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은정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병상에 누워 두 눈을 꼭 감고 있는 엄마를 바라보았다. 병실에 있는 친척들은 소은정을 보며 수군거렸지만 정작 소은정의 정신은 온통 엄마에게 쏠려있었기에 그들의 손가락질과 수군거림이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제발 엄마가 괜찮아야 할텐데... 만약 엄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난 아마 평생 나를 용서하지 못할 거야.’
엄마가 깨나기를 기다리는 일 분이 마치 일 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얼마쯤 지났을까, 엄마의 손가락이 살짝 움찔했다.
‘뭐야, 움찔한 것 같은데? 내가 잘 못 본 걸까?’
그때, 꼼짝없이 누워만 있던 엄마가 천천히 눈을 떴다.
순간, 소은정은 너무 기뻐 환호의 함성을 터뜨렸다.
“엄마!”
소은정의 소리를 들은 친척들도 다급히 달려왔다.
“깼다고? 깬 거예요?”
소은정은 조심스럽게 엄마를 부축해 자리에 앉혔다.
엄마의 입술이 말라 부르튼 것을 본 그녀는 컵에 물을 담아 엄마에게 건네며 말했다.
“엄마, 여기 물이요. 물부터 마셔요.”
하지만 소은정의 엄마는 혼신의 힘을 다해 소은정을 밀쳐내며 말했다.
“저리 가! 썩 꺼지지 못해? 나는 너 같은 딸 둔 적 없어!”
바닥에 철퍼덕 넘어진 소은정은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엄마를 불렀다.
“엄마...”
하지만 소은정의 엄마는 문을 가리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가!”
소은정의 새아빠는 화를 이기지 못해 몸을 부들부들 떨며 얼굴이 퍼렇게 질린 아내의 어깨를 감쌌다. 그러고는 울상인 소은정에게 손을 저어 보이며 말했다.
“은정아, 이만 가봐. 네가 있으면 네 엄마 또다시 쓰러질지도 몰라.”
그러자 옆에 있는 친척들도 한 마디, 두 마디 거들었다.
“그래, 은정아. 오늘은 먼저 가는 게 좋겠어. 네 엄마 몸도 안 좋은데 지금은 너를 보면 화만 내시잖아.”
소은정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엄마, 그러면 저 이만 가볼게요. 다음에 꼭 다시 보러 올게요. 그러니까...”
하지만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은정의 엄마는 그녀를 향해 컵을 뿌리며 역정을 냈다.
“가라니까!”
...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온 소은정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험상궂은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있는 조지훈을 발견했다. 그의 앞에는 커다란 캐리어 두 개가 놓여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소은정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버린 소은정은 현관에 있는 신발장에 가까스로 몸을 지탱한 채 말문을 열었다.
“여보, 지금은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당신이 안 믿는 거 아는데요. 그래도 당신이 꼭 알았으면 하는 게 있어요. 어제저녁의 일 말인데요... 저 정말 인영이랑 호텔에 뭐 찾으러 간 거였어요. 그런데 인영이가 저한테 약을 탄 술을 먹여서 그렇게 된 거예요. 저는 아직도 인영이가 대체 왜 저한테 그런 짓을 했는지 잘 모르겠어요.”
어제저녁, 유인영은 소은정에게 전화해 자신과 함께 호텔에 두고 온 물건을 찾으러 가자고 부탁했다. 두 사람은 대학교 4년 내내 기숙사 룸메이트였기에 소은정은 별다른 의심 없이 그녀의 부탁을 들어줬다. 그리고 물건을 찾으러 들어간 호텔 방에서 그녀가 건넨 술 한잔을 마시고 바로 정신을 잃었던 것이었다.
소은정은 유인영이 대체 왜 자기에게 그런 짓을 했는지 도통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소은정의 해석이 조지훈의 귀에는 변명처럼 들리는지 그는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당신이 바람기 이기지 못하고 다른 남자랑 놀아난 걸 왜 엄한 사람한테서 이유 찾아? 당신 물건 여기 다 챙겨 넣었으니까 당장 가지고 나가! 그리고 평생 내 눈앞에 띄지 마. 당신 그 역겨운 얼굴 보기 싫으니까!”
조지훈의 말을 들은 소은정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하얗게 질렸다. 만약 신발장에 몸을 기대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진작 넘어졌을지도 몰랐다.
소은정은 심호흡하며 마음속의 슬픔을 가까스로 진정시켰다.
“좋아요. 갈게요. 우리 두 번째 집은 나한테 줘요. 그리고 돈은 당신이랑 나랑 절반씩 가지는 거로 해요.”
조지훈은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소은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 미쳤어? 당신이랑 나는 진작 이혼했잖아? 그리고 집이랑 돈은 다 내 건데?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절반씩 가지자는 그런 소리를 해?”
소은정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조지훈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신혼집 사느라 냈던 계약금 4억, 그거 우리 아빠 사망 보상금으로 낸 거예요.
우리 아빠 목숨값이라고요! 그리고 얼마 전 샀던 우리 두 번째 집, 그것도 우리 집 재개발 보상금으로 산 거잖아요. 그런데 당신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요?”
소은정은 해운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었다. 그녀의 아빠는 그녀가 대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 사망했고 할머니 역시 1년 전에 사망했다. 엄마랑 아빠는 그녀가 어렸을 때 이혼했으므로 아빠와 할머니의 유산은 모두 소은정이 물려받게 되었다.
그런데 할머니가 남겨준 집이 재개발되면서 그녀에게는 16억이라는 돈과 집 한 채가 차려지게 되었다.
하루가 다르게 집값이 껑충 뛰어오르는 해운시에서는 얼마 전부터 주택구매 제한 정책이 생겼다.
조지훈은 통화팽창이 심각한 요즘 같은 시기에 16억이라는 돈을 은행에 넣어두고 있기보다는 집 한 채를 더 사는 게 훨씬 더 이득이라며 그녀를 꼬드겼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할머니가 남겨준 집 한 채가 있었기에 조지훈 쪽에서 그녀에게 가짜 이혼을 먼저 제안했다.
조지훈의 말에 의하면 두 사람이 가짜로 이혼하고 조지훈의 명의로 집을 사게 되면 두 사람은 집도 사고, 세금도 줄일 수 있다고 했다.
처음 한두 번은 조지훈의 말을 듣고 긴가민가했으나 조지훈이 하도 여러 번 얘기하자 소은정은 마음이 동했다. 게다가 집값이 하루가 다르게 올랐기에 그 상황을 지켜보던 소은정은 조지훈의 결국 조지훈의 말대로 하게 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을 지켜보던 친척들은 이혼까지 하며 집을 사려는 게 말이 안 된다며 혀를 끌끌 찼다.
결국 두 사람은 계획대로 이혼하고 새로 집을 장만했다. 그리고 가짜로 이혼한 것이었기에 이혼 후에도 변함없이 같이 살았다. 재산과 부동산 역시 정리하지 않은 채로 말이다.
하지만 어제와 같은 일이 벌어질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조지훈은 테이블에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팔짱을 끼며 소은정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나한테서 한 푼도 못 가져갈 줄 알아. 만약 당신이 돈이랑 집을 가져가려고 한다면 나 당신 회사 사람들한테 당신 알몸 사진 다 뿌려버릴 거야!”
조지훈의 휴대폰에는 소은정의 나체 사진이 들어있었다. 소은정은 찍기 싫어했지만, 조지훈이 하도 구슬려 어쩌다 보니 찍게 된 사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