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호통에 민은호는 순간 멍해져 침을 빼야 할지, 아니면 기다려야 할지 몰랐다. 그는 마음이 조급해 미칠 지경이었다.
“대표님, 어디 불편하지는 않으십니까?”
그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박우진을 향해 물었다. 박우진의 준수한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그래도 민은호보다는 훨씬 침착해 보였다.
“아직까지는 불편한 건 없어.”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시선을 옮겨 눈앞에 있는 세 꼬맹이들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의 진지한 표정은 정말로 장난을 치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 표정에 감화된 박우진은 자신도 모르게 의심이 들었다.
‘이 꼬마, 보기에는 고작 네다섯 살 정도밖에 안돼 보이는데, 정말 그런 천부적인 재능이 있단 말이야?’
한 줄기 기대를 품은 채 그는 의외로 민은호에게 침을 빼라고 하지 않고 정말 그대로 앉아 기다렸다.
그렇게 약 3분 정도가 지나자 기적이 일어났다.
끊임없이 울렁거리던 그의 위장이 정말 서서히 진정되기 시작하더니 아픔도 조금씩 잦아들어 10분 뒤에는 완전히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게 된 것이었다.
박우진은 이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항상 차갑기만 하던 그의 얼굴에 드물게 의아한듯한 표정이 드러났다.
“정말 괜찮아졌군.”
그 말에 민은호는 깜짝 놀랐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건… 그저 우연은 아닐까요?”
이를 들은 승민이가 곧바로 불만을 드러내며 반박하고 나섰다.
“우연 같은 게 어딨어요! 혈자리를 찔러 몸의 많은 질병들을 고칠 수 있다고요. 제 동생이 방금 침을 놓은 혈자리는 아마 위장에 대응되는 자리일 거고요. 이런 가장 기본적인 의학 이론을 아저씨같이 다 큰 어른이 설마 모르시는 거예요?”
민은호는 아이의 반박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정말로 문외한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이 꼬맹이는 고작 다섯 살밖에 안 되어 보였다. 다른 꼬마들은 그 나이 때면 아직 유치원에서 흙장난을 하고 있었을 텐데 이 꼬마는 어떻게 사람을 치료하고 있는 것인지 그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이건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지능과 능력이란 말인가? 그런 그의 생각을 눈치챈 듯 승빈이가 시기적절하게 한마디 보탰다.
“우리 엄마는 엄청 대단한 외과 의사예요. 한의학의 약리에 대해서도 해박하시죠. 제 동생은 그걸 보고 들으며 자라다 보니 몇십 개의 주요 혈자리들은 이미 진즉에 다 외우고 있고 이런 기본적인 치료들도 충분히 가능하다고요. 제 여동생을 얕보지 마세요, 아저씨!”
“얕보지 않을게…”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민은호는 도저히 눈앞의 세 아이들을 우습게 여길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는 예의를 갖추어 정중한 태도로 승아를 향해 말했다.
“꼬마야, 미안해. 방금 내가 화를 냈던걸 사과할게. 네가 장난을 치고 있다고 오해를 해선 안 되는 거였는데, 아저씨가 잘못했어.”
그런 그의 모습에 승아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잘못을 알고 고칠 수 있으면 착한 어린이랬어요. 그러니까 용서해 드릴게요!”
말을 마친 아이는 고개를 돌려 박우진을 쳐다보며 귀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저씨, 이제 침 뽑을게요. 비록 지금은 괜찮아졌어도 돌아간 뒤엔 그래도 약을 챙겨드셔야 해요. 다지 재발하지 않도록 말이에요.”
“그래, 꼬마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할게. 너 정말 대단하구나!”
박우진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꼬마 의사 선생님’이라는 말에 승아는 참지 못하고 웃음 지었다.
볼 위에 드러난 두 개의 작고 귀여운 보조개가 아이가 신났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 귀여운 모습에 박우진은 손을 뻗어 아이의 말랑말랑한 볼을 만져보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어느 집 꼬맹이들인지는 몰라도 사랑스러운 외모에 똑똑하고 영리한 것도 모자라 그런 꼬맹이들을 한 번에 셋이나 키워내다니 말이다.
……
그 시각, 귀여운 꼬맹이를 셋이나 키워낸 강소원은 마침 걸려온 한통의 전화로 인해 잠에서 깨어났다.
비몽사몽 휴대폰을 더듬어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에서 그녀의 친부인 강상국의 힘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소원, 네가 탄 비행기는 이미 착륙했던데, 왜 곧바로 본가로 돌아오지 않는 거냐? 설마 내가 직접 모시러 가기라도 해야 하는 거냐?”
그의 말투에는 짙은 불만에 담겨있었다. 그 말에 강소원은 예쁜 눈꺼풀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녀의 눈빛에는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것에 대한 짜증이 가득했고 말투 또한 상당히 나빴다.
“내가 안 급하다는데, 강 회장님이 뭘 그렇게 조급해하세요? 아니면 양심이라도 생겨서 얼른 나한테 주식을 돌려주고 보상해주고 싶어 한시라도 못 기다리시겠어요?”
여기까지 말하던 그녀는 순간 말을 멈추고 비웃음을 터트렸다.
“아, 아니지. 당신 같은 사람한테 어떻게 ‘양심’따위가 있을 수 있겠어요? 그런 게 정말 있었다면 진작에 주셨겠죠!”
‘그러니 이번에 갑자기 이렇게 호의를 보이는 것도 모르긴 몰라도 무언가 속셈이 있는 거겠지!’
그 속에 무언가 함정이 있을 것임을 강소원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친어머니가 남긴 것이니 되찾아 오는 게 마땅했다.
반면에 강 씨 가문은… 아예 그녀의 안중에 없었다. 수화기 너머의 강상국은 강소원의 말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너 그게 무슨 버르장머리냐? 외국에 나가있는 몇 년 동안 너희 고모가 그렇게 가르치디? 친아버지한테 그딴 식으로 말하라고? 너 도대체 교양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깬 상태가 아니었음에도 강소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항상 그렇듯 날카로웠다.
“친아버지? 당신이? 허…”
그녀는 조롱 섞인 웃음을 흘렸다.
“저라는 사람은 원래 이래요. 다른 사람이 절 어떤 태도로 대하면 저도 그 사람을 어떤 태도로 대하죠. 교양이라면, 사람에 따라 다르고요. 적어도… 강 회장님은 제 기준에 예의를 갖추어드리기에는 아직 자격 없으세요.”
말을 마친 그녀는 강상국이 뭐라 대꾸도 하기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한편 강 씨 가문 본가에 있는 강상국은 화가 잔뜩 난 채 곧바로 휴대폰을 내던졌다. 이에 옆에 있던 임수연이 황급히 그 휴대폰을 주워 들며 물었다.
“왜 그래요? 왜 이렇게 화가 나신 건데요? 소원이는 지금 어디 있대요? 알아내셨어요?”
강상국은 불쾌한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못 알아냈어. 그것도 모자라 몇 마디 되받아치기까지 하더군. 그 망할 년은 정말이지 가면 갈수록 교양 없이 구는군!”
그 말에 강은설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조급해졌다.
“어떻게 못 알아낼 수가 있어? 강소원은 대체 언제 돌아오는데? 박 씨 가문 쪽에서 제안한 혼사에 이미 승낙까지 했는데, 설마 진짜로 나보고 그 집안에 시집을 가라고? 난 싫어! 아빠, 아빠도 내가 남규 오빠를 좋아한다는 거 알잖아. 원래는 우리의 약혼 이야기까지 오가고 있었는데 박 씨 가문에서 갑자기 찾아와서는 나더러 액을 막으라고 한 거잖아… 난 시집가서 과부가 되고 싶지는 않단 말이야! 박 씨 가문의 그 비실거리는 남자는 언제 죽을지도 모르잖아!”
잔뜩 흥분한 딸의 모습에 강상국은 급히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다.
“알아. 아빠도 널 그 집에 시집보내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 그래서 강소원 그 아이를 부른 거잖니. 지금 이미 서울에 와있다는 건 그 5%의 주식이 엄청 가지고 싶다는 거겠지. 그걸 가져간 뒤에는 자연스레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할 거야. 시집을 갈지 말지는 걔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지!”
강상국이 이와 같이 약속을 하자 강은설은 그제야 흥분을 가라앉히고 어머니인 임수연과 시선을 주고받았다.
무언가 속셈이 있는 듯, 두 모녀의 눈에 만족스러움과 탐욕이 드러났다.
그녀들에게 5%의 주식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현금으로 환산해 봤자 기껏해야 몇억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박 씨 가문에서 주기로 약속한 돈과 예물의 가치는 수백억은 훨씬 넘을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건, 강소원 하나를 희생시키면 그들 일가족이 부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거였다. 말 그대로 일거양득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