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5화 선물 같은 존재

  • 장소윤은 소연준의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게임 중 인 줄 알았던 배경 화면에는 온통 알 수 없는 문자와 숫자들뿐이었다.
  • 장소윤이 의아하게 물었다.
  • “디자이너님, 아드님이 지금... 문제를 풀고 있는 건가요?”
  • 소은정은 조금은 민망한 투로 답했다.
  • “미안해요, 소윤 씨. 제 아들이 포로그래밍을 좋아해요. 지금 마지막 단계까지 간 모양인데 완성될 때까지 조금만 같이 기다려 줄 수 있어요? 이 녀석 고집이 대단해서 여기에서 그만두지 않을 거예요.”
  • 장소윤은 소은정을 만나고부터 벌써 몇 번째 깜짝 놀라는지 몰랐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프로그래밍한다니, 장소윤은 이번에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장소윤은 자기 귀를 의심하며 소은정에게 물었다.
  • “디자이너님, 아기가 다섯 살도 안 되죠?”
  • ‘다섯 살 때 나는 뭐했지? 어린이집에서 흙이나 쥐고 놀았던 거 같은데... 이 꼬마 녀석은 벌써 프로그래밍한다니... 이러니 내가 놀라지 않고 배겨? 이런 걸 천재와 일반인의 차이라고 하는 걸까?’
  • 그때, 소은정이 손가락 네 개를 펴 보이며 조금은 복잡한 표정으로 답했다.
  • “얼마 전에 4살 생일이 지났어요.”
  • 이어 소은정은 사랑이 가득 담긴 눈으로 아들 소연준을 바라보았다.
  • 5년 전, 만약 배 속에 아이가 없었더라면 소은정은 진작 삶을 포기했을지도 몰랐다.
  • ‘하나님, 이런 소중한 존재를 제게 주셔서 감사해요.’
  • 5년 전, 소은정은 6년 연애하고 반년 동안 결혼생활을 했던 조지훈과 대학교 시절의 룸메이트 유인영에 의하여 한 푼도 없이 집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 게다가 하나밖에 남지 않은 가족인 엄마는 그녀가 바람을 피웠다고 오해해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하여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친구인 원민아의 도움을 받아 외국으로 가게 된 것이었다.
  • 하지만 외국에 가서도 그녀의 상황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는데 그녀는 한동안 진지하게 죽음을 생각했다.
  • 엄마는 어렸을 때 그녀를 버리고 가서 새살림을 차렸고 아빠는 열 살 때 돌아가셨으며 하나밖에 없던 할머니도 스무 살이 되자 세상을 떠났다.
  • 조지훈은 결혼생활에 충실하지 않았고 그녀의 감정을 이용해 할머니가 그녀에게 남겨주었던 집과 아버지의 사망보험금까지 모조리 빼앗았다.
  • 절망스러웠다.
  • 이 세상에는 더 이상 그녀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가족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가 마음 편히 기댈 수 있는 집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죽음을 선택하기로 했다.
  •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자살 시도를 원민아가 빨리 발견한 덕에 그녀는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다.
  • 그리고 그렇게 실려 간 병원에서 소은정은 자신이 임신했으며 임신한 지 4주가 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소은정은 조지훈과 반년 넘게 사랑을 나눈 적이 없었기에 배 속의 아이는 유인영의 꼬임에 넘어가 다른 남자와 잤던 그날 밤에 생긴 아이임을 확신했다.
  • 처음에 소은정은 자신을 위기에 빠뜨린 그 정체불명의 남자를 미워하고 저주했지만 임신 사실을 알고부터는 오히려 남자에게 고마웠다.
  • 그 남자 덕분에 그녀에게는 새로운 가족이 생겼고 아이 때문에라도 다시 이 악물고 살아갈 용기를 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아이가 생긴 후, 소은정은 다시 생활에 대한 열의를 가지고 생활하기 시작했다.
  • 그리고 오랫동안 놓고 있었던 펜을 다시 집어 들었다. 소은정은 대학교 때 패션디자인을 전공했다. 졸업 후 패션계에서 일을 해 볼 생각이었던 그녀에게 조지훈은 늘 패션계는 복잡하고 그 업계에서 발을 붙이기란 만만치 않으니 일찌감치 포기하라고 말했다. 단순한 성격이 소은정에게는 너무 험한 길이라면서 새로운 길을 찾을 것을 권유했기에 소은정은 결국 조지훈의 조언대로 졸업 후 공무원 시험을 치게 되었다.
  • 해운시에서 절망을 느끼고 찾아간 파리는 패션의 도시이자 패션디자이너들에게는 기회와 도전의 무대였다.
  • 소은정은 프랑스에서 박사를 하는 대학교 때 교수님에게 연락해 교수님의 도움으로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패션 회사인 VG 사에서 디자이너 조수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피나는 노력으로 3년이라는 시간을 걸쳐 조수에서 당당한 디자이너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 한국은 세계에서 제일 큰 사치품 시장 중의 하나였는데 VG 사에서는 한국의 시장 점유율을 더 늘이기 위하여 소은정이 한국인임을 고려해 그녀를 해운시에 있는 VG 계열사로 파견했다.
  • 장소윤은 입을 떡 벌린 채 소연준이 현란하게 손가락을 놀려 프로그래밍을 완성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프로그래밍을 완성한 소연준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엔터키를 눌렀다. 그리고 그 순간, 화면에는 숫자들이 마구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여러 개의 도표가 생성되었다.
  • 장소윤은 화면 속의 숫자들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지만, 눈앞에 있는 네 살짜리 꼬마가 프로그래밍에 능숙한 천재라는 사실은 단번에 보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