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내 여자
- 한다은이 떠난 뒤 비서 진풍이 서류 봉투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 반서준은 흰색 끈을 풀었고 안에는 유희의 정보가 들어있었다. 그녀가 어렸을 때 기저귀를 찬 사진까지도 들어있었다.
- 유희는 스무 살이었고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어렸다. 그녀는 미대 휴학생이었다.
- 그녀의 남자친구 유진철은 병으로 휴학한 상태였다.
- 반서준은 유희가 말한 목숨 값이 남자친구의 수술비였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 반서준의 입가에는 차갑고 옅은 미소가 번졌다. 참 대단한 여자구나 싶었다. 사랑을 위해서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희생을 할 수 있다니.
- 부모님은 그녀가 세 살일 때 이혼을 했고 그 해 어머니는 살인죄로 감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 그녀의 아버지는 갑부 유천웅이었고 이혼한 뒤 그녀의 딸을 데려가서 같이 살지 않았다.
- 그녀는 세 살 때부터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고 외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그 해 그녀는 고삼이었다.
- 외할머니가 죽은 뒤 외삼촌 일가에서 집을 점해버렸고 그녀는 현재 살 곳도 없이 떠드는 첮가 되었다.
- 반서준의 눈에 유희의 출신은 더할 나위 없이 엉망진창이었다.
- 그녀가 살아남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했다. 모든 재수 없는 일을 전부 맞닥뜨리며 살아온 듯했다.
- 그는 유희의 자료를 파쇄기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어두운 눈빛으로 통 유리창 밖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 유희는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거실에 엉망으로 쌓여있는 제 짐을 보게 되었다.
- 집주인 안 씨는 담배를 물고 거실에 앉아 있었다.
- 유희는 웃는 얼굴로 집에 들어섰다.
- “영희 언니, 월세는 며칠 뒤에 꼭 드릴게요. 절대 밀리지 않을 거예요.”
- 안영희는 유희를 향해 담배연기를 뱉었다.
- “그딴 말 누가 믿어. 월세 못 낼 거면 당장 나가.”
- 주머니가 얼굴보다 깨끗한 유희는 도무지 언제 월세를 낼 수 있다고 장담할 용기가 없었다.
- 그녀는 유도리 있게 말을 건넸다.
- “언니, 하루만 더봐주시면 안 될까요? 시간도 늦었는데 묵을 곳을 찾기도 힘들잖아요.”
- 하민은 팔짱을 끼고 구경하다 눈썹을 치켜 올렸다.
- “모텔 같은 데서 자면 되지.”
- 유희는 하민을 째려보았다. 어쩜 저렇게 사악한 여자가 있을까. 거의 반 년을 같이 살았는데 동정심도 없이 구는 건나 싶었다.
- 그녀가 모텔에서 잘 돈이 있을 리가 있나.
- 안영희는 그녀를 흘겨보았다.
- “젊은 아가씨가 너무 뻔뻔하게 굴면 안 돼. 좋게 끝내자고. 계속 버티고 안 나가면 나도 가만 안 있어.”
- 유희는 안영희가 세게 나올까 봐 두려웠다. 그녀는 100킬로가 넘는 안영희의 한주먹 거리도 되지 않았다.
- 유희는 짐을 전부 싸 들고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방 안에 다른 물건들을 정리할 새도 없었다.
- 그녀는 건물 입구에 서있었다. 아무런 목적도 방향도 없었고 어디로 갈지도 몰랐다. 외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로 그녀에게는 집이란 곳은 없었다.
- 고독이 그녀를 엄습했고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귓가에서 포효하고 있었다.
- “유희야,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던 거야?”
- 이진철의 목소리를 들은 유희는 환청이라도 들은 줄 알았다.
- 그녀는 빠르게 고개를 돌렸고 이진철은 그녀의 등 뒤에 서있었다. 그의 옆에는 새삥으로 보이는 아우디가 깜빡이가 눈부시게 깜빡거리고 있었다.
- 유희는 막연한 얼굴이었다.
- “네가 여긴 왜 온 거야? 설마 돈 돌려주려고 온 건 아니겠지? 너한테 그런 각오가 있다면 죽어도 지옥에는 가지 않을 거야.”
- 이진철은 연속 며칠 동안 유안영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 그래서 그에게 한없이 잘해주던 유희가 그리워지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그의 유희는 늘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사람이었다.
- 강도가 그를 덮치는 날이 와도 그녀는 대신 칼을 막아줄 사람이었다.
- 유희를 빼고 그에게 이 정도의 사랑을 준 사람은 없었다.
- 이런 여자를 완전히 놓아주는 건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 이렇게 늦은 시간에 유희는 넋이 나간 채로 큰 캐리어와 함께 입구에 서있었다.
- 이진철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 “집주인한테 쫓겨난 거야? 마침 내가 근처에 집을 잡았거든. 내가 널 거둬줄 수 있어.”
- 이진철은 손을 뻗어 유희의 캐리어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유희는 그가 만지지도 못하게 했다.
- “가식 떨지 마. 이진철 너 이제 와서 좋은 사람인 척하는 거 너무 늦었다는 생각은 안 들어? 이젠 널 보기만 해도 구역질 나. 이 사기꾼아.”
- 이진철은 유희의 손목을 꽉 잡고 있었고 병이 완치된 지 얼마 안 된 사람의 완력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힘이 셌다.
- “자기야, 그만해. 넌 날 떠나면 아무것도 아니야.”
- 유희는 너무 아파서 비명을 지를 뻔했다.
- “이진철 이 손 풀어. 우린 이제 끝났어. 지금 네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건 돈을 갚는 거야. 고소장 받을 준비나 해.”
- 이진철은 힘껏 유희를 품으로 끌어안고 강제로 키스를 하려 했다. 그리고 유희는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쳤다.
- 그녀는 토악질이 날 것만 같았다.
- 입술이 거의 맞닿으려던 찰나 두 사람은 문득 자동차 경적 소리를 듣게 되었고 소스라치게 놀라게 되었다.
- 반서준이 차에서 내렸고 반쯤 태운 담배를 껐다. 유희는 그의 눈이 뚫어져라 그녀를 응시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광풍과 폭우를 만들어내는 중인 듯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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