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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당연히 너도 내가 다른 의도가 있을 거라고 의심해도 돼

  • 그는 덤덤하게 얘기했다.
  • “당연히 의심해도 되지. 내가 너한테 다른 의도를 품은 게 사실이거든. 예를 들면 생리적인 수요라던가.”
  • 유희는 쌍욕을 꽂아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 그녀는 심신을 안정시킨 뒤 그럴 능력이 안 된다는 것을 전했다.
  • “요즘 컨디션이 안 좋으니까 다른 사람한테나 품어요.”
  • 마법이 그녀를 지켜준 셈이었다. 그녀는 일부러 가방을 흔들어 안에 포장을 뜯은 생리대가 있는 것을 확인시켰다.
  • 운전대를 잡고 있던 반서준은 곁눈질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 “나는 말이지, 운전할 때 빨간불에 건너가는 걸 좋아할 뿐만 아니라 다른 일에서도 빨간불에 건너가는 걸 좋아해. 상관없어!”
  • 유희는 울화가 잔뜩 치밀었다. 반서준은 그녀가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의 말발을 지닌 사람이 아니었다.
  • 그녀는 아예 반서준에게 밑장을 까 보였다. 그녀가 던진 작은 돌멩이가 조금이라도 연민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 “전 이제 돈도 없고 일자리도 없어요. 집주인한테 쫓겨나기까지 했고요. 어쨌든 나라는 사람은 재수가 없는 사람이거든요. 나랑 연관되기만 하면 그 사람도 재수 없어져요. 나처럼 최하층에 있는 노고에 찌든 사람을 괴롭혔다가 천벌받을 거예요.”
  • 무고한 그녀의 시선은 너무나도 강렬했다. 유희는 그렇게 불쌍한 눈빛으로 반서준을 응시하고 있었다.
  • 빨간불이 되었을 때 반서준은 드디어 고개를 돌렸다.
  • 깨끗하고 무고한 그녀의 눈빛에 그는 들끓는 마음으로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 그의 눈빛에 빨간 담뱃불이 비쳐 있었고 낮은 톤의 그의 목소리가 차 안을 가득 매웠다.
  • “날 따르던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나한테 다 문제가 못 돼.”
  • 유희는 바로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의자에 머리를 기대었다.
  • “싫어요.”
  • 반서준은 팔걸이에서 키를 꺼내 유희의 다리에 던져주었다.
  • “주소는 문자로 보내줄게.”
  • 유희는 키를 다시금 제자리로 넣었다.
  • 그녀는 비록 가난했지만 이제 사랑이라는 족쇄로 스스로를 옥죄어가며 돈을 구하려고 애를 쓸 필요가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많이 가벼워진 상태였다.
  • 이대로 따라간다면 부자의 애완동물로 지내게 될 건데. 그녀는 돌아버린 상태가 아니라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었다.
  • 반서준은 이번에 꽤나 젠틀하게 유희가 얘기했던 주소로 데려다주었다.
  • 가는 내내 유희는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그녀는 시도 때도 없이 그에게 길을 가리켜주고 있었다. 혹시라도 그녀를 황야로 끌고 갈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 유희는 핸드폰을 꺼내 삼촌에게 전화를 걸려다 키가 언제인지 모르게 주머니에 다시 들어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 유희는 삼촌 가족이 쉬는 것을 방해하게 될까 봐 차마 큰 소리로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다.
  •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고 문을 두드려도 아무도 열어주지 않았다. 이 시간에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그녀는 그대로 바닥에 쪼크리고 앉았다.
  • 이곳은 그녀가 어려서부터 자라온 곳이었다. 이곳은 그녀의 수많은 기억을 담고 있었다.
  • 외할머니가 세상에 살아계셨을 때 늘 그녀에게 불쌍하다고 했었다. 엄마는 쇠고랑을 차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언제 풀려나는 지도 알 수 없었다.
  • 그녀의 친부는 더한 사람이었다. 분명 넘쳐나는 재산을 갖고 있으면서도 집에 수저 하나 보태는 것을 싫어했다.
  • 그녀는 집으로 데려가는 건 둘째 치고 양육비도 한 번 준 적이 없었다. 마치 그녀라는 딸을 낳은 적조차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 유희는 옛집 앞에서 배회하고 있었다. 졸리고 배도 고픈 그녀는 눈꺼풀이 무거웠다.
  • 그녀는 흰색과 파란색이 섞인 교복에 책가방을 메고 야간 자율 학습을 끝낸 뒤 집으로 돌아왔다.
  • 외할머니는 아직 살아계셨고 지팡이를 짚은 채 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 그녀는 기뻐하며 외할머니에게로 뛰어갔다.
  • “할머니, 저녁에 뭐 먹어요? 너무 배고파요.”
  • 외할머니는 자애로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 “할미가 네가 제일 좋아하는 국수랑 닭발을 만들었어.”
  • 그녀가 집으로 들어가자 뒤에서 따라오던 할머니는 사라지고 없었다.
  • 할머니를 찾아 헤매 봐도 그녀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가 아무리 큰 소리로 불러도 할머니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 유희는 할머니를 부르다 잠에서 깼다. 그녀는 온몸의 힘이 빠져나간 듯 벽에 기대어 늘어져 있었다.
  • “유희야, 너 언제 왔어?”
  • 삼촌 오천광의 목소리가 들리자 유희는 바닥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그제야 날이 밝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 그녀는 또 꿈을 꾼 것이었다. 그녀는 꿈에서나 할머니와 얘기를 할 수 있었다.
  • 유희는 삼촌을 만났는데도 의지가 되거나 혈연관계를 가진 사람 사이의 익숙한 애정 따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 그녀는 삼촌이 집을 내놓으라고 할 때 한 번 보고 나서 그 뒤로 한 번도 연락한 적이 없었다.
  • “어제저녁에 왔어요. 전화 엄청 많이 했는데. 밤새 기다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