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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출국

  • 망연자실한 소은정은 캐리어를 끌고 길거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마땅히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 ‘엄마는 아직도 화가 많이 나셨을 거야. 그러니까 괜히 엄마한테 가서 화를 돋울 수는 없어. 그리고 사실 그건 내 집도 아니잖아. 엄마랑 새아빠 집이지...’
  • 소은정의 나머지 두 채의 집 열쇠 역시 모두 조지훈에게 있었기에 그녀는 어디에도 갈 수가 없었다.
  • 어쩔 수 없이 소은정은 호텔에 머물기로 했다.
  • 집 부근의 가까운 모텔을 찾은 그녀는 방을 잡았다. 그런데 결제를 하려는 데 아무리 시도해도 잔액 부족으로 나왔다.
  • 소은정은 지갑에 있던 다른 여러 개의 카드도 모두 시도해보았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거듭되는 결제 실패에 직원은 성가신 듯한 표정을 지었고 소은정은 죄송해요 만 반복하다 결국 캐리어를 끌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 그녀는 곧장 가까운 곳에 있는 현금인출기를 찾아 지갑에 있는 모든 카드의 잔액을 확인했다. 원래 카드에 있어야 마땅할 돈들이 다 어디에 갔는지 잔액은 하나같이 세 자릿수였다.
  • 그녀는 카드를 들고 바닥에 주저앉아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 그녀의 카드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은 조지훈이었고 그녀의 카드들은 다 조지훈의 휴대전화와 연결이 되어있었기에 그녀가 모르는 사이에 조지훈이 그녀의 돈을 다 빼돌린 것이었다.
  • 조지훈을 믿었던 만큼 그 결과는 처참했고 배신감은 컸다.
  • 그녀는 조지훈을 8년 전에 만나서 6년 연애하고 결혼했다. 그런데 결혼 반년 만에 철석같이 굳게 믿었던 남자가 이처럼 모질게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고 돈 한 푼 쥐여주지 않고 자신을 내쫓을 줄은 몰랐다.
  • 바닥에 주저앉아 한참을 오열하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 소은정은 혼자 조용히 있고 싶어 받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휴대전화는 그칠 줄 모르고 울려댔다.
  • 결국 그녀는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원민아였다.
  • 원민아의 목소리를 듣자 소은정은 참지 못하고 서럽게 눈물을 흘렸다. 서러움이 폭발한 소은정은 꺼이꺼이 흐느끼며 원민아의 이름을 불렀다.
  • “민아야!”
  • 울고 있는 소은정의 목소리가 들리자 원민아는 다급히 물었다.
  • “너 지금 어디 있어?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지금 갈게. 거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
  • 소은정이 주소를 알려주자 반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원민아가 빨간색 스포츠카를 몰고 그녀를 찾아왔다.
  • 원민아는 크고 작은 캐리어를 끌고 넋이 나간 표정으로 마룻바닥에 주저앉아있는 소은정을 보자 눈물이 왈칵 나올 것만 같아 다급히 소은정에게로 다가가 그녀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 원민아는 소은정과 함께 캐리어를 차에 실은 후 소은정에게 휴지를 건네며 물었다.
  • “어떻게 된 거야?”
  • 그러자 소은정은 일의 자초지종을 원민아에게 설명했다.
  • 원민아는 소은정과 절친한 친구였지만 가끔은 소은정이 동생같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런데 친구이자 동생 같은 소은정이 조지훈에 의해 이런 꼴을 당하게 되니 그녀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핸들을 돌려 곧바로 조지훈을 찾으러 갔다.
  • 도중에 원민아는 경호원 몇 명을 급히 불러 함께 조지훈의 집으로 향했다.
  • 조지훈의 집에 도착해 문을 두드리자 문을 연 사람은 조지훈이 아니라 다름 아닌 잠옷 가운을 입은 유인영이었다.
  • 눈앞에 버젓이 잠옷까지 입고 나타난 유인영을 보자 소은정은 그제야 퍼즐이 맞춰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 유인영의 등장으로 소은정의 마지막 이성의 끈이 툭 하고 끊어졌다.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유인영에게 달려들어 그녀의 머리끄덩이를 잡았다.
  • “유인영! 이 나쁜 년! 너랑 조지훈 저 자식이 작정하고 나를 이 꼴로 만든 거지?”
  • 하지만 유인영 역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는 소은정의 손을 피하더니 오히려 본인이 소은정의 따귀를 때렸다. 그러고는 가소롭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 “은정아, 자기 남자는 자기가 지켜야지. 이렇게 매사에 남 탓을 해서야 되겠어? 그리고 너 그거 알아? 지훈 씨는 네가 맨날 징징거리고 또 뭐만 하면 삐지는 게 너무 싫었대.”
  •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원민아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발로 유인영을 퍽하고 차버렸다. 그러고는 등 뒤의 경호원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
  • “하나도 남김없이 다 깨부숴요!”
  • 그러자 근육질의 남자 대여섯 명이 집안으로 쳐들어오더니 유인영의 비명과 조지훈의 역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집안에 보이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깨버리고 박살 냈다.
  •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은정의 알몸 사진이 담겨 있는 조지훈의 휴대폰을 찾아 소은정에게 건넸다.
  • 원민아는 조지훈같이 평범한 사람이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어마어마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기에 원민아에 의해 집이 풍비박산 났어도 조지훈은 찍소리도 못하고 그저 참는 수밖에 없었다.
  • 한바탕 시원하게 깨부수고 밖으로 나온 원민아는 소은정이 무표정의 얼굴로 조지훈의 휴대전화를 박살 내는 것을 보며 그녀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 “은정아, 우리 쪽 변호사한테 물어봤는데 집이랑 통장의 돈을 가져올 가능성은 희박하대. 그러니까 너 나랑 외국에 나가 바람이나 쐬지 않을래?”
  • 소은정은 고개를 들어 허망한 눈빛으로 하늘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 “좋아.”
  • 소은정은 이제 이곳에 그 어떤 미련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곳에는 그녀를 사랑해주는 가족도, 그녀가 마음을 붙일 곳도 없었다.
  • ‘차라리 이곳을 떠나는 편이 좋겠어.’
  • 그날, 해운시국제공항에서 프랑스로 떠나는 비행기 안에는 삶에 대해 깊은 절망을 느낀 여자 한 명도 섞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