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윤천은 꾸깃꾸깃해진 서류에 사인을 하고 볼펜을 내려놓은 후 냉정하게 외투를 챙겨 떠났는데 그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유이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그녀의 어머니 품에 안겨 통곡하였다. 그녀가 아기를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혼을 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소윤천의 한마디에 아기를 지워야 할 수도 있기에 유이는 소윤천을 자극해 이혼하기 위해 성동남과 육모와 함께 지금 이 상황을 연기한 거였다.
하지만 소윤천이 이혼서류에 사인을 하는 순간 유이는 내장이 뒤틀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소윤천은 어떻게 유이의 집에서 나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그는 길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람이 보이자 가까이 다가가 돈을 쥐여주며 말했다.
“당신의 담배와 라이터를 저한테 파시죠.”
상대방은 소윤천이 만 원을 내밀며 말하자 얼른 담뱃갑과 라이터를 소윤천에게 건넸다.
소윤천은 그 자리에서 바로 담배 한 개비에 불을 붙여 피기 시작했다. 그는 평소 담배 냄새를 좋아하지 않았고 사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 개비씩 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마음이 너무 공허하여 뭐라도 대신 메꿔야 했고 그걸 만족할 수 있는 게 담배였다.
소윤천은 담배를 피우다가 손가락에 있는 금반지를 보고는 주머니에서 반지 케이스를 꺼냈다. 그는 싱가포르로 출장 갔을 때 길옆의 주얼리 매장에서 이 반지를 보고 유이가 결혼식 때 사줬던 오백만 원짜리 다이아반지를 계속 끼고 한 번도 뺀 적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유이에게 보상도 해줄 겸 소윤천은 가게로 들어가 매니저를 통해 커플 반지 한 쌍을 주문 제작하였고 다음날 받았다. 한 쌍의 백금 반지 중에서 그는 자신의 것은 미리 손가락에 끼고 유이의 것은 출장 중 잃어버릴까 봐 먼저 한국으로 택배를 보내두었다.
원래는 한국으로 돌아오면 유이에게 서프라이즈를 해줄 생각이었는데 선물도 하기 전에 유이의 손에 끼워져 있던 다이아 반지가 되돌아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고 더욱 큰 ‘서프라이즈’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몇 년간 소윤천은 일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는 비록 등 떠밀려 유이와 결혼했지만 그녀를 푸대접한 적은 없다고 생각했다.
아까 유이의 어머니 집에서 유이가 담담하게 한 말들을 떠올린 소윤천은 왠지 모르게 반지를 보면 볼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 반지를 빼서 반지 케이스와 함께 인공 호수에 던져버렸다. 그러면서 이혼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고 자신은 여전히 소윤천이라고 생각하였다.
식습관이 불규칙적이었던 유이는 뱃속의 아기를 위해 음식에도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엽산도 꼬박꼬박 챙겨 먹고 술 담배도 전혀 하지 않았으며 하이힐도 굽이 낮은 신발로 바꾸고 야근을 하더라도 너무 늦게까지는 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유이의 배는 점점 불러왔고 전에 입었던 정장들도 몸에 맞지 않아 매일 펑퍼짐하고 편한 옷만 입었다.
유이는 옷 위로 점점 불러오는 배를 만지면서 고민에 빠졌다. 3개월째 들어서면 펑퍼짐한 옷으로도 가릴 수 없을 것이고 그때는 회사 사람들도 다 알게 될게 뻔했다. 그렇게 되면 사장은 그녀에게 강도 높은 일은 맡기지 않을 것이고 출산 후 회사로 돌아왔을 때 그녀의 자리는 다른 사람이 대체할 것이었다. 지금은 월급이 몇 백만 원은 되니 각종 대출도 갚을 수 있는데 만약 직장을 잃게 되면 그녀가 감당해야 할 스트레스는 장난이 아니었다.
“유 팀장님.”
동료가 걸어오자 유이는 다급히 손을 내려놓고 담담하게 웃으며 물었다.
“무슨 일이죠?”
“계 사장님께서 열시까지 회의실로 모이시라고 합니다.”
동료는 서류를 유이의 책상에 올려놓으며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소곤거렸다.
“계 사장님께서 용등 그룹 사람이 방문 온다고 아래층에 있는 레스토랑 전체를 빌렸대요.”
용등 그룹이란 말을 들은 유이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마 그녀가 소윤천과 이혼한 후 한 달 만에 보는 듯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