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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또 술 팔러 온 건가

  • 시북 병원.
  • 유희는 새벽에 퇴근을 한 뒤 몇 시간 눈도 못 붙이고 병원으로 향했다. 그래서 다크서클이 파운데이션으로도 가려지지 않았다.
  • 그녀는 이진철을 위해 비용을 지불한 뒤 빠르게 위층으로 올라갔다. 상황은 그녀가 상상했던 것만큼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의사 말로는 곧 퇴원도 가능하다고 했다.
  • 그녀의 삶은 드디어 정상적인 궤도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계속 이렇게 밤낮없이 버티다가는 언젠가 월세 집에서 급사하게 될지도 모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진철은 병상에 기대어 있었고 전보다 혈색이 훨씬 좋아져 있었다. 얼굴은 건강한 홍조를 띠고 있었고 살도 조금 오른 모습이었다.
  • 이진철은 유희가 들어오는 것을 보더니 새로 산 핸드폰을 바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 “어제저녁에는 어디 다녀온 거야?”
  • 유희는 한 시간 일찍 일어나 갈비찜을 만들었다. 그리고 보온도시락통에 넣고 두 쌍의 젓가락과 함께 챙겨온 것이었다.
  • 이진철은 흠칫 놀라더니 갈비찜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었다.
  • “내가 가긴 어딜 가. 여기 누워있었지. 왜 그렇게 묻는 거야?”
  • 유희는 창백한 입술을 핥았다. 이진철과 비교했을 때 더 환자 같은 사람은 그녀였다.
  • “누가 널 봤다 그래서. 에르메스에 여자랑 가방 사러 갔다고 하더라고. 역시 잘못 봤을 줄 알았어.”
  • 이진철은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 “에르메스라니 날 너무 추켜세우는 거 아니야? 내가 그걸 어떻게 사!”
  • 이른 아침의 햇살이 창문을 통해 병실 안에 쏟아졌다. 이진철의 젊은 얼굴에는 금빛 햇살이 드리워졌고 그의 미소는 부드럽고 찬란했다.
  • 유희는 넋이 나간 채 그의 얼굴을 쳐다보다 미간을 치켜 올렸다. 하긴 이진철한테 그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두 사람이 지금까지 사귀면서 이진철이 그녀에게 해준 선물이라고는 가방 하나밖에 없었다.
  • 그것도 막대사탕이랑 초코에몽을 테이프로 붙여서 만든 것이었다. 그럼에도 유희는 그걸 SNS에 올리기까지 했다.
  • “의사 선생님이 다음 주면 퇴원해도 된다고 했어. 이렇게 빨리 나을 줄은 몰랐네.”
  • 이진철은 마지막 한 점의 갈비찜을 먹으며 얘기했다.
  • 유희는 2인분을 준비했고 그녀는 너무 급하게 나온 탓에 식사도 하지 못했다.
  • 보온도시락통 안의 반찬은 이진철이 전부 먹어버렸고 고기 부스러기 하나 남지 않았다.
  • 이진철은 늘 이랬다. 밥 먹을 때 배려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지냈으니 유희는 이미 적응이 된 상태였다.
  • 유희는 얼굴에 붙은 잔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얘기했다.
  • “좋네. 집에서 쉬는 게 병원에 있는 것보다는 낫지. 드디어 다 버텨냈네.”
  • 이진철이 주머니에 넣었던 핸드폰이 불쑥 울렸다. 그는 유희를 쳐다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 “화장실 좀 다녀올게.”
  • 유희는 팔을 들어 이진철의 갈 길을 막았다.
  • 이진철은 뜨끔한 모습으로 유희를 쳐다보았다.
  • “왜 막는 거야? 나 급해!”
  • 유희는 손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반서준에게 너무 쇼킹을 받은 탓에 정신이 혼란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 이진철이 설마 그녀를 속이고 다른 여자 전화를 받겠나 싶었다. 우선 오랜 시간 동안 쌓인 두 사람 사이의 감정 기반은 둘째 치고 현실적으로 봤을 때도 계속 몸이 아팠던 이진철을 마음에 들어 할 여자가 있을까 싶었다.
  • 유희는 도시락통을 정리하다 입구에서 전해지는 발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자 이진철의 엄마 양정순이 보였다.
  • 그녀는 참하게 어머님이라고 부르며 양정순을 훑어보고 있었다.
  • 안 본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양정순의 손목에 두꺼운 금 팔찌가 보였다.
  • 육안으로 봤을 때 팔찌는 적어도 400만 원 정도는 될 것 같았다.
  • 유희는 얼떨결에 그녀에게 물었다.
  • “어머님, 팔찌 예쁘네요. 새로 장만하셨어요?”
  • 양정순은 팔소매를 잡아당겨 금 팔찌를 가리며 답했다.
  • “가짜야. 지금 집안 상황이 이런데 어떻게 진짜를 사겠어. 유희야, 너 지난번에 만났다던 그 사람 뭐하는 사람이야. 가짜 수표를 줬다면서.”
  • 유희도 어떤 부분에서 문제가 생긴 건지 알지 못했다.
  • 그저 얼렁뚱땅 둘러댔다.
  • “만우절이라서 사기를 당했나 봐요.”
  • 양정순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병실 안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유희와 양정순은 딱히 대화할 주제가 없었다.
  • 유희는 양정순이 그녀를 썩 내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아들이 집이 세 개 정도는 되는 재벌 가문의 아가씨와 만나길 바라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반 평생을 적게 노력해도 되었기 때문이었다.
  • 아들이 부모님에게 버림받고 지금까지 다른 사람이랑 월세집에서 사는 유희 같은 사람을 만나길 원하지 않았다.
  • 유희의 핸드폰 벨 소리가 숨 막히는 어색함을 깨주었다. 그녀는 전화를 받았다.
  • 그녀에게 카메라 테스트를 하러 오라는 전화였다.
  • 이진철이 나오기도 전에 양정순에게 먼저 얘기했다.
  • “어머님, 전 먼저 가볼게요. 진철이한테는 제가 카메라 테스트하러 간다고 대신 말씀해 주세요.”
  • 양정순은 아무 말도 듣지 못한 것처럼 태도가 냉담했다.
  • 유희는 이미 양정순의 태도에 습관이 되어 있었기에 그냥 문을 열고 나갔다.
  • 양정순은 유희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 “우리 아들이 어쩌다 너 같은 여자를 사귀게 됐을까. 카메라 테스트? 기껏해야 엑스트라겠지. 그딴 하인이나 행인 역할을 하는 주제에 카메라 테스트는 무슨.”
  • 이진철은 화장실에서 나오면서 유희가 이미 간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제 엄마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서있었다.
  • 양정순은 불만을 토로했다.
  • “유희 쟤 말이야. 에미가 없는 게 아주 티가 나는 애야. 어쩜 저리 버릇이 없어. 항상 썩은 얼굴로 있단 말이야. 수표 일은 발견 못한 거지?”
  • 이진철은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 “쟤 지능으로 발견했을 리가 없지. 그런데 궁금하단 말이야. 수표를 어디에서 얻어온 걸까? 쟤 능력으로 6억? 상상도 안 되는 일이야.”
  • 양정순은 손목에 낀 금 팔찌를 자세히 들여다보며 얘기했다.
  • “그래도 유희 쟤 옆에 잘 끼고 있어. 퇴원하면 그때 가서 다시 보자고. 어쩌면 유희가 가족들한테 손 벌린 걸지도 모르지. 6억이 걔네 부모님한테는 별거 아니었나 보지.”
  • 이진철은 이불을 걷고 침대 위로 누웠다.
  • “유 가에서 유희를 딸로 인정할 리가 없어. 내가 진작부터 알아봤어.”
  • 양정순은 주름이 자글자글하도록 웃었다.
  • “돈이 어디서 나왔건 뭔 상관이야. 네 병 치료하고 남은 돈 4억으로 얼른 좋은 여자애 하나 물색해 봐야겠어. 유희는 너한테 안 어울려.”
  • 이진철은 침묵으로 답했다. 묵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 눈 깜짝할 새에 이진철이 퇴원하는 날이 되었다.
  • 유희는 촬영장에서 걸어 나왔고 뜨거운 햇살이 눈부셨다. 그녀가 낀 선글라스는 그녀의 얼굴 반을 가리고 있었다. 주먹만 한 작은 얼굴은 햇살 아래서 투명할 정도로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 그녀는 택시를 타고 하비오 호텔로 향했다.
  • 이진철의 퇴원을 축하하기 위해 이 가의 사람들은 이곳에서 식사를 대접하기로 했다. 인당 40만 원짜리 호텔이었다.
  • 이 가에서 이곳을 식사 장소로 정한 것에 대해서 유희는 이상한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 어디에서 이렇게 많은 돈이 난 걸까.
  • 유희는 호텔 로비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그녀는 이진철이 말한 룸을 찾지 못해 전화로 마중 나오라고 얘기할 채비를 했다.
  • 문득 등 뒤에서 남자의 차갑고 톤이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희는 차가운 얼음장에 부딪히는 기분이 들었다.
  • “얼마나 지났다고 우리 또 만났네. 유희 씨 이번에는 여기서 술을 파나?”
  • 유희가 모를 수 없는 목소리였다.
  • 그녀는 뒤돌아 반서준을 쳐다보았다. 양복을 입고 있는 그는 한껏 건방진 모습이었다. 그리고 담백한 목소리에 온화한 미소가 더해져 있었다!
  • 유희는 그를 쳐다보았고 그의 미소에 오히려 냉기를 내뿜었다.
  • 유희가 이때 든 생각은 딱 한 가지였다. 빨리 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