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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돈이 조금은 있는 편이지

  • 유희는 이진철이 저녁에 전화를 하겠다고 했던 일을 까먹고 있었다.
  • 그녀는 반서준을 쳐다보고 있었고 이를 악물며 놓으라고 경고했다.
  • 반서준은 그리 부드럽지 않은 동작으로 그녀의 턱을 치켜 올렸다.
  • “결혼했어? 처음이라 그러더니 날 속인 거야?”
  • “우리 남편 발기부전이거든. 검사까지 다 했잖아요. 당신이 날 속인 거 아직 따지지도 못했고만 먼저 그렇게 나오신다?”
  • 유희는 퉁명스럽게 말을 뱉었다.
  • 그녀는 반서준을 따라오게 만든 것을 후회했다. 늑대를 집으로 들인 거나 다름없었다.
  • 잊고 있었는데 이 남자는 뼈를 뱉지도 않고 사람을 삼켜버리는 굶주린 늑대였다.
  • 사이드 테이블에 놓인 핸드폰은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다. 사랑하는 남편이라는 글자가 계속해서 굴러가고 있었다.
  • 반서준은 유희를 놔주었다.
  • 유희는 세 걸음 같은 두 걸음으로 사이드 테이블에 놓인 핸드폰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 수락 버튼을 눌렀다.
  • 이진철은 가끔 강방증이 있는 사람처럼 받지 않으면 받을 때까지 전화를 거는 경향이 있었다.
  • “유희 너 오늘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안영 씨 말로는 네가 남자랑 같이 갔다고 그러던데. 그 남자 누구야? 너 지금 어딘데? 왜 이제야 전화를 받아?”
  • 이진철은 전화를 받자마자 따발총처럼 질문을 해댔다.
  • 유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큰 산처럼 방 안에 우뚝 서있는 반서준의 눈치를 보았다.
  • 그녀는 반서준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 유희는 당황한 눈빛이었고 눈을 찡긋하며 손가락을 입가에 댔다. 소리를 내지 말라는 제스처였다.
  • 괜히 바람을 피우는 듯한 기분이 든 반서준은 눈가가 점점 어두워졌다.
  • 그녀가 남편이랑 수다를 떠는데 방해가 된다 이건가?
  • 반서준은 당연히 유희의 요구를 만족시켜줄 생각이 없었다.
  • 이진철은 계속해서 여보세요를 외치고 있었다. 신호가 안 좋은 줄로만 알았던 것이었다.
  • 문득 반서준이 손으로 유희의 머리를 받쳐 들고 이마에 입맞춤을 했다.
  • 유희의 살짝 벌어져있던 입술은 그의 입술에 의해 막혀버렸다. 혀끝이 그녀의 입안을 파고들며 하고 싶었던 말을 전부 삼켜버리게 만들었다.
  • 유희는 동공이 세게 흔들렸다.
  • 그녀의 첫 반응은 전화를 끊어버리는 것이었다. 그 뒤로 그녀는 반서준의 뺨을 갈겨버렸다.
  • 그 귀싸대기에는 그녀의 모든 힘이 쏠려 있었다. 그렇게 반서준의 목에는 긁힌 자국이 깊게 박히게 되었다.
  • 반서준은 그제야 키스를 멈췄다. 그의 입속에는 짙은 피비린내가 풍기고 있었다.
  • 유희는 눈가에 눈물이 고이고 있었고 한껏 속상한 목소리였지만 그 속에 고집스러움도 담고 있었다.
  • “반서준, 나랑 한 번 잤다고 계속 날 건드릴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땐 한탕주의 거래였어. 그런데 지금 계속해서 그걸로 날 내치는 건 대체 무슨 심보야.”
  • 반서준의 깊고 검은 눈동자는 유희를 향해 있었다. 그는 목을 문지르다 그녀의 말에 웃음이 터져버렸다.
  • 이 여자는 고양이라도 되나? 어쩜 손톱이 이리도 날카로운 거야!
  • 반서준이 만났던 여자들은 늘 순응하는 사람들이었다. 처음 마주친 유희처럼 말이다.
  • 이렇게 반항하는 여자는 그녀가 처음이었다.
  • 그는 여자의 맛을 충분히 맛보지 못해 미련이 남은 듯한 모습이었다.
  • 반서준의 핸드폰이 울렸고 그는 짜증스럽게 그걸 확인했다. 흥이 단번에 확 식어버린 그는 전화를 완전히 꺼버렸다.
  • 유희는 그가 떠날 낌새를 보이자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반서준이 핸드폰을 확인하며 보이는 반응을 보아하니 와이프가 불시 검문을 하는 듯했다.
  • “며칠 뒤에 다시 찾아오지.”
  • 유희는 놀란 토끼 눈을 했다. 마치 사탄을 마주하기라도 한 듯한 모습이었다.
  • “왜 또 찾아오겠다는 거예요? 계속 6억짜리 수표로 날 농락하려고?”
  • 반서준은 유희가 가짜 수표라고 하는 말을 한두 번 들은 게 아니었다.
  • 그는 낮은 톤으로 말을 꺼냈다.
  • “내가 돈이 좀 있는 편이라서. 공짜로 너랑 자는 일은 나 못해. 수표는 진짜야.”
  • “장담할 수 있어요?”
  • 유희는 맨발로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 “어떻게 장담하면 될까? 손이라도 들고 맹세할까? 수표는 진짜야. 돈 뜯어내고 싶은 거면 다른 핑계로 대는 게 좋을 거야.”
  • 반서준은 다소 불만 섞인 모습이었다.
  • 유희는 입술을 오므렸다. 반서준에게 있어 그녀는 돈을 벌기 위해 무슨 수든 쓸 수 있는 사람으로 비친 것만 같았다.
  • 반서준이 떠난 뒤에서야 하민은 방에서 나올 수 있었다.
  • “유희 너 누굴 집으로 데려온 건지 알기나 해?”
  • 하민은 여전히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지 못한 상태였다.
  • “늑대 자식.”
  • 유희는 소파에 털썩 기대앉았다.
  • 하민이 비아냥거렸다.
  • “네가 무슨 수로 반서준을 집에 끌어들였는지는 모르겠는데 내 말 잘 들어 유희. 꿈 깨. 반서준 곧 있으면 결혼하게 될 거야. 모든 오리 새끼가 백조로 변할 수 있을 거라는 착각 따위는 하지도 마.”
  • 유희는 나른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반서준에 대한 그녀의 인상은 더더욱 악렬해졌다. 그는 악마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