 말했다.
  • “착하지, 그럼 부탁할게!”
  • 아침 식사 이후, 강소원은 곧바로 강 씨 가문 본가로 출발했다.
  • 약 30분 뒤, 차가 목적지에 도착하자 차에서 내려 저택 앞에 우두커니 선 그녀의 머릿속에는 6년 전 이곳에서 쫓겨나던 그날의 장면이 순간 떠오르기 시작했다.
  • 그때의 초라함, 처절함, 무력감, 그리고 친부의 냉대까지, 마치 아직까지도 눈에 선한 것 같았다.
  •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이미 그 기억에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그녀에게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무관심뿐이었다.
  • 강소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벨을 눌렀다. 그러자 이내 누군가가 문을 열러 나왔다. 강 씨 가문의 집사인 이근수였다. 하지만 그는 강소원을 알아보지 못한 듯 한마디 물었다.
  • “안녕하십니까. 실례지만 누구신지…?”
  • 강소원은 그나마 공손한 말투로 그에게 말했다.
  • “전 강소원이라고 합니다. 강상국 회장님을 만나러 왔어요.”
  • 이에 이근수는 조금 놀란듯한 눈치였다. 아마도 변해버린 강소원의 모습이 의아한 듯했다. 아지만 그는 이내 옆으로 비켜서며 말했다.
  • “얼른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 강소원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로 들어서자 몇 년 만에 보는 강상국과 임수연 모녀의 모습이 보였다.
  • 세 사람은 거실 소파에 앉아 한창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이근수가 다가가 그녀의 방문을 알린 뒤에야 세 사람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 하지만 그 순간 눈앞에 보이는 젊고 아름다운 여자의 모습에 세 사람 모두 다소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 ‘저 여자가… 강소원이라니! 어떻게 이럴 수 있지?’
  • 그들의 기억 속의 강소원은 촌스러운 옷차림에 눈에 띄는 점이라고는 전혀 없는 시골 촌뜨기였고 온몸에서 싼티를 풍기는 그런 사람이었다.
  • 하지만 눈앞에 있는 여자는 정갈한 셋업 정장 차림이었고 그 옷이 그녀의 매혹적인 몸매를 감싸 우아하면서도 지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 정교한 이목구비는 눈이 부실만큼 아름다웠고 반짝거리는 두 눈에는 소원함과 냉담함이 담겨 있었으며 빨간 입술은 조롱하듯 살짝 휘어져 올라가 있었다.
  • 그녀는 놀라우리만치 아름다운 모습 속에 약간의 야성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 “네가 강소원이라고?”
  •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강은설이었다. 그녀의 표정은 강소원의 이러한 변화들을 받아들일 수 없는 듯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 ‘강소원이 이렇게 예뻐졌을 리가 없잖아!’
  • 임수연과 강상국 역시 무척이나 놀란 것이 분명한 듯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이에 강소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이곳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은 듯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 “저더러 사인하러 오라면서요? 빨리 끝내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좀 바빠서요.”
  • 얼음장같이 차가운 그녀의 말투에서는 조금의 온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말에 겨우 정신을 차린 강상국은 곧바로 미간을 찌푸리며 한마디 안부인사도 없이 그녀를 꾸짖기 시작했다.
  • “뭐가 그렇게 급해? 몇 년 동안이나 서로 얼굴도 못 봤는데, 넌 인사할 줄도 모르는 거냐?”
  • 이에 강소원은 무언가 재미난 이야기라도 들은 듯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 “우리가 그 정도로 가까운 사이인가요? 그리고… 나한텐 여동생 같은 거 없으니까 함부로 저와 가족이라고 주장하지 마세요.”
  • 그 한마디에 강상국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 “강소원, 지난 몇 년간 너희 고모랑 해외에 가있으면서 배웠다는 게 고작 이딴 것들이야? 어른한테 그따위 태도로 말하라고 배웠어?”
  • “맞아요. 그러니까 꼴 보기 싫으셔도 참으세요.”
  • 강소원의 당당한 얼굴에 조금 짜증스러운듯한 기색이 드러났다.
  • “사인할 거예요 말 거예요?”
  • 이에 강상국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런 그의 모습에 임수연은 호의를 가장하며 강상국의 등을 토닥였다.
  • “그만하세요. 방금 막 집에 돌아온 애랑 왜 싸우고 그러세요? 애가 본론을 얘기하자고 하니 그렇게 하시면 되잖아요…”
  • 그리고는 강소원을 향해 가식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 “소원아, 와서 앉으렴.”
  • “아뇨, 미안하지만 빨리만 처리해 주시면 좋겠네요. 제 시간은 굉장히 소중하거든요.”
  • 강소원의 말투에는 옅은 혐오가 담겨있었다. 임수연을 대할 때면 그녀는 도저히 좋은 표정이 지어지지 않았다.
  • 저 여자는 겉으로 보기에는 인자해 보이지만 사실상은 꿍꿍이가 굉장히 많은 사람이었다.
  • 6년 전 강소원이 처음 강 씨 본가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길가 노점상에서 산 싸구려 옷을 입고 있었고 굉장히 촌스러웠었다.
  • 이에 임수연은 호의를 가장한 채 그녀를 고급 백화점으로 데리고 가 새 옷들을 사주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임수연이 건넨 선의가 여러모로 감사했었고 이 여자가 진심으로 자신이 강 씨 가문으로 돌아온 것을 환영해주고 있다 생각했었다.
  •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의 옷들은 몸에 맞지 않거나 상스러워 보일 정도로 화려했고 매번 외출을 할 때마다 사람들은 취향이 저급하다며 몰래 그녀를 비웃었다.
  • 그리고 그녀는 강 씨 가문에서 쫓겨나 있던 지난 몇 년 동안에서야 그런 그 여자의 민낯을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마음속의 반감을 도저히 억누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에 임수연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 하지만 이내 다시 아까의 표정으로 되돌아가며 마음속으로 냉소 지었다.
  • 그녀는 강소원의 태도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녀에게 강소원은 결국은 집에서 쫓겨난 상갓집 개에 불과했다.
  • 이번에 강소원이 돌아오는 것을 용인할 수 있었던 것도 그녀가 자신에게 이득을 가져다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임수연의 얼굴에는 여전히 온화한 표정이 지어져 있었다.
  • 하지만 그런 그녀와는 달리 강상국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면서 고개를 돌려 이근수에게 서재에서 서류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 그러자 이근수는 이내 서류를 가져왔고 이를 건네받은 강상국은 딱히 빙빙 돌려 말하지 않았다.
  • “이 주식은 비록 네 친모가 너한테 남긴 것이긴 하지만 지난 몇 년간 이걸 보관하고 있던 건 결국은 나다. 이걸 너한테 넘기는 게 안 되는 건 아니다만, 그전에 한 가지 조건이 있다!”
  • 주식을 되돌려 받는 일이 순조롭지만은 않을 것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강소원은 무척이나 차가운 표정으로 물었다.
  • “무슨 조건인데요?”
  • 강상국이 말했다.
  • “내가 너한테 정해준 혼약을 이행해야 해. 당시 너의 정신 나간 행동으로 인해 윤 씨 가문과의 계약결혼이 물거품이 되어버렸고 강 씨 가문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이제 네가 그때 끼친 손해를 보상할 때도 됐지… 그러니 넌 무조건 이 혼약에 동의해야 해.”
  • 그 말에 강소원은 곧바로 냉소를 터트렸다. 보아하니 그녀의 짐작이 정말 틀리지 않았던 것이었다.
  • 주식을 넘겨준다는 건 역시나 핑계였고 새로이 튀어나온 이 혼약이야말로 그녀더러 귀국하라고 한 주요한 이유였던 것이다.
  • 다만, 그녀가 아는 이 집안 사람들이라면 그 상대는 아마 그리 좋은 사람은 아닐 터였다. 이에 그녀가 곧바로 물었다.
  • “누구와의 혼약인데요?”
  • 그러자 강상국은 마치 은혜를 베푸는 듯한 표정으로 답했다.
  • “박 씨 가문의 박우진이다! 서울에서 제일가는 재벌가지. 네 신분으로 그 집에 시집가는 것만으로도 너에게는 복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