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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그분을 살려주세요

  • 아이들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강소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그럼 너희들은 가서 자기 물건들 챙겨. 이따가 체크아웃하고 새 집에 가서 지낼 거야. 고모할머니가 우리가 지낼 곳을 마련해 주셨거든.”
  • “알겠어, 엄마.”
  • 세 꼬맹이들은 귀여운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얌전히 짐을 챙기러 갔다.
  • 1시간 뒤, 정리를 마친 강소원은 아이들을 데리고 그곳을 떠나갈 준비를 했다. 하지만 객실문을 나서기가 무섭게 옆방의 문 또한 열리며 초조한 표정의 민은호가 방 안에서 걸어 나왔다.
  • 세 꼬맹이들이 그런 그를 발견하고는 곧바로 인사를 건넸다.
  • “비서 아저씨, 안녕하세요. 또 만났네요.”
  • 이에 민은호는 발걸음을 멈추고 마지못해 대답했다.
  • “너희들이구나? 반갑다!”
  • 섬세했던 승빈이가 어딘가 심상치 않아 보이는 그의 표정을 눈치채고는 급히 물었다.
  • “비서 아저씨, 굉장히 다급해 보이시네요? 무슨 일이라도 생기신 거예요?”
  • 그러자 민은호는 멈칫하더니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 “아무… 아무것도 아니야. 그럼 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 또 보자!”
  • 그는 말을 내뱉으며 곧장 발걸음을 옮겨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승빈이의 귀엽던 목소리가 갑자기 무겁게 가라앉더니 물었다.
  • “잘생긴 아저씨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죠? 어제 봤을 때도 몸상태가 굉장히 안 좋아 보였는데, 또 몸에 뭔가 이상이 생긴 거예요?”
  • 그 말에 승민이와 승아도 긴장하기 시작했다.
  • “아저씨는 괜찮아요? 심각한 거예요?”
  • “의사라도 부를까요?”
  • 그 말을 들은 민은호는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사실 박우진의 행적과 그의 상태에 대해서는 외부인에게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 하지만 눈앞의 세 아이들의 걱정 어린 표정에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차마 숨기지 못하고 결국 대답해 주었다.
  • “열이 나고 있어. 의사는 이미 불렀고. 아직 오늘 길이라고 해서 마침 내려가서 기다리려던 참이었어.”
  • 옆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강소원은 마음속으로 대강 세 꼬맹이들이 말한 ‘잘생긴 아저씨’가 누구인지 짐작하고 있었다.
  • 이에 그녀는 개입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필경 어젯밤 욕탕에서 그런 일이 있었으니 서로 너무 어색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 게다가 단지 열이 나는 것뿐이라고 했으니 아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녀의 세 아이들이 입을 열었다.
  • “비서 아저씨, 우리 엄마가 가서 살펴봐 드릴 수 있어요. 우리 엄마도 의사거든요!”
  • “맞아요. 우리 엄마의 의술은 엄청 대단하다고요.”
  • “엄마, 엄마가 아저씨 상태를 봐주면 안 돼?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안 되잖아…”
  • 승아가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며 거의 애원하듯 말했다. 이에 강소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
  • 여태껏 그녀는 세 아이들의 부탁이라면 전혀 당해내지 못했었다. 도저히 거절의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 결국 그녀는 시선을 들어 민은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민은호는 조금 망설이고 있었다.
  • 박우진의 상황은 꽤나 특수해서 열 한 번 난 것만으로도 사경을 헤매곤 했기에 평소에도 전담 의료팀을 두고 있었다.
  • 그렇기에 상황을 전혀 모르는 그녀더러 살펴보게 했다가 혹시 무슨 문제라도 생기게 되는 건 아닐지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어제 승아가 박우진에게 침을 놓아준 일도 있었고 또한 지금은 상황이 확실히 긴박하기도 했기에 고민할 시간이 없었던 그는 곧바로 동의하는 수밖에 없었다.
  • “그럼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혹시라도 도저히 치료하기가 곤란하시면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이에 강소원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민은호를 따라 옆방 스위트룸으로 들어갔다.
  • 그 시각, 남자는 침대에 조용히 누운 채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요사스러울 만큼 아름다운 얼굴에 부자연스러운 붉은색이 감돌고 있는 그의 모습은 굉장히 허약해 보였다.
  • 그런 그의 모습에 세 꼬맹이들은 마음을 졸이며 황급히 강소원을 이끌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 “엄마, 빨리 살펴봐봐.”
  • 이에 남자를 한번 힐긋 쳐다본 강소원은 생각했다.
  • ‘잠들어 있을 때는 꽤 착해 보이네. 어젯밤 그 사납던 모습보다는 훨씬 보기 좋잖아!’
  • 그녀는 시간낭비 하지 않고 재빨리 침대 옆에 앉아 그의 맥을 짚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예쁜 눈썹이 바로 일그러졌다.
  • 남자의 맥은 미약하고 혼란했다. 마치 언제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은 그의 맥은 어떻게 보아도 일반적인 발열 증상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 그러나 쉽게 단정 지을 수는 없었던 강소원은 다시 한번 더 자세히 맥을 짚어보았다.
  • 그런 다음 또 손을 뻗어 박우진의 눈꺼풀을 뒤집어 보기도 했다.
  • 잠시 후,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의 상황은… 정말이지 극도로 심각했다! 그의 몸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 생명력이 거의 다 닳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열한 번 난 것만으로도 죽음의 문턱을 들락날락하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강소원은 곧바로 손을 놓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 “사람이 이지경이 됐는데 왜 아직 병원 응급실로 데려가지 않은 거죠? 숨이 넘어가길 기다리실 생각인가요?”
  • 그 말에 민은호는 대경실색하며 물었다.
  • “그 말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 대표님께선…”
  • 그녀의 말을 들은 세 아이들의 안색 역시 미세하게 변화했다.
  • “엄마, 많이 심각한 거야?”
  • “당연히 심각하지! 애초에 체질 자체가 좋지 않은 상태야. 보아하니 뭔가 안 좋은 약물이나 독에 의해 몸이 망가졌던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이미 간당간당 하다고. 평소에 감기에 걸리거나 열이 나지 않는 상태라면 그나마 괜찮겠지만, 일단 발열이 있으면 그건 말 그대로 죽음을 재촉하는 거나 마찬가지란 말이야…”
  • 강소원은 굉장한 속도로 박우진의 상태에 대한 설명을 쏟아냈다.
  • 그 말에 민은호는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것만 같았다. 항상 침착한 성격이었던 그가 허둥대기 시작했다.
  • “그럼 어떡하죠? 지금 당장 병원으로 모셔가야 할까요? 대표님께서는 꽤 오랫동안 발열이 없으셨단 말입니다. 이제껏 항상 조심해 가며 몸을 챙기고 있었는데… 목숨이 위태로우신 겁니까?”
  • “이제 와서 병원으로 데려가기엔 이미 늦었고, 지금 당장 이곳에서 응급조치를 하는 수밖에 없겠어요!”
  • 강소원은 쓸데없는 말들은 제쳐두고 곧바로 민은호에게 지시를 내렸다.
  • “저를 도와 이 사람의 옷을 벗기세요. 어서요.”
  • 그리고는 몸을 돌려 자신의 캐리어를 연 다음 그 안에서 고급 의료상자를 하나 꺼냈다. 상자를 열자 안에는 수많은 의료기구들과 약물들이 들어있었다.
  • 강소원은 그 안에서 양피지를 말아놓은 것 같이 생긴 물건을 하나 꺼내 들었다. 그것을 펼치자 안에는 들쭉날쭉하게 수백 개의 은침이 꽂혀있었다. 이를 본 민은호는 조금 놀란 듯 물었다.
  • “선생님, 그건…?”
  • ‘치료를 한다며? 그 침들로 뭘 하려는 거지?’
  • “응급처치요!”
  • 강소원은 쓸데없는 말들은 하고 싶지 않았다.
  • “그쪽 대표님의 지금 상태로는 약을 삼킬 수 있을지 없을지부터가 문제예요. 게다가 제가 가지고 있는 약제들도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는 게 아니라서 약물 주사도 불가능하고요. 이 방법밖에는 없어요. 그러니 빨리 움직이세요!”
  • 민은호는 마음속으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는 의사라고 하는 그녀의 대처가 맞는 것인지 걱정되었다.
  • 침을 놓는 방식으로 발열증세를 치료한다는 말을 그는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 하지만 현재 의료팀은 아직 도착 전이었기에 그는 마지막 한줄기 희망을 품고 그녀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 그는 빠른 속도로 박우진의 옷을 벗겨냈다. 그러자 이내 남자의 탄탄한 몸이 눈앞에 드러났다.
  • 이에 자기도 모르게 그의 몸을 힐끔 쳐다본 강소원은 그가 아마 평소에도 필요한 운동은 계속하고 있었을 것이고, 거기에 더해 전문 의료팀이 케어를 해주고 있었기에 그나마 이러한 몸선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그런 게 아니라면 그의 망가진 몸상태로는 이미 오래전에 바짝 말라 뼈밖에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 심지어는 어쩌면 지금 이때까지 살아남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강소원은 잡념을 떨쳐버리고 이내 침을 놓기 시작했다.
  • 그녀의 손은 굉장히 빨랐다. 자세하게 살펴볼 필요도 없이 그녀는 혈자리를 찾아낼 수 있었다.
  • 하지만 민은호는 보고도 아는 것이 없으니 그저 마음이 조마조마할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 그 분야에 대해 아는 사람이 있었다면 분명 강소원이 찌른 자리가 거의 다 사람의 몸에서 가장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혈자리들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다.
  • 그 어떤 실수나 의외의 상황이라도 발생하게 된다면 큰 문제가 생길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 게다가 강소원이 치료하고 있는 건 애초에 발열증상도 아니었다. 그녀가 하고 있는 건 남자의 몸상태를 안정시켜 우선적으로 넘어가기 직전인 그 마지막 숨을 다시 붙잡아오는 작업이었다. 다른 치료는 그가 정신을 차린 뒤에야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