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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이혼

  • 해운시 제일병원.
  • 소은정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병상에 누워 두 눈을 꼭 감고 있는 엄마를 바라보았다. 병실에 있는 친척들은 소은정을 보며 수군거렸지만 정작 소은정의 정신은 온통 엄마에게 쏠려있었기에 그들의 손가락질과 수군거림이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 ‘제발 엄마가 괜찮아야 할텐데... 만약 엄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난 아마 평생 나를 용서하지 못할 거야.’
  • 엄마가 깨나기를 기다리는 일 분이 마치 일 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얼마쯤 지났을까, 엄마의 손가락이 살짝 움찔했다.
  • ‘뭐야, 움찔한 것 같은데? 내가 잘 못 본 걸까?’
  • 그때, 꼼짝없이 누워만 있던 엄마가 천천히 눈을 떴다.
  • 순간, 소은정은 너무 기뻐 환호의 함성을 터뜨렸다.
  • “엄마!”
  • 소은정의 소리를 들은 친척들도 다급히 달려왔다.
  • “깼다고? 깬 거예요?”
  • 소은정은 조심스럽게 엄마를 부축해 자리에 앉혔다.
  • 엄마의 입술이 말라 부르튼 것을 본 그녀는 컵에 물을 담아 엄마에게 건네며 말했다.
  • “엄마, 여기 물이요. 물부터 마셔요.”
  • 하지만 소은정의 엄마는 혼신의 힘을 다해 소은정을 밀쳐내며 말했다.
  • “저리 가! 썩 꺼지지 못해? 나는 너 같은 딸 둔 적 없어!”
  • 바닥에 철퍼덕 넘어진 소은정은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엄마를 불렀다.
  • “엄마...”
  • 하지만 소은정의 엄마는 문을 가리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 “나가!”
  • 소은정의 새아빠는 화를 이기지 못해 몸을 부들부들 떨며 얼굴이 퍼렇게 질린 아내의 어깨를 감쌌다. 그러고는 울상인 소은정에게 손을 저어 보이며 말했다.
  • “은정아, 이만 가봐. 네가 있으면 네 엄마 또다시 쓰러질지도 몰라.”
  • 그러자 옆에 있는 친척들도 한 마디, 두 마디 거들었다.
  • “그래, 은정아. 오늘은 먼저 가는 게 좋겠어. 네 엄마 몸도 안 좋은데 지금은 너를 보면 화만 내시잖아.”
  • 소은정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 “엄마, 그러면 저 이만 가볼게요. 다음에 꼭 다시 보러 올게요. 그러니까...”
  • 하지만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은정의 엄마는 그녀를 향해 컵을 뿌리며 역정을 냈다.
  • “가라니까!”
  • ...
  •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온 소은정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험상궂은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있는 조지훈을 발견했다. 그의 앞에는 커다란 캐리어 두 개가 놓여있었다.
  • 그것을 본 순간, 소은정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 다리에 힘이 풀려버린 소은정은 현관에 있는 신발장에 가까스로 몸을 지탱한 채 말문을 열었다.
  • “여보, 지금은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당신이 안 믿는 거 아는데요. 그래도 당신이 꼭 알았으면 하는 게 있어요. 어제저녁의 일 말인데요... 저 정말 인영이랑 호텔에 뭐 찾으러 간 거였어요. 그런데 인영이가 저한테 약을 탄 술을 먹여서 그렇게 된 거예요. 저는 아직도 인영이가 대체 왜 저한테 그런 짓을 했는지 잘 모르겠어요.”
  • 어제저녁, 유인영은 소은정에게 전화해 자신과 함께 호텔에 두고 온 물건을 찾으러 가자고 부탁했다. 두 사람은 대학교 4년 내내 기숙사 룸메이트였기에 소은정은 별다른 의심 없이 그녀의 부탁을 들어줬다. 그리고 물건을 찾으러 들어간 호텔 방에서 그녀가 건넨 술 한잔을 마시고 바로 정신을 잃었던 것이었다.
  • 소은정은 유인영이 대체 왜 자기에게 그런 짓을 했는지 도통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 하지만 소은정의 해석이 조지훈의 귀에는 변명처럼 들리는지 그는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 “당신이 바람기 이기지 못하고 다른 남자랑 놀아난 걸 왜 엄한 사람한테서 이유 찾아? 당신 물건 여기 다 챙겨 넣었으니까 당장 가지고 나가! 그리고 평생 내 눈앞에 띄지 마. 당신 그 역겨운 얼굴 보기 싫으니까!”
  • 조지훈의 말을 들은 소은정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하얗게 질렸다. 만약 신발장에 몸을 기대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진작 넘어졌을지도 몰랐다.
  • 소은정은 심호흡하며 마음속의 슬픔을 가까스로 진정시켰다.
  • “좋아요. 갈게요. 우리 두 번째 집은 나한테 줘요. 그리고 돈은 당신이랑 나랑 절반씩 가지는 거로 해요.”
  • 조지훈은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소은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 “당신 미쳤어? 당신이랑 나는 진작 이혼했잖아? 그리고 집이랑 돈은 다 내 건데?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절반씩 가지자는 그런 소리를 해?”
  • 소은정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조지훈을 바라보며 말했다.
  • “우리 신혼집 사느라 냈던 계약금 4억, 그거 우리 아빠 사망 보상금으로 낸 거예요.
  • 우리 아빠 목숨값이라고요! 그리고 얼마 전 샀던 우리 두 번째 집, 그것도 우리 집 재개발 보상금으로 산 거잖아요. 그런데 당신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요?”
  • 소은정은 해운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었다. 그녀의 아빠는 그녀가 대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 사망했고 할머니 역시 1년 전에 사망했다. 엄마랑 아빠는 그녀가 어렸을 때 이혼했으므로 아빠와 할머니의 유산은 모두 소은정이 물려받게 되었다.
  • 그런데 할머니가 남겨준 집이 재개발되면서 그녀에게는 16억이라는 돈과 집 한 채가 차려지게 되었다.
  • 하루가 다르게 집값이 껑충 뛰어오르는 해운시에서는 얼마 전부터 주택구매 제한 정책이 생겼다.
  • 조지훈은 통화팽창이 심각한 요즘 같은 시기에 16억이라는 돈을 은행에 넣어두고 있기보다는 집 한 채를 더 사는 게 훨씬 더 이득이라며 그녀를 꼬드겼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할머니가 남겨준 집 한 채가 있었기에 조지훈 쪽에서 그녀에게 가짜 이혼을 먼저 제안했다.
  • 조지훈의 말에 의하면 두 사람이 가짜로 이혼하고 조지훈의 명의로 집을 사게 되면 두 사람은 집도 사고, 세금도 줄일 수 있다고 했다.
  • 처음 한두 번은 조지훈의 말을 듣고 긴가민가했으나 조지훈이 하도 여러 번 얘기하자 소은정은 마음이 동했다. 게다가 집값이 하루가 다르게 올랐기에 그 상황을 지켜보던 소은정은 조지훈의 결국 조지훈의 말대로 하게 되었다.
  • 그러나 두 사람을 지켜보던 친척들은 이혼까지 하며 집을 사려는 게 말이 안 된다며 혀를 끌끌 찼다.
  • 결국 두 사람은 계획대로 이혼하고 새로 집을 장만했다. 그리고 가짜로 이혼한 것이었기에 이혼 후에도 변함없이 같이 살았다. 재산과 부동산 역시 정리하지 않은 채로 말이다.
  • 하지만 어제와 같은 일이 벌어질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 조지훈은 테이블에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팔짱을 끼며 소은정을 바라보았다.
  • “당신은 나한테서 한 푼도 못 가져갈 줄 알아. 만약 당신이 돈이랑 집을 가져가려고 한다면 나 당신 회사 사람들한테 당신 알몸 사진 다 뿌려버릴 거야!”
  • 조지훈의 휴대폰에는 소은정의 나체 사진이 들어있었다. 소은정은 찍기 싫어했지만, 조지훈이 하도 구슬려 어쩌다 보니 찍게 된 사진이었다.
  • 그 순간, 소은정은 어쩌면 이 모든 게 조지훈의 계획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 ‘이 모든 일들이... 설마 지훈 씨가 계획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