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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헛소문

  • 유인영은 언니 대신 조카를 데리러 유치원에 오는 길이었다. 그녀가 유치원 문 앞에 막 다다랐을 때, 눈앞에는 소은정이 웃음 가득한 얼굴로 아들의 손을 잡고 오 선생님과 인사를 나눈 뒤 유치원을 나서고 있었다.
  • 유인영은 걸어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재빠르게 눈을 굴리더니 웃음 띤 얼굴로 오 선생님에게 다가갔다.
  • 유인영은 평소 조카를 데리러 유치원에 자주 왔으므로 오 선생님과도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 유인영은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말했다.
  • “어머, 아까 보니까 못 보던 아이가 있던데요, 선생님? 새로 전학해 온 아인가요?”
  • 오 선생님은 검은색 안경을 쓱 밀며 답했다.
  • “네. 며칠 전 외국에서 왔다고 하는데, 오늘 엄마랑 같이 유치원 1일 체험을 했어요. 그리고 내일부터는 정식으로 등원할 거예요.”
  • “아~ 그렇구나. 보니까 되게 귀여워 보이던데요?”
  • “네, 아이가 아주 얌전해요. 그리고 부끄러움이 많은 것 같았어요. 계속 엄마 뒤만 따라다니고 말수도 적더라고요.”
  • 유인영은 조카 여은채를 데리고 나와 차에 태운 뒤, 씩 웃으며 말했다.
  • “은채야, 너 이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 다섯 살밖에 안 먹었지만, 계산이 빠른 여은채는 눈알을 되록되록 굴리며 말했다.
  • “이모가 저한테 한정판으로 나온 바비인형 사주면 부탁 들어줄게요!”
  • 여은채가 말하는 한정판 바비인형은 몇백만 원을 호가했는데 아이들 장난감치고는 아주 비쌌다.
  • 부탁을 들어주는 조건으로 다섯 살짜리 조카가 몇백만 원의 선물을 요구하자 유인영은 경직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 ‘정말 비싸긴 하지만, 그래도 소은정을 골탕 먹일 수만 있다면... 좋아!’
  • “그래! 이모가 약속할게. 이리 가까이 와봐. 이모가 부탁하는 이걸 잘해주기만 하면 내일 당장 너희 집으로 바비인형 보내줄게.”
  • 여은채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좋아요! 반드시 이모가 말한 대로 할게요.”
  • ...
  • 집으로 돌아온 소은정은 오늘 유치원에서 가져온 책에 책가위를 정성스레 씌워주었다.
  • 그리고 책가위를 씌워주는 김에 색연필로 소연준의 책들에 예쁜 그림을 그려 넣어 주었다.
  • 예를 들면 그림책에는 소연준이 자리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 이야기책에는 소연준이 소파에 누워 엄마가 해주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모습 등을 귀여운 그림체로 그려 넣어주었다.
  • 소은정은 패션 디자인을 전공했기에 웬만한 그림 정도는 손쉽게 그렸다. 물론 그 실력이 전문가에 비할 바는 못 되겠지만 그래도 소연준에게 그려준 그림은 꽤 흥미로웠다.
  • 소연준은 그 그림이 좋아 좀처럼 손에서 책을 놓지 못했다.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또래의 아이들처럼 마냥 해맑게 웃었다.
  • 소은정은 그런 아들을 보며 말했다.
  • “유치원에 가기 싫다고 떼를 썼던 게 누구더라? 유치원에 안 갔으면 이렇게 귀여운 책이 있었겠어?”
  • 그러자 소연준은 조심스럽게 책을 가방에 넣고 고개를 들어 소은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 “제가 유치원에 가지 않으면 엄마는 제 책에 책가위를 씌워주지 않을 거예요?”
  • 소연준의 옆모습은 어딘가 차가워 보이는 데가 있었다. 그래서 옆 모습만 보게 되면 어린애이지만 어쩐지 서늘해 보일 때가 많았다.
  • 소은정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그걸 말이라고 해? 우리 연준이가 부탁하면 엄마는 그게 언제가 됐든 무조건 해줄 거야.”
  • 소은정은 소연준이 행여나 다르게 생각해 상처받을까 봐 있는 힘껏 소연준의 볼에 뽀뽀도 해주었다.
  • 소연준은 고개를 숙이고 몰래 웃었다.
  • 이튿날,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 소은정은 소연준을 유치원 문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제대로 된 유치원 생활 첫날인데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 그녀는 몸을 쪼그려 소연준과 눈을 맞추며 이것저것 당부했다.
  • “엄마 전화번호 기억하지?”
  • 소연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전화번호를 그대로 암기해 보였다.
  • “만약 유치원에서 무슨 불편한 거라도 있으면 손 들고 선생님께 부탁해서 엄마한테 전화해. 알겠지? 그리고 학교에서 다른 친구들 괴롭히면 안 돼. 수업 시간에 몰래 휴대폰을 놀아서도 안 되고.”
  • 소연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폰의 시간을 쓱 확인하더니 끝없이 잔소리하는 소은정을 향해 말했다.
  • “엄마, 지금 7시 45분이에요. 지금 안 가면 엄마 지각이에요. 엄마가 해주신 말씀 다 기억하고 있어요. 엄마가 첫 번째 말했을 때부터 이미 다 기억했다고요.”
  • 소연준의 말에 소은정 역시 시간을 확인했다. 정말 소연준의 말대로 지금 당장 가지 않으면 지각할 것만 같았다. 그녀는 아들의 볼에 뽀뽀하고는 소연준이 유치원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 곧바로 택시를 잡아탔다.
  • 소연준은 어제의 기억을 더듬어 유치원 으뜸반으로 들어가 제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리고 가방에서 곱게 책가위가 씌워져 있는 책들과 휴대폰을 꺼냈다.
  • 그때, 소연준에게 하얗고 통통한 양 갈래머리의 꼬마 여자아이가 다가오더니 소연준을 향해 큰 소리로 물었다.
  • “너희 아빠 이름은 뭐야?”
  • 소연준은 무표정의 얼굴로 휴대폰을 보며 대답했다.
  • “나 아빠 없어.”
  • 소연준의 대답을 들은 여자아이는 유치원이 떠나가라 큰 소리로 말했다.
  • “사람은 누구나 다 아빠, 엄마가 있어. 그런데 너한테 아빠가 없다는 건 네가 착하지 않아서 아빠가 너를 버렸기 때문일 거야!”
  • 소연준은 여전히 무표정의 얼굴로 말했다.
  • “주몽이 알에서 나온 건 알지? 나도 우리 엄마가 낳은 알에서 나온 거야! 그래서 나는 엄마만 있고 아빠는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