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각, 같은 호텔의 다른 스위트룸 안, 막 잠에서 깨어난 박우진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의 준수한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간간히 해대는 기침이 조금 창백한듯한 안색의 그를 더욱 수척해 보이게 했다.
하지만 그런 아파 보이는 모습에도 그의 온몸에 감도는 귀티는 감춰지지 않았다.
깨어난 그를 발견한 비서 민은호가 급히 인삼차 한 잔을 건네며 말했다.
“물 한 모금 들이켜세요, 대표님.”
이에 박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받아 들어 한 모금 들이켜고는 물었다.
“지금 몇 시야?”
민은호가 대답했다.
“오후 세시입니다.”
박우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번에는 6시간 동안 기절하듯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몸의 피로가 풀리기는커녕 오히려 온몸이 더욱더 무겁게만 느껴졌다. 그의 몸상태는 하루가 다르게 나빠져가고 있었다. 이에 민은호는 걱정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지난 며칠 동안 너무 무리하셨습니다. 내내 일만 하시고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않으셨잖아요. 이제부터는 바쁜 일은 잠시 손에서 내려놓으시는 게 어떠십니까? 회사의 일은 제가 이미 다 처리해 놨습니다.”
침대에서 일어난 박우진은 아랑곳 않고 옷깃을 정리하며 차갑게 말했다.
“아무리 오래 자도 좋아지지 않을 거야. 내 몸은 내가 알아.”
민은호는 당장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확실히 박우진의 몸상태는 굉장히 나빴다.
지난 몇 년간 수많은 의사들이 그를 거쳐갔지만 끝내 근본적인 치료는 받지 못했었다.
하지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다행히 이번에는 드디어 해외의 그 신의를 찾아낸 것이다.
민은호는 급히 이 사실을 박우진에게 보고했다.
“저희가 전부터 계속 찾고 있던 그 신의 말입니다. 드디어 소식이 왔습니다. 그쪽에서 대표님을 치료하겠다며 의뢰를 수락했습니다. 그러니까 대표님, 몸 꼭 잘 챙기셔야 해요.”
하지만 이를 들은 박우진은 그다지 기쁘지는 않은 눈치였다.
“찾아냈다 하더라도 소용이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겠지. 그 의사 말이야. 소문은 꽤 신통하게 났지만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누가 알겠어? 게다가 세계 최고의 의사들이란 의사들한테 다 치료를 받았어도 나의 이 몸상태는 끝내 완전히 치료되지 않았어. 그런데 그 사람은 가능할 거란 보장이 없잖아…”
그러자 민은호가 말했다.
“그건 시도해 봐야 아는 거죠! 그리고… 회장님께서 아무래도 이미 대표님의 신붓감을 물색해 놓으신 것 같습니다. 대표님을 위한… 액막이 차원이라고 하시면서요.”
그 말에 박우진은 곧바로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죽은 것도 아닌데, 그 늙은이는 무슨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거야?’
“이번엔 누군데?”
박우진의 말투는 상당히 나빴다. 이에 잠시 망설이던 민은호가 입을 열었다.
“강 씨 가문의 강은설 아가씨랍니다.”
그러자 박우진의 미간에 패인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지시했다.
“뭐라도 방법을 대서 이 일은 거절하도록 해.”
이에 민은호는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이 일은 아무래도 대표님께서 직접 회장님께 말씀드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박 회장의 결정은 박우진 조차도 어쩌지 못하는데 일개 비서인 그가 무슨 수가 있겠는가?
이에 차갑게 굳어있던 박우진의 안색이 더욱더 안 좋아졌다. 기침 또한 점점 더 격해져 갔다.
민은호는 혹시라도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다급히 그의 등을 두드려주며 화제를 돌렸다.
“아직 몸이 안 좋으시니 화를 내시면 안 됩니다. 일단 푹 쉬세요. 제가 룸서비스를 불러드릴까요?”
박우진은 손을 내저었다.
“그럴 거 없어… 내려가서 먹을 거야. 겸사겸사 바람도 좀 쐬고.”
……
다른 한쪽의 스위트룸 안. 너무 피곤했던 강소원은 결국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이에 강승빈은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목소리를 낮추며 두 동생들에게 말했다.
“엄마 잠들었으니까 너희들 조용히 해. 엄마가 깨지 않게.”
그 말에 승민이와 승아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다들 발소리를 죽이며 방을 빠져나갔다.
밖으로 나온 뒤, 승아는 곧바로 승빈이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귀여운 목소리로 애교를 부렸다.
“오빠, 나 배고파. 뭐라도 좀 먹고 싶어.”
“나도 배고파! 내가 귀국하기 전에 찾아봤는데, 여기 레스토랑 음식이 일품이래. 주방장이 국빈만찬의 음식을 담당했던 사람이라더라고. 우리도 내려가서 먹어보자!”
승민이도 배가 고팠는지 절실한 눈빛으로 형을 바라보았다. 이에 강승빈은 사뭇 어른스러운 척 잠시 심사숙고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내려간 김에 엄마 것도 좀 챙겨 오자. 자고 일어나면 분명 배고프실 거야.”
그 말에 강승민과 강승아는 곧바로 작은 소리로 환호했다. 그리하여 세 아이들은 방 카드를 챙겨 서로 손을 잡고서 밥을 먹으러 아래층으로 향했다.
호텔 레스토랑은 1층에 있었는데 지금 시간에는 식사를 하러 오는 손님들이 꽤 많아 거의 만석인 상태였다.
레스토랑에 들어선 세 꼬맹이들은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빈자리를 찾아보았지만 당장은 비어있는 테이블이 없었다.
그런 아이들을 발견한 종업원이 올망졸망 예쁘게 생긴 세 아이의 모습에 참지 못하고 다가와 다정하게 물었다.
“얘들아, 왜 여기 서있는 거니? 부모님을 찾고 있는 거야?”
이에 강승빈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저희들끼리 내려온 거예요. 배가 고파서요. 엄마는 피곤해서 방에서 쉬고 계세요. 그런데… 자리가 없는 것 같네요.”
그제야 아이의 손에 들려있는 스위트룸 키카드가 종업원의 눈에 들어왔다.
이 아이들은 호텔의 VIP손님들이었던 것이다. 그런 손님들을 소홀히 대할 수 없었던 종업원은 곧바로 아이들에게 제안했다.
“내가 빈 테이블이 있나 찾아볼 테니까 이곳에서 잠시만 기다리고 있을래? 여긴 사람들이 많아서 길을 잃을 수도 있어.”
강승빈이 고개를 끄덕이려던 순간, 가만히 있지 못하고 계속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승민이가 갑자기 그의 손을 잡아끌며 소곤거렸다.
“형, 저 사람 좀 봐봐… 대진 그룹 그 사람 아니야?”
그 말에 강승빈도 자연스레 승민이가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역시나, 창가 쪽 테이블에 앉아있는 박우진의 모습이 보였다. 이에 아이의 두 눈이 순간 반짝였다.
“그 사람이야!”
아이들이 아빠로 의심하고 있는 그 사람이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그들이 찾아가기도 전에 이런 곳에서 그를 마주치다니, 이것이 바로 인연이 아닐까 싶었다.
강승빈은 곧바로 결단을 내리고는 종업원을 불러 세웠다.
“아저씨… 지금 한창 피크타임이라 빈자리가 없는 것 같은데 합석을 하면 어떨까요? 저쪽… 저 테이블은 두 사람 밖에 없으니까 가서 물어봐 주시면 안 돼요?”
이에 거절할 수가 없었던 종업원은 곧바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이내 그는 박우진이 앉아있는 테이블 앞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죄송하지만, 손님,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지금 한창 피크타임이라 저쪽에 세 꼬마들이 당장은 앉을만한 자리가 없어서 그런데, 혹시 괜찮으시면 아이들과 합석하셔도 되겠습니까?”
‘합석?’
종업원의 말에 박우진은 곧바로 눈살을 찌푸리며 시선을 옮겨 멀지 않은 곳에 서있는 세 꼬맹이들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