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국한 두 번째 날, 소은영은 아침 일찍부터 소연준과 함께 엄마 집에 갈 때 들고 갈 물건을 사기 위해 마트에 갈 채비를 하였다.
아침 외출을 할 생각에 신이 나 있던 소연준은 할머니를 보러 갈 거라는 소은정의 말에 금세 시무룩해져 나가기를 거부했다.
“할머니는 연준이 싫어해요. 그래서 연준이도 가기 싫어요.”
소연준은 기억력이 좋아 홍진숙이 소은정과 통화하며 자기를 애비 없는 자식이라고 했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비 없는 자식이라고 말하며 풍겼던 그 뉘앙스나 분위기 역시 우호적이지 못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소연준은 프랑스에 있을 때부터 멀리 해운시에 살고 있다는 할머니를 좋아하지 않았다.
소은정 역시 소연준이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아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한쪽은 자신을 낳아준 엄마였고, 다른 한쪽은 자신이 배 아파 낳은 자식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소은정은 결국 엄마에게 잘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결국 따지고 보면 다 내 탓이야. 조지훈이 호텔에 엄마랑 친척들 데리고 찾아왔을 때, 엄마는 친척들 앞에서 많이 놀라고 충격받으셨을 거야. 조지훈이랑 유인영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는 것을 몰랐으니 당연히 그럴 만했어. 그리고 결국 나 때문에 병원입원까지 하셨잖아.’
홍진숙은 소은정때문에 친척들 앞에서 망신당했다며 그 사건이 있고 나서 반년 넘게 소은정과 연락을 끊고 살았다. 그 뒤로도 소은정이 계속 먼저 연락을 하자 홍진숙은 마지못해 연락받았다. 그리고 소은정이 프랑스에서 아빠도 모르는 아이를 낳았다고 하자 또다시 충격을 받아 입원하기도 했었다.
홍진숙은 아빠도 모르는 아이를 덜컥 낳아버린 소은정이 미련하고 바보 같아 소연준을 애비 없는 자식이라 불렀다. 물론, 그런 소연준이 이뻐 보일 리도 만무했다.
하지만 소은정에게 홍진숙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가장 가까운 가족이었다. 그래서 아들과 엄마 사이에 갈등이 생길 때 소은정은 어린 아들을 잠시 제쳐두고 엄마를 선택했다. 아들에게는 시간이 많아 자신이 앞으로 두고두고 잘해줄 수 있지만 하루가 다르게 나이 들어가는 엄마에게는 함께 할 시간이 많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소은정은 소연준을 달래며 말했다.
“연준아, 엄마랑 같이 할머니 보러 가자. 가서 딱 점심밥만 먹고 나오는 거야. 이러면 어때?”
소연준은 고개를 숙이고 말없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연준아, 사랑하는 아들. 엄마 부탁 한 번만 들어주면 안 될까? 연준이 할머니가 나한테는 엄마잖아. 엄마도 엄마를 5년 동안이나 못 봤어. 그러니까 정말 보고 싶단 말이야. 연준이랑 엄마랑 같이 할머니 보러 딱 한 번만 가자. 엄마는 할머니가 연준이를 직접 보시면 분명히 좋아하고 반겨주실 거라고 믿어.”
소연준은 기대하는 눈빛으로 자기를 바라보는 소은정을 보자 마음이 약해져 애늙은이처럼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좋아요. 엄마랑 같이 갈게요. 하지만 딱 점심만 먹고 나오겠다고 약속해요!”
소은정은 활짝 웃으며 소연준의 볼에 뽀뽀했다.
“역시 우리 아들, 엄마 부탁 들어줄 줄 알았어. 그래, 약속대로 점심만 먹고 나오자~”
소은정과 소연준은 마트에 가 제철 과일이며 보양식들을 잔뜩 사 들고 홍진숙의 집을 찾았다.
소은정은 잔뜩 기대하는 표정으로 문을 열어주는 홍진숙을 바라보며 말했다.
“엄마, 잘 지내셨어요? 정말 보고 싶었어요!”
옆에 있는 소연준은 무표정의 얼굴로 작게 말했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그러나 소은정의 기대와는 달리 홍진숙은 소은정과 소연준을 바라보더니 미소는커녕 인상을 팍 쓰며 말했다.
“들어와!”
집안에 들어서자 거실에는 홍진숙의 나이대로 보이는 아줌마들이 여럿 있었다.
소은정은 그 사람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그러자 소연준도 따라서 말했다.
“안녕하세요!”
소파에 앉아 있던 아줌마들은 웬 꼬마가 야무지게 인사를 하자 기특한 마음이 들어 홍진숙을 향해 물었다.
“아유, 언니. 이 꼬맹이는 누구야?”
“애가 참 똑부러지게도 인사하네. 아가야, 너 몇 살이니?”
하지만 평소 같으면 신나서 손님들에게 소개하고 야단을 부렸을 홍진숙이 그날따라 대답하기 싫은 표정을 지으며 손님들에게 이만 먼저 돌아가라고 말했다.
“집에 손님이 왔으니 이만 먼저들 가봐. 내일 다시 놀러 와, 알겠지?”
그 말을 듣자 소은정의 미소가 점차 사라졌고 안색도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그녀는 자신과 아들을 반기지 않는 듯한 홍진숙의 모습에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벌써 5년이나 지났는데 엄마는 아직도 나를 용서하지 않았어. 친구들에게 자기 배 아파 낳은 자식을, 그리고 손주를 소개해줄 생각이 아예 없나 봐. 내가 그렇게까지 부끄러운 자식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