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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반서준 씨의 사람이었군요

  • 엠파이어 클럽, A 시에서 최고급에 꼽히는 엠파이어 클럽은 회원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 이곳으로 오는 사람들은 부자이거나 귀한 신분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이곳의 입문 레벨은 몸값이 20억을 넘는 것이었다.
  • 유희는 지금까지 이런 곳을 경멸해오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제 자의로 이 지경까지 오게 될 것이라고 그녀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에게는 돈이 필요했다.
  • 유희는 반서준을 통이 정말로 큰 사람이라고 착각했다. 6천만 원이 필요하다고 했을 때 6억을 쥐여줘서 급한 불을 끌 수 있게 해준 사람인 줄 알았다.
  • 하지만 이진철이 그녀에게 수표가 가짜라는 것을 말해주었을 때 그녀는 머리가 띵하며 하늘이 무너질 것만 같이 느껴졌다.
  • 험악한 세상 속에서 그녀는 사기라는 것을 당했던 것이었다.
  • 이진철의 수술 비용은 결국 그의 가족이 돈을 끌어모아서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 유희는 이 가에서 무슨 수로 돈을 모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애초에 울부짖으며 그녀더러 돈을 내놓으라고 했던 것도 이 가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 그녀의 예비 시어머니가 얘기했었다. 이진철이 앞으로 재활하는데 쓰게 될 비용은 이제 더 이상 내놓기 힘들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다.
  • 매달 적어도 2000만 원이 필요했고 그녀가 알바를 하는 것으로는 10분의 1도 채우기 힘든 턱도 없는 비용이었다.
  • “유희, 빨리빨리……301호 손님께서 스페이드 A를 오픈하셨으니까 네가 가서 술 올려드려.”
  • 마담 CC 언니가 손으로 유희의 등을 밀며 재촉했다.
  • 301호는 엠파이어에서 유일한 VIP 룸이었다. 보통은 재벌들이나 국회의원들이 이용하는 룸이었다.
  • 들어가기 전 CC 언니는 특별히 당부를 전했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못 본 척하라는 것이었다.
  • 그녀는 그 말을 듣자마자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녀의 피부는 통제를 잃은 채 세밀한 소름이 돋아버렸다.
  • 유희는 흰색의 원피스를 입고 같은 컬러의 하이힐 롱부츠를 신고 있었다. 수수하고 작은 얼굴에는 화장이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 한 손으로 트레이를 들고 그녀는 도금이 된 문 손잡이를 돌리며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 이곳은 바깥의 소란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고요한 분위기였다. 그리고 엠파이어의 에이스 미녀들이 전부 이곳에 와있었다.
  • “들어오자마자 품에 뛰어들다니. 아가씨가 마음도 급하지.”
  • 유희는 고개를 깊게 숙이고 있다가 두터운 인간 벽에 머리를 부딪히게 되었다. 그리고 경박한 목소리가 그녀의 정수리에 떨어졌다.
  • 룸 안의 불빛은 어스름했고 그녀는 고개를 들어 머리를 부딪힌 남자의 모습을 마주하게 되었다. 40대로 보이는 남자는 뚱뚱한 몸매에 골드 테로 되어있는 안경을 끼고 있었다. 그는 육안으로 봤을 때 바로 직급이 높은 사람으로 판단이 되었다.
  • 유희는 재빨리 사과를 건넸다.
  • “죄송합니다 사장님. 제가 길을 못 보고 걸은 탓이에요.”
  • 남자는 변태 끼가 다분한 미소를 지었다.
  • “길을 못 봤다고 하면 끝이야? 원하는 게 있으면 바로 말해. 이렇게 품을 파고드는 연기를 보태지나 말고.”
  • 유희의 팔목은 남자에게 붙잡혀 있었다. 그녀는 마치 어중이떠중이처럼 소파까지 밀려갔다.
  • 그녀는 팔로 지탱하며 초라한 모습으로 털썩 주저앉게 되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권력을 쥐고 있는 귀한 신분의 사람들이었기에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억지로 분노를 억누르는 수밖에 없었다.
  • 룸 안 가득 자욱한 담배 연기와 술 냄새, 그리고 샌달우드 향으로 판단되는 옴므 향수 냄새가 단번에 코 끝을 파고 들어왔다.
  • 이 냄새는 그녀가 뼛속 깊이 새긴 냄새였다. 그녀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녀의 귓가에는 동굴 같은 목소리가 악마의 속삭임처럼 들려왔다.
  • “유희 씨, 우리 또 만났네.”
  • 반서준은 소파에 기댄 채 호주머니에서 담배 한 대를 꺼냈다. 그리고 불꽃이 스쳐 지나갔다.
  • 유희는 불꽃을 따라 고개를 들었고 진실하지 않게 느껴질 정도로 준수한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 남자가 죽어서 재가 되는 한이 있어도 알아볼 수 있었다.
  • 반서준, 그녀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 반서준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유희를 바라보았다. 너무나도 친화적인 모습이었다.
  • “아직도 내 이름 기억하네? 내가 무지 맘에 들었었나 봐?”
  • 방금 전 유희에게 사나운 기세를 보이던 남자의 이름은 허빈이었다. 그는 반서준이 여자와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게 되었지만 목소리가 너무 낮았던 탓에 무슨 말을 하는지는 정확히 듣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갑자기 얼굴빛이 삭 바뀌더니 기세도 어느 정도 낮추고 얘기했다.
  • “반 대표님 사람이셨군요. 실례했네요.”
  • “잘 몰라요. 허 대표님 맘에 드시면 가져가세요.”
  • 반서준의 길고 가는 눈가에 차가운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 허빈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변태스러운 눈빛으로 품에 뛰어들어온 여자를 훑어보았다.
  • “넌 오늘 내가 초이스 한다.”
  • “전 그냥 술을 판매하는 담당일 뿐이에요. 다른 건 안 해……”
  • 유희의 몸 양측에 드리워진 손가락에는 살짝 힘이 들어갔고 그로 인해 그녀의 두려움이 드러나게 되었다.
  • 허빈은 사람들 앞에서 거절을 당하자 버럭 화를 냈다.
  • 그는 유희의 턱을 움켜쥐더니 포악하게 치켜들었다. 그는 매서운 눈빛으로 그녀를 위아래로 훑고 있었다.
  • “네까짓 게 뭔데!”
  • 유희는 제 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다. 그 이유가 분노 때문인지 아니면 두려움 때문인지는 알지 못했다.
  • 턱을 잡힌 탓에 그녀는 숨을 쉬기 힘들어졌다.
  • 그녀는 검은색의 테이블 위에서 잡히는 대로 술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더 이상 이진철을 배신할 수 없었다.
  • 술병이 내리쳐지기도 전에 반서준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는 실눈을 뜨고 있었고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갈라져 있었다.
  • “여기서 흥 깨지 말고 꺼져……”
  • 유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눈을 뜨고 증오에 찬 눈빛으로 반서준을 노려보았다.
  • “귀하신 반 대표님께서 제가 꺼질 수 있게 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 그녀는 어두운 눈빛으로 반서준을 노려보았다. 그는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고 입가에 번진 그 미소는 있는 듯 없는 듯한 냉기를 머금고 있었다.
  • 반서준은 유희의 손에서 술병을 가져왔다. 술병 안에는 아직 반이 넘는 고농도의 보드카가 남아 있었다.
  • “섣불리 고마워하지 말지. 내 말 아직 안 끝났는데. 방금 들었던 술병에 든 술 원샷 해.”
  • 유희는 찰나의 시간 동안 흠칫 놀랐다가 결국은 의외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남자는 그녀의 눈에 악마로 비치고 있었고 평생 잊을 수 없는 치욕으로 남아 있었다. 그는 어떤 짓이든 벌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 유희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개를 젖혀 반 병의 술을 꿀꺽꿀꺽 마셔버렸다. 짙은 알콜이 그녀의 구강을 자극했고 목구멍을 따라 흘러내리며 고온의 불덩이처럼 그녀의 위를 불태우고 있었다.
  • 반서준은 유희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다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그리고 몸을 기울여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대며 속삭였다.
  • “유희 씨 주량 괜찮네. 정말 돈이 많이 부족한가 봐. 이렇게 하는 건 어때? 한 병 마시면 내가 6천만 원 줄 테니까 원하는 만큼 마셔.”
  • 유희는 술기운이 올라 이성이 이미 알콜에 의해 증발된 상태였다. 그녀는 CC 언니의 당부를 잊어버리게 되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 그녀가 건드려서 무사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 그녀는 눈이 빨개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까치발을 하더니 사람들 앞에서 양손으로 주름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반서준의 반듯한 셔츠를 잡았다.
  • 유희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 “반서준, 지난번에 6천만 원으로 사기를 쳐서 내가 얼마나 비참했는 줄 알아? 그런데 지금에 와서 또 날 농락하다니……미친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